땅끝편지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최고관리자 0 1,789 2020.06.19 20:52

< 1 > 선교로의 부르심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1월 13일(금) 16:58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나는 대학교 끝나갈 무렵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에서 성경공부하면서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았다. 졸업 후에 직장을 다니다가 1978년 12월 31일 사표를 쓰고 곧바로 오산리 순복음 금식기도원에 가서 3주간의 금식 기도를 마쳤다. 그 후 계속되는 기도와 성경공부를 통하여 선교에로의 부르심을 재확인하고 1980년 3월에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광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던 1984년에 이란 선교사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북방선교를 원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쪽에는 길이 열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먼저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기도하고 있던 터였다. 교회를 사임하고 떠나려는 중 이란 현지의 사정으로 선교사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많이 낙심이 되었다.

  
▲ 임성익ㆍ이계연선교사 부부와 자녀들.

이때부터 나와 아내인 이계연선교사는 저녁마다 기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해 연말에 우리를 부산 동래중앙교회로 인도해 주셨다. 동래중앙교회는 담임목사이신 故 신동혁목사님도 훌륭하셨고 성도들도 좋은 교회였는데 나는 그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3년 동안 부목사로 시무했다.

그런데 1987년을 맞이하면서 선교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다시 오기 시작하여 아내와 나는 자정을 전후하여 아무도 모르게 새벽기도실에 가서 6개월간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할 때 국내에서 다른 목회지가 세 곳이나 열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교를 위해 계속 기도하였는데 그 때 장신대 오성춘교수님이 전화를 주시더니 "파라과이에 남미한인교회가 있는데 거기서 목회하면서 선교도 할 수 있다. 가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선교사가 아닌 이민 목회자로 가기 때문에 조금 서운했지만 오직 선교를 할 수 있다는 말에 너무 반가워서 앞뒤도 안 돌아보고 무조건 "예"를 했다.

당시 남미교회는 9개월 동안 목사가 없어서 하루라도 빨리 담임목사를 모시고자 했지만 비자를 받을 수가 없어서 편법을 사용해서 목회자를 모시려고 했다. 브라질 바리그(VARIG) 항공사 사장이 상파울루까지 탑승을 허락하는 팩스 한장을 보내면서 이 팩스를 갖고 바리그항공을 타고 상파울루까지 오라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오면 아는 사람이 와서 파라과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진하게 그렇게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팩스로 나와 함께 가는 심방전도사와, 교육전도사 가정은 무사히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는데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7번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가 짐을 정리하느라 맨 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우리를 안내하신 분이 우리에게는 미처 7번 문 이야기를 못했던 것이다.

또 한 번 낙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다른 계획이 계셨다. 그날 처가로 돌아가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잠을 깬 후 총회 세계선교부에 전화를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더니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었다.

어제부터 장신대 선교훈련원에서 총회 파송 선교사 훈련을 하고 있는데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4년 전에 이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이미 총회에서 선교사 인선을 받았기 때문에 바로 선교사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제4기 선교사 훈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훈련이 끝나갈 무렵 그렇게 안 나오던 파라과이 비자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민 목회자가 아닌 총회 파송 선교사로 파라과이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파송교회가 없어서 선교훈련 동역자인 이병일선교사가 파송받는 중랑제일교회에서 꼽사리끼고파송만 받았다.

비록 후원을 해주는 교회가 없었지만 우리는 마냥 감사하고 기쁨에 벅차 있었다. 이 조그만 체험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파라과이로 불러주셨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면서 파라과이로 출발할 수 있었다. 






<2> 남미의 심장 파라과이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1월 20일(금)

지구본을 들여다보면 파라과이는 한국과는 정 반대에 위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땅 속을 곧장 직선으로 뚫고 들어가면 파라과이 근처가 나온다. 그만큼 지리적으로는 한국과는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본인이 처음 파라과이로 갈 당시에는 솔직히 파라과이의 정확한 위치와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요즈음 파라과이가 축구 때문에 축구 잘하는 나라 정도로 한국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파라과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한국에서 파라과이로 가려면 비행기를 두 번 내지 세 번 갈아타야 한다. 내가 처음 갈 당시에는 김포-Tokyo-L.A-쌍파울로-아순시온으로 가는 노선을 이용했는데 비행기를 세 번 갈아타야 했다. 비행기 타는 시간과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합쳐서 약 40시간이 걸렸다. 비행기 안에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다섯번 하고 나면 목적지인 아순시온에 도착한다. 처음 가는 여행이라 참으로 지루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했겠지만 기대반 설램반으로 그렇게 지루한줄 몰랐다.
 파라과이 아순시온 공항에 내리니까 그 때가 4월 23일인데도 더운 기운이 온 몸을 확 감싼다. “아 여기가 파라과이구나”하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워진다. 공항이 너무 한적해서 그런지 비교적 넓게 느껴졌다. 주변이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고 한국의 시골 어느 이름 모르는 공항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공항에는 경비행기가 두 대만 있을 뿐 다른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운이 좋으면 다른 비행기 한 대가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첫 인상은 파라과이가 참으로 평온하고 낭만적인 나라구나 하고 느껴졌다. 

파라과이는 강한 아열대성 기후를 갖고 있는데 여름이 6개월 이상 계속되고 걸핏하면 35도를 웃돈다. 아순시온은 세계에서 가장 더운 10대 수도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무더운 날씨가 일주일 정도 계속되어 이제는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될 때가 되면 한차례 강한 비바람과 함께 한 나절 또는 하루 종일 비가 쏟아진다. 그때 더위 먹은 스트래스가 확 풀린다. 그리고 비자 자주 와서 그런지 나무들이 빨리 자라고 큰 나무들이 그늘을 가리운다. 햇볕이 따끔따끔하지만 그늘에 들어가면 더위도 견딜만하다. 그래서 사람이 살만한 곳이 파라과이다.
파라과이는 모든 것이 느리다. 변하는 것도 느리다. 21년 전에 보았던 거리가 지금도 그대로다. 한국 사람들이 사는 사시장 주변도 일부 도로만 약간 바뀌었고 가게가 조금 많아졌을 뿐 21년 전 그냥 그대로다. 사람들이 나무 그늘 밑에 둘러 앉아 떼레레(파라과이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약초 섞은 물, 통속에 약초를 넣고 약초에 물을 조금씩 넝어가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빨대로 수실 빨아 마신다)는 빠는 모습도 이전 그대로다. 한국이 너무 빨리 바뀌어서 그런지 파라과이는 시간이 멈추어져 있는 느낌이다. 일을 처리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너무 느리다. 그러나 파라과이 자연이나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 낭만이 느껴진다.
파라과이는 산과 바다가 없다. 조그만 언덕들과 구릉지대와 강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즐길 수 있는 자연이라든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관광 자원이 거의 없다. 그러나 파라과이 사람들은 그런 것에 그렇게 불평하거나 개의치 않는다.
도시 변두리나 도시를 떠나 조금만 시골에 가면 부부나 가족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로 노닥거리면서 떼레레를 돌려가면서 마시는 광경, 소때들이 평화스럽게 거리나 들판은 왕래하는 광경, 조그만 공간에서 배구나 축구를 하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형편이 어려운데도 크게 슬퍼하거나 티를 내지 않는다. 성격이 다혈질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는 사람이 와도 테레레를 한번 돌려가며 마시면 금방 친구가 되어버린다. 겉으로 볼 때는 낭만의 나라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어느 가정이나 어느 나라에게나 느낄 수 있듯이 한꺼풀 벗기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가정이 파괴된채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에 눌려 헐벗고 신음하고 고통받는 많은 파라과이 백성들을 볼 수 있었다.






 < 3 > 파라과이의 한인들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1월 24일(화) 19:03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내가 처음 파라과이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약 1만5천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파라과이에 닥친 경기 불황으로 인해서 다 떠나가고 약 5천명 정도가 남아 있다. 현재 한국 사람들은 벤데(Vende:가가호호 방문하여 작은 상품을 파는 행위), 제품업, 옷가게, 양계업, 데스펜사(Despensa: 한국의 슈퍼마켓과 비슷함), 전자가게, 액세서리, 운동화 가게, 식당업, 여행사, 생산공장(학용품, 아이스크림, 원단, 화장지 등) 을 비롯해서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수입해서 파는 수입상까지 매우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 전통음료인 테레레를 마시고 있는 파라과이 현지인.

파라과이에 한인들의 이민은 1965년 농업 이민에서 시작된다. 1965년 2월 17일 30세대 95명이 부산항에서 화란 국적의 2만8천톤급 화물선 보이스벤 호를 타고 약 3개월 동안 항해 후 파라과이의 아레구아(Aregua)까지 오게 된다. 이들 이민자 가운데는 순수한 농민들도 있었지만 농사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전직 공무원, 회사원, 사업가, 장사를 하던 사람 등 한국에서 각양각색의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민의 동기도 다양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신천지 개척에 대한 의욕과 희망을 가지고 황무지를 개척하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의 지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영세한 자본을 가지고 농사 경험도 없이 모기떼와 개미떼, 독충이 우굴거리는 열대의 황무지를 개간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다, 결국 그곳에서는 호구지책도 하기 어려워 모두 아순시온으로 나오게 된다.

아순시온에 나온 그들이 호주머니가 비어가자 생계 유지를 위해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벤데였다(Vende: 파라과이에서 성행하는 상업 행위인데 집집마다 방문을 하면서 물건을 팔고 주 단위로 수금을 하는 할부판매방식이다). 처음에는 이민생활에 쓰려고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이웃 현지인들에게 내다 팔았는데 너무 반응이 좋았다. 한국인들의 강한 생할력과 끈기 그리고 장사 근성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금방 자리를 잡고 나갔다. 농사는 못지으면서도 장사는 끝내주는 민족이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서반아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도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다음날 벤데를 나갔다고 한다. 제품과 옷가게 하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시장 앞에서 까실랴(Casilla: 좌판식의 가두 판매가게)로 시작하다가 얼마 안가서 우리나라의 동대문의류상가와 같은 보난사 시장과 그 주변의 상권을 거의 장악아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어글리 코리안들이 생겨나고 돈을 벌면 제 욕심만 차리고 미국이나 캐나다 등 살기 좋은 나라로 재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러면서 한인들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고 현지인들에게 많이 배척을 당하게 되면서 남아 있는 한인들이 자성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한인회를 중심으로 현지인들 위한 장학 사업을 펼치는 등 현지인들과 친선을 다지며 우호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파라과이에는 산과 바다가 없어서 특별한 관광지가 없기 때문에 휴가를 잘 가지 않는다. 그대신 축구, 배구, 테니스, 골프 동호회들을 만들어 여가 선용을 하며 온 가족이 함께 즐긴다. 그래서 파라과이 한인들은 잘 모이고 단합이 잘된다. 그러다 보니 파라과이는 남미 어느 나라에서도 없는 자랑할만한 일들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파라과이 한인들이 남미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문교부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전일제 한국학교를 자체적으로 세웠다. 거의 모든 자녀들은 현지인 학교에도 보내고 한국학교에도 다닌다(이것은 현지인 학교가 오전이나 오후 수업만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학교 때문에 파라과이 1.5세나 2세들은 한국어 실력이 세계 어느 나라 이민 2세들보다 뛰어나다. 둘째, 그래서 파라과이 2세들이 세계 어느 나라 교포 자녀보다 한국대학에 많이 진출하는 비율이 높고 학습 적응률이 높다. 셋째, 2세들이 한국말을 잘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교회학교에서 유일하게 한국말로만 설교하는 곳이 파라과이 이민사회다.

무더운 나라, 바다와 산과 호수가 없어서 관광지가 없는 나라, 휴가를 갈만한 곳이 별로 없는 나라, 사는 것도 풍족하지 못한 나라,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런 나라에 사는 한인들에게 다른 데서 가질 수 없는 다른 보배를 주셨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나는 이런 하나님이 좋아서 지금까지 파라과이에서 사역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로 든든히 서가는 교회

[ 땅끝에서온편지 ] <4 > 남미한인교회 사역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2월 01일(화) 18:43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이민 가서 사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일반적으로 상처들을 많이 가지고 살아간다. 언어문제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현지사회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해 받는 스트레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는 것에 대한 외로움도 있고, 장사 문제로 인해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들간에 불신이 깊어지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또한 생활 공간이 좁아서 집과 사업장과 교회 테두리 안에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삶의 여유가 없어지고 마음이 강퍅해지기도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데 이런 상처들을 교회에 와서 풀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이민교회는 목회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남미교회도 만만한 교회가 아니었다.

  
▲ 현지인 교회사역자들과 함께한 필자(앞줄 좌측 두번째).

1976년 한 성도집에서 시작된 남미교회는 본인이 처음 부임했을 때 주일 예배에 2백50여 명의 성도가 참석하는 파라과이에서는 큰 교회중의 하나였다. 담임목사가 9개월 동안 부재중이어서 장로님들이 직접 설교하고 성도들을 관리하는데도 성도들의 이동이 거의 없을 만큼 아주 튼튼하고 조직이 잘된 교회였다. 헌신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이 많이 있어서 목사가 없는데도 장로님들 중심으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면서 성도가 똘똘 뭉쳐있었고 초창기라서 그런지 성도들이 봉사에 열심이었고 성도간의 교제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합쳐졌다가 다시 갈라진 교회로 12년 동안 담임목사가 네 번이나 갈리는 등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교인들이 상처를 많이 받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의식이 너무 강한 분들이 몇 분 계셨다.

부임 초기에는 교회에 적응을 잘못해서인지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났다. 본인 생각으로는 아무 문제가 될 것도 없는데도 문제가 되었다. 그때 나는 그냥 평범한 목회로는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고 전 교회에 회개와 부흥을 위한 금식을 선포했다. 40일 후에 부흥회를 열기로 하고 부흥회를 위한 기도도 함께 했다. 이 금식기도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다. 많은 교회 성도들이 동참했다. 심지어 어떤 새로운 교인 중에 물도 안마신 채로 일주일간을 금식하는 성도도 있었다. 금식 기간 중에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금식 후에는 전에 일어났던 잡다한 문제들이 사라지고 교회가 조용해지고 편안해졌다. 이 때 받은 은혜와 힘을 가지고 몇 년 동안을 목회와 선교를 힘있게 할 수 있었다.

필자는 부흥회를 위한 기도도 할 겸 3주간을 금식기도 했는데 부흥회 강사는 미국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모 목사님이셨다. 그런데 부흥회 5일을 앞두고 갑자기 못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비자를 쉽게 받을 줄 알고 부흥회 날짜가 가까워서 신청했는데 거절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과수까지 오시면 우리가 월경을 해서 아순시온으로 올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겠다고 했는데 그런식으로는 못오시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교포 신문에도 부흥회 광고 하고 모두 열심히 준비기도 하고 있는데 낙심이 되었다. 그런데 김성광 선교사가 내가 금식기도를 하니까 위로하러 왔다가 나의 사정을 듣더니 신일교회 이광선목사님께서 미국에 와 계시며 부흥회 기간에 파라과이를 방문하는데 이 목사님께 연락을 하면 말씀을 전해주실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당장 그 자리에서 전화를 드렸더니 이 목사님께서 수락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할 수도 있는데 나보다 더 좋은 목사님이 말씀을 전해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시냐고 했더니 김삼환목사님이시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김삼환목사님은 명성교회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휴가를 얻고 유럽 여행을 생각하고 계셨는데 이광선목사님이 신일교회에서 파송한 김성광선교사가 사역하는 남미로 가자고 해서 같이 남미 선교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김삼환목사님을 주강사로 이광선목사님을 부강사로 모시고 전례 없는 은혜스러운 부흥회를 하게 되었고 이 부흥회를 계기로 명성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선교 후원을 받는 축복도 받고 있다. 금식기도의 위력을 느끼는 또 한번의 계기가 되었다.

남미교회 성도들은 처음에는 선교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전임 목사가 신학교를 통한 선교를 하면서 교회 재정을 잘못 운영해서 그런지 선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어서 선교의 '선'자도 꺼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상처받은 교인들의 마음을 치유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처럼 선교하는 교회로 든든히 서가도록 기도하면서 성도들을 독려해 나가자 성도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렸고 본인이 시무한 7년 동안 의료선교, 지도자 양성, 방송선교, 스포츠센터 건립 등과 함께 6개의 현지인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결국 6개의 남녀 선교회들은 각각 지교회 하나씩을 맡아 전적으로 도와주고 후원하는 선교단체로 변해갔다.

남미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변해가면서 교회도 서서히 부흥되고 성도들도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많은 축복을 받게 되었다. 7년 후에는 필자가 처음 부임했을 당시보다 몇 배나 헌금이 증가해 재정이 많이 풍부해졌으며 선교를 크게 확장했는데도 마음껏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선교에 헌신함으로써 받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는다. 







 < 5 > 중남미 가톨릭에 대한 이해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2월 08일(화) 16:57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파라과이는 가톨릭권 선교지역이다. 가톨릭권 선교는 다른 지역처럼 종교적, 정치적 대치점에 있는 지역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권 선교는 타 지역에서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고민과 갈등이 있음을 본다. 그것은 그 땅에 접목된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5백여 년간 유일한 주류 종교로 자리를 잡고 모든 백성들의 정신과 문화의 지주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남미에 선교하기 위해 중남미 가톨릭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남미 가톨릭은 로마 가톨릭과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표면상의 가톨릭과 달리 중남미의 가톨릭은 아메린디오의 토속적인 종교관과 중세적인 이베리아인들의 가톨릭의 의식 종교관이 혼합되어 하나의 대중종교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중남미의 가톨릭은 유럽 어느 곳에서 가지고 왔던 간에 마리아 상이나 성자 상을 분별없이 숭배하고 또 본토인들의 아메린디오의 토속적인 우상도 숭배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숭배의 대상이 본토 인디오들의 신화적인 인물이지만 그 이름만 가톨릭적인 이름으로 대치해서 숭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종교는 혼합주의 종교관, 종교의 무속화, 중재자 문화(Mediator)와 성물숭배 사상이라는 톡특한 종교문화를 낳게 되었다.

  
▲ 동방박사의 날(1월 6일)에 선물을 파는 가게들의 모습.

한편 중남미 가톨릭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구의 대부분이 가톨릭 교인이었던 이 지역에 지난 1백년 동안 복음주의 개신교회의 극적인 성장이 일어났다.

처음에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남미 지역을 기독교화 된 지역으로 간주하고 선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성공회나 루터교회는 라틴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단체만을 상대로 그들의 활동을 제한시켜 왔었다. 그러나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측은 명목상의 로마 가톨릭 국가에서 개종 활동을 벌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으며, 라틴 아메리카를 당연한 선교지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감리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 등 대규모 교파들이 로마 가톨릭도들을 개종시킨다는 목적으로 중남미 지역으로 들어왔으며, 20세기 중반부터는 펜테코스탈을 중심으로 보수주의 교파들을 대표하는 선교사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과거에는 90%이상이던 가톨릭 교세가 현재는 80%로 감소했다. 그러나 실질적 교세는 30% 정도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많은 수가 영세는 받았으나 대부분이 명목상의 교인으로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고 있으며 이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무속신앙이나 기독교적 이단, 이교에 참석하고 있다. (브라질의 가톨릭 총회는 지난 1996년 총회에서 자신들의 실질적 교세는 30%로 발표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20%로 발표하고 그 해의 총회에서는 전도는 잠시 중지하고 '잃은 교우 찾기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때 내륙 지역에서는 개신교가 큰 탄압을 받기도 했다)

현재 중남미 개신교 신도 비율은 약 15%로 추정하며 특히 오순절교단의 교세가 개신교 전체에서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1백년 동안, 특히 지난 30~40년 어간에 이러한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되면서 한때 이 대륙 전체를 장악했던 정치적, 종교적 전통적인 획일적 구조가 사라졌다. 가톨릭 교회내의 많은 사람들은 안일주의를 불러온 혼합주의가 그토록 만연되기까지 방치한 것과 가톨릭이 독점했던 5백년 역사를 오용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신학적 다양성, 성경읽기에 대한 강조, 카리스마틱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과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을 옹호하는 가톨릭 신학자들이 등장하고, 평신도 지도력과 사회 참여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 전통적인 가톨릭이 강한 힘을 과시하며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전도의 동력을 상실한 채 의식주의적인 종교로 남아 있으며 대중적이며 혼합주의적인 중남미가톨릭의 그 근본은 아직 변치 않고 있다.

중남미의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가톨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구가 있어야 한다. 가톨릭권의 30%와 개신교의 15% 뿐만 아니라 나머지의 55%의 백성에 대해서, 더욱 큰 관심과 정책을 펴야 한다.  특히 무속적인 신앙형태, 조상들의 종교와 섞어서 믿는 혼합적인 신앙형태와 이로 인해 큰 힘을 가지고 이들 지역을 지배하고 악령의 세력들에 대한 연구와 대책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한 강력한 영적 전쟁, 치유사역과 중보기도 사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성령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샤마니즘화하는 경향이 있는 중남미 오순절 운동에 대해 바르고 강력한 성경적인 영적인 사역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분별한 사역이 아니라 말씀에 무장한 바른 영적인 사역이 필요하다 하겠다. 







<6>"예수 믿습니다", 상처입은 이들의 아픈 거짓말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 편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2월 29일(화) 11:27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 남미 지역에서 사역하기 위해 파송된 선교사들은 제자훈련사역이나 목회자 훈련사역, 상담훈련 또는 교회교육 등 지도자 훈련등을 받은 후 사역을 시작하면 이 곳에서 직면하게 되는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잘 감당해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사진은 새생명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교인들과 함께.
1995년 5월 우리는 직접 현지인 사역에 전념하기 위하여 7년 동안 시무하던 남미한인교회를 사임하였다. 교회를 나오면서 몇몇 한국교회의 후원과 남미한인교회의 재정지원으로 지금의 장소에 2ha(6천평)의 아름다운 학교 및 교회 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우리는 한국으로 들어가서 1년 동안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안식년이지만 제2기 사역을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안식년 동안에 이론적으로 부족한 것들을 보충하기 위하여 장신대 선교신학대학원 Th.M 과정에 입학을 했다. 2년 동안 이수해야 할 과목을 1년에 이수하기 위해 여름방학은 물론 겨울방학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현지인 교회개척을 위해서 C.C.C에서 운영하는 새생명 훈련(N.L.T.C)을 4개월 동안 합숙하며 받았다. 아내는 아내대로 다운증후군이 있는 아들 사무엘 교육 때문에 분주했고 딸 사라는 한국의 초등학교에서 적응하느라 바뻤다. 안식년이 끝나고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왔을 때 가족이 다소 지쳐 있었지만 새로운 선교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새 힘이 솟아났다.

선교지에 복귀해 제일 먼저 한 것은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선교지 주민 가정을 샅샅이 찾아가며 매일 전도했다. 이 때가 아마 과거에 했던 전도보다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파라과이 C.C.C. 형제들을 만나게 해 주셨는데 처음 전도할 때 스위스에서 단기 선교 여행 나온 C.C.C 형제들을 포함해 5개국 선교사들(한국, 스위스, 콜롬비아, 볼리비아, 파라과이) 18명이 함께 일주일 동안 전도하고 영화 '예수'를 상영하며 결신자들을 얻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1996년 8월에 시작된 전도와 양육의 열매로 그 해 12월 첫째 주에 새생명교회(Iglesia Vida Nueva) 창립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개척교회 사역은 현재 7개의 교회에 이르고 있고 각 교회마다 자립과 성장을 향하여 몸부림치고 있다.

파라과이는 일반적으로 다른 남미 국가보다 사역하기가 더 힘이 든다. 그래서 어떤 외국선교사는 파라과이는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했다. 쏟아 부은 노력에 비해서 열매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지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파라과이는 한국처럼 전도하면 크게 거부하지 않는다. 복음을 제시하면 'Si(예), Si(예)' 하며 잘 듣는다. 교회 나오라고 하면 70%는 교회 나오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Si, Si' 하는 사람들의 99%는 교회에 안 나온다.

남미가톨릭의 신학과 가치관은 이곳 현지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데 개심이 잘 안되는 것은 이 사람들의 삶, 그리고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 남미 사람들 특히 파라과이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거짓말, 일상생활 속에서 자주 범하는 죄(예를 들어 성적인 범죄)등을 너무나 쉽게 또 태연하게 반복하면서도 '예수 믿는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그들의 고백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진리 위에 있지 않은 거짓된 고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헤어지고 다시 결합하고 하는 무질서한 가정에서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 가운데 갚은 상처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이들에게 바른 복음을 전해서 개심케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이곳 환경에 적응할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강력해서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 곳에 맞는 선교전력과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파라과이의 거의 대부분의 교회 사역자들은 교회에서 나오는 사례금으로 생활할 수 없어 다른 직장이나 사업장을 갖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목사들을 보고 사명감의 문제라고 나무랐던 적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파라과이에서 한 교회가 세워진 다음 자립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느끼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교회를 세우고 운영해나가는 것 자체만으로 사명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역자들이라도 있으니 그나마도 남미와 파라과이 교회가 조금씩이나마 성장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로 교회가 계속 세워져 가고 운영될 때 분명히 여러 가지 문제가 파생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우선 교회성장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의 건강과 성숙에 있어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물론 이러한 교회 중에서도 분명히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교회가 있다. 특히 중남미 지역에서 급성장하는 오순절교단들은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평신도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있는데도 그들이 세운 교회 가운데 일부는 크게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오순절 교회의 선교전략을 연구하고 배울 필요가 있다.

또한 파라과이만 하더라도 그 교회가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가 되지 않아서 문제이지 단순히 교회를 개척하고 세워나가는 것은 이 곳 현지인들이 한국선교사 못지 않게 잘한다. 이 곳 현지인들은 교인들 두세 가정만 있어도 가정집이나 셋방을 빌어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예배당을 먼저 지어 놓고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한국 선교사는 단순히 교회를 개척하는 것 자체도 좋지만 평신도 지도자나 성숙이 필요한 목회자들을 훈련시켜 사역현장으로 보내는 사역이 효과적이라고 본다. 이 분야에는 한국선교사들이 분명이 큰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남미나 파라과이에 오는 선교사들은 무조건 사명감만 가지고 교회 개척을 위해 올 것이 아니라 제자훈련사역이나 목회자 훈련사역, 상담훈련 또는 교회교육 등 지도자 훈련사역을 받고 또 이 사역에 대한 경험을 쌓아 그 방면의 사역을 위해 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7> 믿음의 황무지에 세운 주님의 학교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 온 편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1월 07일(목) 10:26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남미 기독교학교는 1999년 3월에 개교했다. 필자는 처음부터 기독교학교를 설립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남미한인교회에 있는 동안 파라과이에서 제일 큰 시장인 사시장 주변에 불우한 아이들이 많이 있어서 이들을 위한 사회선교센터 설립을 원했는데 교회내의 사정으로 부득불 학원 선교로 방향을 수정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선교적인 측면에서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 당시에만 해도 파라과이는 학생 수에 비해 학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기독교 이념과 선교 목적을 가진 미션 스쿨이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학원사역을 통한 선교의 필요성을 많이 느끼고 있었고 기독교학교를 통한 선교사역은 광범위한 계층에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남미기독교학교 제1회 졸업식 모습

학교를 설립 할 때 세가지 목표를 설정했었다. 첫째, 기독교교육 및 학문의 기초교육을 통해 전인 교육을 시키고 그들이 속해있는 공동체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한다. 둘째, 신앙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적인 시각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지도자를 양성한다. 셋째, 성경공부, 제자훈련, 선교훈련을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봉사하며 파라과이 및 세계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선교 역군을 양성한다.

학교를 세우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또한 컸다. 남미교회를 사임하고 '페르난도 드 라 모라(Fernando de la Mora)시의 요지에 2ha(6천평)나 되는 선교지를 구입한 것이나 지금의 학교 3층 건물(연면적 약 1천1백평)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골조공사를 마치자마자 1997년 말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건축비를 충당하지 못해 1년간 공사를 중단했었지만 그 후에 매달 몇 교회에서 보내주는 선교후원금으로 조금씩 지어 나가면서 기공을 한지 만 6년 만에 학교 건물을 완공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건축비가 필요할 때마다 여러 교회에서 조금씩 도와주셨고 특히 신대원 76기 동기생들이 시무하는 몇 교회에서 특별 건축헌금으로 도와주신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계획한 약 40개 교실 중에서 6개의 교실을 채 완공하기도 전에 학교를 개교했다. 처음에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문을 열었고 다음해부터는 한 학년씩 단계를 밟으며 올라갔는데 2008년에 처음으로 남미기독교학교 고등학생 졸업식을 가질 수 있었다.

처음에 우리 선교지 주변의 영적인 환경은 안 좋았다. 악령의 역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구입한 땅은 아순시온의 어느 재벌이 소유했던 별장이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도 많고 아주 아름다웠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유령의 별장이라고 불려졌다. 밤에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또 어떤 사람은 유령도 보았다고 했다. 이 선교지 주변에 몇 개의 작은 공원들이 있는데 조명시설이 거의 없어서 밤에는 마약을 밀매하는 장소로 변했다. 그래서 밤이면 마약 중독자들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이 거리에 어슬렁거려서 성도들이 차로 태워다 주지 않으면 무서워서 교회에 못나온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지에 오자마자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악령의 세력을 묶는 중보기도부터 먼저 했다. 그리고 매일마다 선교지에서 어둠이 세력이 물러가도록 선포했다.

우리가 학교를 세운지 10년이 지난 지금 주변 환경이 엄청나게 달라졌다. 학교를 세우기 전에는 그 주변에 쓰레기 더미들이 곳곳에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 선교지 앞길이 돌길에서 아스팔트로 바뀌면서 깨끗해졌다. 주변 공원은 전부 조명등이 환하게 켜졌고 밝은 공원, 건전한 공원으로 변화되었다. 거리를 해매던 마약 중독자들도 사라졌다. 영적인 분위기도 밝아졌다. 지금은 우리학교가 시에서 꽤 유명한 학교가 되었다. 지난달에는 '페르난도 드 라 모라 시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시의 발전상을 홍보하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교육 부문에서는 남미기독교학교가 선정되어 홍보영화에 소개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을 해 나가면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해 주시고 그 분이 목적하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  







 한가지 사명을 위해 이 땅에 온 사람들

[ 땅끝에서온편지 ] <8> 장로교회와 본교단 선교부의 역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1월 21일(목) 10:33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파라과이 장로교 선교 역사는 약 40년이 되는데 다음의 세가지 경로를 통해 시작되어다. 첫 번째는 브라질 장로교를 통해서이고, 두 번째는 파라과이에 세워진 한인 교회를 통해서, 세 번째는 한국장로교회를 통해서이다.

  
▲ 파라과이 복음화를 위해 땀흘리는 동역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선교사협의회 수련회에서.
파라과이 현지인 장로교 시작은 1969년 브라질 장로교회가 파라과이 '콘셉시온'(Concepcionㆍ구수도)에 '에반드로 루이스 다 실바'(Evandro Luis Da Silva)선교사를 파송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이 후에 여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파라과이 장로교라는 교단을 만들었으나 선교 열정의 부족과 지도력과 자금력의 한계로 교세가 자라지 못하고 지금까지 8개 교회를 넘지 못하는 작은 교단으로 머물러있다. 두 번째 파라과이 장로교 선교역사는 파라과이에 세워진 한인교회를 통해서 쓰여졌다. 파라과이 최초의 한인 장로교회는 1965년에 세워진 연합교회이다. 그 후에 아순시온교회, 남미교회, 필라델피아교회(현재는 사랑의교회로 개칭), 평안교회 등이 세워지게 되었고 이 교회들이 성장함에 따라 현지인 선교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교회의 현지인 선교 시작은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선교의 여력을 갖춘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볼 수 있다. 세번째 장로교 역사는 한국과 미국 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서 쓰여졌는데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의 장로교회 여러 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파라과이 장로교 선교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인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고 볼 수 있다. 초창기에는 한인 교회들 모두 선교에 대한 사명으로 충만해서 여러 개의 현지인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신학교까지 세웠다. 그리고 파라과이 선교사들 중 상당 수는 한인교회에서 양육되어진 분들인데 이들이 선교 사명을 가지고 한국이나 미국에 가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한인교회가 파라과이 장로교 선교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파라과이 한인들의 감소로 인한 한인교회들의 마이너스 성장과 성도들의 신앙의 깊이와 선교 헌신도의 결여로 인해서 담임 목사와 잦은 갈등을 빚었고, 더불어 담임 목사의 잦은 교체로 인해 선교가 일관성 있게 진행되지 못하면서 한인교회들은 선교의 활력을 잃어버리는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파라과이에 한인 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현지인 선교에 대한 중대한 사명을 갖고 있었지만, 효과적인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과 미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파라과이 장로교 선교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

현재 파라과이에는 브라질 장로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세운 파라과이 장로교회와 합동, 고신, 미주 합동 등 세 교단이 연합해 세운 파라과이 개혁장로교회 등 두 개의 교단이 있다. 나머지는 개별적으로 사역하거나 한국에서 파송된 교단별로 선교회를 조직해 운영하고 있는데 본교단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1996년에 김성광, 임성익, 이성우, 이현종 선교사 4가정이 모여서 파라과이통합선교부를 조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파송 순서별로 김성광, 임성익, 이성우, 신현광, 강승우, 우기진 선교사 등 6가정이 있는데 최근에 파송되어 오신 두분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 개척과 학원선교를 하고 있으며 특히 본교단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모두 명문학교로 성장하고 있다.

파라과이통합선교부는 선교사들의 모든 재산을 선교부 법인체에 귀속시켜 선교사가 떠나더라도 마음대로 팔지 못하도록 하고 있으며 후임자들이 이어받아서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회장은 2년마다 파송 순서로 돌아가며 맡도록 되어있다. 이와 같은 체제는 다른 교단에서는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독노회가 조직되어 있는 개혁장로교회 선교사들도 재산은 교회에 귀속시키지 않고 각자 개인이 법인체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재산을 팔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우리의 체제를 부러워하고 필요를 느끼면서도 개인의 입장들이 다 달라 우리처럼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본교단 선교사들은 그런 면에서도 다른 선교사들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고민이 있는데 그것은 파라과이통합선교부에 소속되어 있는, 10여 개의 교회가 이미 기존에 설립된 교단과 연합해서 하나로 만들던지 아니면 독립해서 독노회를 조직하던지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작은 독노회를 따로 세우기보다 기존의 교단에 들어가 같이 연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5년 전에는 브라질 장로교회에서 세운 파라과이장로교와 연합 문제를 논의했지만 입장차이가 있어서 더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장로교신학교가 하나로 연합해서 만들어졌다. 이를 토대로 파라과이 장로교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의 교단을 만들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장로교 신학교 연합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9>자기를 비우는 '연합사역'

[ 땅끝에서온편지 ] 파라과이 장로교신학교...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1월 28일(목) 10:49
선교 사역에 있어서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되지 않은 성도를 통해 교회가 확장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사들마다 교회 개척과 더불어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할 때, 문화와 언어의 장벽에 부딪치게 된다.

  
▲ 교단의 벽을 허물고 연합사역의 본보기가 되어 운영되고 있는 파라과이 장로교신학교 17회 졸업식 모습.

그런데 어떤 선교사들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성도들을 직접 훈련시켜 어느 정도 리더로 양육되었다고 판단되면 그를 필요에 따라 새로 개척한 교회의 사역을 맡기기도 한다. 실제로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는 훈련을 받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목사'대접을 받으며 교회 사역을 한다. 그러나 선교사 자신의 제자 훈련만으로는 성숙하고 책임있는 사역자로 양성할 수 없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이 세운 교회리더를 다른 교단이나 다른 선교사가 운영하는 신학교로 보내 지도자로 양성한다. 그런데 다른 교단의 신학교에 보낼 경우 자기와의 동역 관계가 약화될 염려가 있다. 그래서 어떤 선교사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자신이 직접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교회개척 사역과 함께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에 따른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파라과이의 선교환경에서는 타교단과의 동역이 쉽지 않다. 또한 파라과이처럼 장로교회가 그리 많지 않은 나라에서 장로교단의 신학교를 세우는 것도 쉽지 않다. 교회가 적어 신학교로 보낼 학생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파라과이에 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신학교가 세 곳이 있는데 그 중 두 곳은 초교파 신학교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이 운영하기 때문에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 곳은 교단의 색채를 가진 신학교인데 이 신학교가 파라과이 장로교신학교이다. 이 학교는 지금 파라과이에 파송돼 있는 7개 교단의 선교사들이 연합해서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처음 이 신학교는 1985년 남미한인교회(박태종 목사)에서 시작되었다, 1986년 아순시온교회(김재창목사)와 연합으로 운영하다가 1987년 남미한인교회가 운영에서 손을 뗀 후, 1991년 신학교 명칭을 파라과이 개혁장로교신학교로 바꾸고 아순시온교회와 합동, 고신, 미주합동 등 세 교단의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20년간 운영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2006년 여러가지 상황과 필요에 의해 7개 장로교단 선교사들은 하나의 장로교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파라과이 장로교신학교로 개명했다.

본 교단의 파라과이 장로교통합선교부에서는 장로교신학교를 연합으로 운영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브라질장로교회와 연합해 2006년 8월에 독자적인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준비해오고 있었는데 개혁장로교신학교측에서 통합선교부에 같이 신학교를 운영할 것을 제의해왔다. 이에 본교단 선교사들은 기도하면서 파라과이 장로교의 발전을 위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하고, 추진해오던 신학교 설립 계획을 백지화해 신학교 운영에 같이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본교단의 참여를 계기로 파라과이에 있는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에게도 동참의 문을 열어 같은해 4월 18일에 하나의 파라과이 장로교신학교가 세워졌다.

다른 교단보다 출발이 늦었던 파라과이 장로교는 소수 교단으로서 선교사들의 연합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점에서 하나의 신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것은 파라과이 장로교 발전을 위해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교단간의 신학의 차이로 인한 갈등, 교단 이기주의, 연합 사역으로 인한 주인의식의 결여 등으로 인해 연합 사역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일어나는 것을 숨길 수 없다. 지금까지 이 신학교는 학생들의 수업료와(학생들의 수업료도 대부분 선교사들이 지원해 준다. 그래야 이들이 신학교에 다닐 수 있다) 선교사 이사들의 일반 회비(1인당 1백달러)와 특별회비 그리고 현지 한인교회 및 현지인 교회의 특별 헌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신학교 이사장의 책무를 감당하고 있는데,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신학교를 운영하기가 매우 어려워 한국교회의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실정이다.

그리고 현지 선교사들조차도 사역을 감당하기도 벅차하기에 신학교라는 연합 사역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결국 연합사역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선교사들만 남게 될지 모른다. 신학교 연합의 성패는 성육신되어 오신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지 않고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이 땅에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 파라과이 장로교신학교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귀중한 시험장이 될 것이다. 





 (10)'건강하고 성숙한 남미 선교를 바라며'

[ 땅끝에서온편지 ] 남미선교에 대한 반성과 제안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2월 04일(목) 10:06
파라과이 임성익선교사 

  
▲ 지난해 5월 남미 이과수에서 열렸던 본교단 남미선교사대회 및 선교전략회의 참가자들.


본교단의 남미선교 역사는 30년에 이른다. 지금 우리는 남미 선교가 어느 단계에 와 있으며 어떤 사역의 자세로 임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교회개척 사역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특별한 분야로 파송받지 않은 선교사들은 우선적인 사역으로 교회개척을 한다. 그런데 교회개척의 방법과 전략은 지역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 남미에는 전도와 교회성장 못지않게 교회 건강과 성숙의 문제에 대해 우선적인 무게를 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남미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지만 건강하고 성숙함에 있어서 다양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미에는 교단 소속 교회도 있지만 교단이 없는 독립교회들이 마구잡이로 세워지고 있다. 그리고 새로 세워지는 교회 중에는 신학교육도 받지 못하고 잘 준비되지 않은 평신도에 의해 세워지는 교회도 많다. 종교 혼합주의로 인한 무속화된 신앙 형태의 영향, 도덕과 윤리의 부재, 수많은 가정들이 파괴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이 신앙의 걸림돌이 되며 술, 마약, 순간의 쾌락(성적인 범죄), 무당 등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그 외에 고난의 영성을 경험해보지 못한 점, 가톨릭에서 영향 받은 성상숭배 사상, 헌금하지 않는 습관, 주인의식의 결여 등 교회의 성숙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많다. 물론 이들의 문제들은 한국교회의 문제가 될 수 있고 어느 선교지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특히 남미에 있는 교회의 경우 이러한 것들이 매우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교회가 건강하고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가 사라진다.

그러면 한국선교사가 개척하고 있는 교회는 과연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선교사는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 개척을 시작하지만 그들 중에 많은 선교사가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로 만들어가는데 힘들어 하고 있다. 현지 사역자들과 차별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한국 선교사들은 영성이 뛰어나고 열심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언어를 충분히 구사하지 못한다. 선교사는 교회를 세우는 것 뿐 아니라 다양한 사역들을 병행하는데 남미의 문화와 국민성, 풍습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선교사 중심의 교회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자립을 목표로 하는 지도자 훈련의 부족 등도 문제가 된다. 많은 선교사들이 언어 등 몇 가지 이유로 사역자 양육에 대한 어려움 때문에, 사역에 있어서 더 쉬운 방법을 택하다 보니 부차적인 사역에 치중하게 된다. 본인도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왔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사역하면서 얻은 경험을 통해 건강하고 성숙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몇 가지 과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 제안에 모든 선교사들이 동의를 안 할 수도 있지만 이 기회를 통해 남미의 선교방향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1)교회를 세우기 전에 언어를 충분히 습득해야 한다. 사역을 시작한 후에는 언어 습득이 매우 어렵다. 2)교회 세우는 일에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한국선교사들은 보통 2~3가지 사역을 병행하는데 교회사역에 우선 집중하는 것이 좋다. 3) 현지인과 차별화 된 제자 훈련이 필요하다. 4) 남미에는 가톨릭의 영향으로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이 많은데, 이러한 교인을 확실히 변화시켜야 한다. 5)예배를 잔치와 같은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남미 교회 예배는 콘서트에 온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이런 찬양을 통하여 그들 안에 눌려있는 상처, 분노, 아픔 등을 해소하고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교통과 임재를 느끼며 새 힘을 갖기도 한다.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6)선교 현장에 치유사역이 일어나야 한다. 이 부분도 한국장로교 선교사가 무시하기 쉬운 부분이다. 7)가정회복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8) 선교 현장에 영적 전쟁이 필요하다. 9) 한국 선교사만이 갖고 있는 고난의 영성을 가르쳐야 한다. 남미의 많은 개신 교회들은 개인적으로 작은 어려움들이 상존하지만 교회 전체적으로 큰 핍박 없이 성장해 왔다. 이것이 남미교회가 성숙한 교회로 가는 길을 막는 요소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0) 목회자를 재 훈련시키는 사역이 일어나야 한다. 남미에는 신학교육 안받은 목회자가 너무 많다. 받아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목회자가 많다.

남미의 교회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에도 건강과 성숙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들은 잠재력과 능력은 많이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교회의 건강과 성숙을 책임질 만큼 사역을 잘 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만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잘 개발하고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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