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영국 장순택선교사

최고관리자 0 1,127 2020.10.30 19:43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 선교사1
장순택 목사
2020년 08월 18일(화)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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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들과 함께 한 영국 장순택 선교사(맨 앞)와 부인 하점순 선교사(가운데 열 맨우측).
26년 전, 필자는 성남에 있는 작은 교회를 담임하면서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청년과 주일학교 사역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 부부는 당시 대학에 입학하면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대안이 없을까'하는 고민에 빠졌었다.

기도하는 중에 '영어 열풍'이 떠올랐고, '영어를 매개체로 젊은이들을 모아 예배와 성경공부를 영어로 하면서 함께 선교 비전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영어학원에 등록을 했다. 내가 먼저 영어를 할 수 있어야 했지만 그 당시 나의 영어 수준은 부끄럽지만 초급 정도의 수준이었다.

새벽 예배를 마치고 학원에 가기를 두어 달쯤 했을 때 갑자기 전세로 살고 있던 집에 편지 한장이 날라왔다. 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대출했고 그것을 갚지 못해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는 통보였다. 도움을 얻기 위해 변호사를 찾아가 조언을 들었는데, '법적으로 복잡한 사안들이 얽혀 있어 사태 해결은 쉽지 않고, 그냥 살아도 법적으론 문제가 없다'는 답변이었다.

그러나 막상 집이 돈을 빌려준 채권자에게 경매로 넘어가자 상황은 달라졌다. 주인이 매일 술을 마시고 찾아와 무슨 목사가 이렇냐며 집을 비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 부부의 전 재산이 그 집의 전세보증금이었지만, 이 막무가내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시 성남은 '망해서 왔다가 성공하면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고, 필자가 섬기는 교인들도 그리 넉넉지 못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목사의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목사의 새 거처 마련을 위한 대책회의'라며 모임을 갖는데 필자의 마음은 무척 아팠다. 이 일은 '양을 돌봐야 하는 목사가 교인들의 짐이 됐다'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아내와 상의해 교회에 사임서를 낸 후 좋은 후임자를 찾도록 했다. 여러 교인들이 필자를 말렸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이곳에서 사역을 계속 해나갈 자신이 없었다.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교수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 꿈이 생각났고 공부하기를 좋아하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됐다. 또한 '영어 예배를 인도하려면 언어연수가 필수'라는 생각을 하자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비전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필자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고, 나도 모르게 이 일을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이 후로 모든 일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호주와 캐나다에 있는 친구와 지인들의 소식들을 들을 땐 마음이 그 땅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필자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이런 저런 시도가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 어느 날 새벽 영국에서 전화를 받으며 마치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영국으로 마음을 정하게 됐다.

"장 목사는 돈이 많은가 봐?"라는 동료 목회자들의 아리송한 말을 들으며 나는 빈 주머니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도의 어머니 티나를 만나다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 선교사2

장순택 목사
2020년 08월 25일(화)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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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없는 한국 목회자를 자신의 집에 거주하게 하고 영어와 영국 문화까지 가르쳐 준 티나 여사(맨 좌측)와 장순택 목사의 부인 하점순 선교사를 비롯한 가족들.
영국에서 처음 일년은 영어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시 학원은 전세계에서 모인 젊은 엘리트들로 넘쳤고, 필자는 해외 학생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선교에 관심 있던 많은 영국인을 만나게 됐고, 오전에는 가까운 영국인 교회, 오후에는 한인교회에서 봉사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만난 티나 여사는 런던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스웨덴에서 스톡홀름대학 영문학 교수, 어린이들을 위한 TV영어교실 선생님 등으로 활동하다가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남동생과 개인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영어로 성경을 배우면서 많은 이야기와 기도제목을 나누게 됐다.

티나 여사의 이혼한 남동생 로이는 어렸을 때 받은 상처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로이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마약까지 하는 여성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소리치는 그 여성을 티나 여사는 절대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그래도 계속 그 여성과 사귀던 남동생은 갑자기 이사를 나가겠다고 선포했는데, 그 날짜가 12월 27일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당시 필자가 살던 집의 주인도 사정이 있다며 우리에게 나갈 것을 요청했다. 그때 필자는 호텔에서 파트타임으로 생활비를 벌고 있었고, 아내는 생각지 않은 셋째를 갖게 된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한 집세도 올라서 마땅히 이사할 집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다. 몇 차례 이사 날짜를 미루던 우리는 최종적으로 12월 27일에 이사하겠다고 약속하고, 티나 여사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당시 티나 여사는 우리와 남동생 로이의 이사 날짜가 같은 것을 듣고 많이 놀랐다고 한다. 티나 여사는 우리의 이사 날짜를 듣기 전 어느 날 새벽 '타국에서 온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 너도 나그네였다'는 내용의 레위기 구절을 읽으며 이사갈 곳을 찾던 우리 부부를 떠올린 적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도울 방법이 없어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자'라고 생각하며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이사하겠다고 하고, 심지어 이사 날짜까지 같은 것을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며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이사하게 하셨다.

우리는 전기와 가스비만 내면서 너무 좋은 집에서 살았고, 아내는 한달 동안 티나의 산후조리를 받았다. 또한 그곳에서 함께 살면서 영국 음식 만드는 법과 문화, 영국의 특성 등을 할머니를 통해 배우게 됐는데, 그것은 나중에 영국인 교회를 담임하며 영국인을 이해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됐다. 티나 여사는 우리가 이사한 후에 영어를 잘 하지 못하던 필자에게 가정예배를 영어로 인도하라고 제안하시면서 영어 설교의 기본을 가르쳐 주셨다. 처음엔 한국어로 설교문을 준비한 후 영어로 번역해 사용했는데, 그것은 영어가 아니라고 말씀하면서 그냥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훈련을 3년 동안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 후 티나 할머니는 우리를 위해 매일 기도하시는 기도의 어머니가 됐고 아내는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옮기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 선교사3

장순택 선교사
2020년 09월 01일(화)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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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중 찬양하는 이스트본교회의 영국인과 한인 학생들.
영국 본머스에 와서 3년 동안 주일 오전엔 영국교회, 오후엔 한인교회를 섬기고, 또 매주 화요일엔 영어 찬양모임을 이끌던 중 이스트본한인학생교회 목사라는 분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이 갑자기 한국에 들어가게 됐는데 후임자로 누군가 필자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지인 교회를 섬기고 싶어 영국에 온 것이었기에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목사님의 강한 요청과 티나 할머니의 권유로 3시간 거리인 그 교회에 '주님의 뜻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며 방문하게 됐다.

2시에 시작하는 예배엔 10명 정도의 한국 학생과 10명 정도의 영국인이 참석했다. 이 영국인들은 알콜중독자, 마약중독자나 판매상,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과 노숙인들이었다. 목사님이 이곳에 교회를 개척한 후 부인의 전도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같은 영국인들에게도 외면 받던 그들은 아시아 여성의 친절과 예배 후에 주는 따뜻한 밥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이었다.

설교 시간에 목사님은 한국말로 전하고, 부인이 영국인들 사이에 앉아 통역을 했는데, 설교, 통역, 회중들의 목소리가 섞이면서 집중하기 힘들었고, 필자도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예배 후에 다같이 점심을 먹는데 한국 학생들은 모두 사라졌고, 부인만 영국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사님은 "영어가 안 되니 너무 힘들어서 후임자는 꼭 영어가 되는 분을 찾고있다"고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 부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러나 우리가 올 곳은 아닌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음날 이스트본에서 전화가 왔고 우리는 "못갈 것 같다"고 말했는 데, 그후로 "다시 기도해 보시면 좋겠다"며, 매일 전화가 왔다.

필자의 아내는 "그 교회에서 본 학생들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며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스트본에서의 전화와 아내의 이야기를 깊이 묵상하며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지금 살고 있는 본머스엔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집,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의 부주방장 일자리, 봉사하는 교회들과 동료, 여러 지인들이 있지만 이스트본엔 아무도 없었고, 그 교회로 가는 것은 마치 사막 한 가운데에 버려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마음을 아내와 나누며 기도하다가 '길 잃은 양 같은 그들에게 우리가 가자'고 결심했고, 후임을 구한 목사님은 예정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우리가 이스트본으로 가겠다고 발표했을 때 섬기던 영국교회 목사님은 크게 서운함을 표하셨고, 필자가 일하던 호텔에서도 당황해 했으며, 티나 할머니도 걱정을 많이 했지만, 필자는 왠지 편안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스트본으로 이사하자 한국 학생들이 "목사님이 이사오셔서 너무 좋아요. 그동안 힘들고 어려워도 갈 곳이 없었거든요"라고 말한다. 알고보니 전임 목사님은 런던에 거주하며 주일에만 왔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영국 교인들은 원래 교육 수준이 매우 높고 영어 발음도 세련된 상류층이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형편이 어려워져 지금은 무시당하며 사는 분들이었다. 이들 역시 밤마다 여러 명씩 찾아와 본인의 인생사를 쏟아놓거나 토론하거나 다투었고, 그런 중에 우리 부부의 영어 실력은 놀랍게 향상됐다. 그리고 우리가 온 후에 한국어 예배를 영어예배로 바꾸면서 유럽의 젊은이들과도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됐다.




하나님, 저도 주의 종, 목사입니다.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 선교사4

장순택 선교사
2020년 09월 10일(목)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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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식을 위해 해변에 모여 있는 필자와 이스트본 교회 교인들.



필자가 큰 결심을 하고 들어간 이스트본은 아시아보다 유럽에 더 많이 알려진, 당시 많은 유럽 청년들이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찾는 곳이었다. 이들은 짧게는 한 주, 길게는 3개월로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 중엔 평생 한 번 교회에 안 가본 사람도 많았다.

필자 부부가 영어로 예배를 드리면서 각국의 유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숫자가 계속 늘어 100명 이상이 되자 예배 후에 식사를 준비하는 일이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처음 교회에 나와 "입장료가 얼마냐", "점심 값을 내는 거냐?"고 묻는 순진한 청년들에게 복음 대신 헌금의 의미를 설명할 여유는 없었고, 헌금 바구니는 항상 소액의 동전들로 채워졌다.

영국에 올 때에 영어 공부만으로도 분주했기 때문에 선교사로서의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전 사역지인 본머스에서는 여러 도움으로 일자리와 집이 해결됐지만, 이곳에선 쉽지 않았다.

필자는 용기를 내어 한국에서 가깝게 지냈던 선배 목사님께 전화를 걸었다. "목사님, 제가 영국에서 사역하고 있는데 이번에 한국 들어가면 찾아 뵙겠습니다." 꽤 규모가 큰 교회 목사님이었고, 필자의 부탁을 불편해 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막상 한국 도착해 제일 먼저 전화를 드렸더니 "오지마, 오지 말란 말이야"라며 거절하셨다. 너무 당황스러워 그 교회 장로님께 상황을 물었더니 "장 목사가 오면 차비도 줘야하고…"하시며, 방문하지 않도록 결정하셨단다. 그 말에 너무 마음이 아팠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목에 커다란 혹이 생기면서 조금씩 커져갔다. 필자는 영국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여보, 나 여기서 구걸하는 거지 같다"고 하소연하자, 아내는 "당장 그만두고 오세요"라며 울먹거린다.

영국으로 되돌아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도 주의 종 입니다. 학생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며 식사도 준비하는데, 돈이 없어 이렇게 힘들면 어떡합니까?' 기도하면서 3가지 약속을 하나님께 드렸다. 첫째, 사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 보겠습니다. 둘째, 우리의 후원자가 되어 주십시오. 셋째, 목사의 자존심을 지켜 주십시오(주의 종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해주세요). 이 세가지를 위해 다시 기도했고, 자립 선교를 위해 전문학교에 찾아가 3년 과정으로 벽돌 쌓기 반에 등록해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일을 할 수 없는 비자를 갖고 있던 필자와 아내는 일당을 받는 파출부, 세탁, 청소, 노인 돌봄 일을 시작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교회를 유지했다.

그러는 동안 많은 학생들을 만났다. 어느날 밤 찾아온 한 학생은 "몸이 아파서 왔어요, 엄마 친구가 권사님인데, 그 권사님이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무조건 목사님 댁으로 가라'고 해서 왔어요"하기에 "잘 왔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같이 저녁을 먹고 쉬다가 돌려보냈는데, 그 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 한국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자신이 공산당원이고, 본국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던 중국 학생도 있었는데, 이들은 우리가 자신의 두 번째 부모라고 말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란에서 온 학생은 "교회 밖에서는 아는 척 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교회 다니는 걸 알면 많이 힘들어 진다"고 부탁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온 학생은 "북한 선교에 관심이 많다"며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북한 선교사가 되겠다"고 고백했다. 학생 목회가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들을 통해 다음 세대로 또한 세계 각지로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린다.



"넌, 가짜야"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선교사5

장순택 선교사
2020년 09월 22일(화)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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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에 한자리에 모여 친교의 시간을 갖는 젊은이들.
유학생들을 위해 매 주일 식사제공을 시작했는데 생각지 않은 노숙인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예배 후에 식사가 제공되고 예배에 참석해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자 이들이 흔쾌히 예배에 참석했고 친구들까지 몇 명씩 데려왔다.

문제는 예배시간에 이들이 의자에 누워 코를 골며 자거나, 심한 냄새를 풍기고 술주정을 하는 것이었다. 노숙인들이 많아지면서 우리의 고민도 늘어갔다. 학생들이 이들을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들의 행동 때문에 가끔씩 예배 분위기가 이상해질 때 우리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차에 우리에게 장소를 빌려주신 영국교회 목사님이 필자를 찾아 오셨다.

' 제임스(필자의 영어 이름)! 교회에 문제가 생겼어. 한달 동안 매주 교회 물건들이 없어지고 있는데, 오늘은 교회 전체의 열쇠꾸러미가 없어졌어. 지금 교회 모든 문들의 열쇠를 바꿨고, 이 일로 교인들이 많이 걱정하며, 심지어 장소 사용을 못하게 하자는 의견도 나왔어. 물론 학생들이 그런 일을 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 아마도 일부 노숙인들이 그랬겠지. 그들은 정부 보조금으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데, 어쪄면 그들이 너보다 더 부자일지도 몰라. 만일 계속 노숙인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더 이상 장소 사용을 허락할 수 없을 것 같아. 내 생각은 어때?"

필자는 그 말을 들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노숙인들이 불쌍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우리가 그들을 받아들이기에는 여러가지로 너무 벅차기도 했고 또한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아내와 교회 중직들과 함께 기도하며 의논한 결과 '이제는 그 홈리스들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영국 교회에 약속했다.

주일이 왔을 때 필자는 예배에 집중하고, 혹시나 학생들이 불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필자의 아내가 본당 입구 안내석을 지켰다. 곧 노숙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아내는 그들에게 "미안하지만 교회물건들을 자꾸 훔쳐가는 어떤 사람 때문에 더 이상 너희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가 훔쳐가지 않았다"며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우리는 거절했다. 그들은 "예수는 사랑하고 도와주라고 했는데, 너희는 우리를 쫓아낸다"며, "너희가 진짜 크리스찬이 맞냐?"고 큰소리로 조롱했다. (나중에 그들 중 한사람이 키 뭉치를 돌려주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아무도 아내를 도와주지 않았고, 아내 혼자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버텨냈다고 한다. 그 후로 시내의 노숙인들은 아시아 유학생들을 보면 "어느 나라에서 왔냐? 제임스랑 사라(아내 이름)를 아냐,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다"라며 우리를 흉봤다고 한다.

학생들이 많이 모인다는 소문이 나자 선교에 관심이 있다고 찾아오는 영국인들도 있었다. 처음엔 '학생들이 이들로부터 언어와 문화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받아 들였는데, 이들 중엔 학생들에게 적절치 못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성적인 언행을 일삼기도 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현지인도 받지 않고, 학생 사역에만 집중하게 됐다.왜 한국을 떠나 영국으로 가게 됐을까?

영국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외국인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 선교사6

장순택 선교사
2020년 09월 24일(목)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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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칸타타 후 성가대원들과 함께 한 장순택 선교사(맨 우측).
필자 부부는 영국에 온 이후로 오전에는 항상 영국교회에 출석했다. '빨리 수준 높은 영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영국교회의 시스템을 배우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 침례교회에서 마련한 외국인 예배에 출석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영국교회의 일원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중 교회가 문을 닫으면서 우리 예배모임은 영국개혁교회(URC) 소속 교회로 장소를 옮기게 됐고, 우리 부부는 그 교회 오전 예배에 참석하게 됐다. 생계를 위해 취득한 벽돌 쌓는 자격증을 가지고 주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석면가루를 검사하는 자격증까지 취득해 사회 활동의 폭을 넓혔다. 주일 오전엔 영국인 교회에 참석해 성가대, 꽃꽂이 봉사, 설거지 등 하면서 현지인들과 어울리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의 허전함이 밀려왔다. 우리는 점점 쇠퇴하고 노화돼 가는 영국교회를 바라보며 슬픔을 느꼈다. 당시 담임목사가 공석이던 영국교회 수석 장로를 만나 필자가 교회에 도울 일이 있는지 물었다. 교회를 위해 무언가 돕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장로님은 노회장과의 만남을 주선했고, 노회장은 URC 교단이 외국에서 안수 받은 목사들을 영입하고 있다며 신청해 볼 것을 권했다.

신청으로부터 결정까지 약 6개월이 걸렸는데 총 60명이 지원해 서류전형과 인터뷰를 거쳐 4명이 최종 선발됐다. 하지만 합격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은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노회장 모임에서 노회장들이 서류를 검토해 목회자의 이동이나 결원이 생긴 교회를 연결해 준다. 그러면 해당 교회는 지원자의 서류를 검토하고 먼저 장로들이 면접을 진행한다. 이것을 통과하면 하루 날을 잡아 전교인과 함께 다과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주일엔 예배를 인도하게 해 지원자가 교인들에게 목회 철학 등 자신을 알릴 기회를 제공한다. 그후 교인 투표를 하는데, 이때 찬성표가 80% 이상 나와야 한다. 돌봐야 하는 교회가 2곳 이상이면 각 교회마다 찬성이 80% 이상이어야 한다.

영국교회는 세례교인 150명 정도가 있어야 목사 한 사람을 청빙할 수 있고, 교인이 부족할 경우엔 인원이 충족될 때까지 주변 교회 목회자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래서 보통 목회자는 2~3곳, 많으면 8곳의 교회를 담임하기도 한다.

필자를 초빙한 지역은 한 번에 세 교회를 돌봐야 했는데, 외국인으로선 큰 부담이었다. 나는 '우리를 필요로 하고 주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소서, 각 교회에서 100% 찬성이 있으면 주의 뜻으로 알겠습니다, 만일 사역을 하게 된다면 6개 월 간의 쉼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임시 당회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지금 투표가 끝났는데, 세 교회가 모두 초청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뜸 찬성이 몇 퍼센트였는지 물었고, 모든 교회에서 100%가 나왔다는 답을 들었다. 처음 영국에 와 1년쯤 지나 어느 정도 의사 소통이 될 때 필자는 '나도 영국인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꿈을 꾸었다. 하나님은 그 꿈에 응답해 주셨고, 나는 생계를 위해 다니던 일자리를 모두 그만두고 6개 월 후 이사해, 지금까지 10년 동안 영국인 교회들을 섬기고 있다.

어르신을 치리하는 어려운 결정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선교사7

장순택 선교사
2020년 10월 02일(금)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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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택 선교사가 섬기는 교회의 영국 어르신들.
영국교회에 부임하게 됐을 때 노회장과 영국교회 목사들의 들려준 주의사항은 '처음 일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 교회의 돌아가는 상황만 살피다가 일년 후부터 장로들과 같이 의논하며 교회 일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필자가 사는 집으로 70세 노인인 힐러리 여사가 찾아왔다. 영국은 사택을 방문하려면 미리 약속을 하거나 우편함에 방문을 예고하는 편지를 놓고 가기에 아침 일찍 누르는 벨 소리에 당황했다.

힐러리는 할 말이 있어서 왔다며 집안으로 들어왔고, 아내가 차와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아내는 집에 교인이 오면 보통 자리를 피해주는 데 힐러리 여사는 아내가 같이 들어야 한다며 붙잡았다. 곧이어 듣게 된 이야기는 사랑하는 남성이 생겨 지금의 남편을 떠나려 하는 데 어떻게 생각하냐는 것이었다. 힐러리의 남편 피터는 78세였다. 뜻밖의 말에 놀라 우리 부부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발생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영적인 어머니 티나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기도를 부탁했다.

그런 후 그날 저녁 장로 모임을 소집했다. 당시 필자의 생각엔 장로들이 교인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신입 목사로부터 갑작스런 연락을 받은 5명의 장로님들이 감사하게도 모두 참석해 주었다. 필자는 이 일을 외부로 유출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후 힐러리 여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모두 놀랐고, 힐러리 여사가 전에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혹시 유사한 증상이 재발한 것 같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필자는 우선 상황이 어떻게 진전되는지 살피며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했다.

주일 오전예배에 부부가 같이 참석했고, 예배 후엔 함께 차도 마셨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하려는 차에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월요일에 피터를 심방했는데 그가 우리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주일예배 후 4시쯤 힐러리 여사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통보했고, 저녁에 그 남자와 함께 자신의 짐을 가지고 떠났다고 한다. 피터는 "이 나이에도 돈을 벌겠다고 더 나이 많은 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사이 힐러리가 다른 남자를 만날 줄은 몰랐다"며 통곡했다.

교회가 월요일 오전 진행하는 유아와 엄마를 위한 친교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의 책임을 맡고 있던 힐러리 여사는 아기 엄마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일부 엄마들은 '사랑하는데 어떻냐'며 지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필자는 저녁예배 후 다시 장로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힐러리 여사가 교회 오는 것을 막지는 못하지만 교회의 어떤 직책도 맡길 수 없다. 성경에 제재를 가해야 할 근거는 너무나 많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편에서는 '용서해주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본인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해줄 수 있느냐'는 다른 장로들의 의견이 많았기에 힐러리 여사가 책임을 내려놓도록 통보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장로들이 이 일을 여러 사람을 통해 알아보고 조언도 들었다고 한다. 괜찮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의 의견에 찬성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치에 반감을 가진 교인들이 생겨나게 됐고 필자와 아내를 바라보는 눈빛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차를 마실 때 그 사람들은 우리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물론 걱정 말라며 우리를 위로해 주는 교인들도 있었다. 결국 힐러리 여사는 이혼을 했고, 피터는 딸을 따라 멀리 이사했다.

이 일을 해결하며 장로님들과 관계는 매우 가까워졌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에 따라 결단하는 목사라며 많은 지지와 신뢰를 보냈고, 이후 교회가 하는 일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에 감사드린다.

"동성애에 대한 시각, 성경 배우면 달라진다"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선교사8

장순택 선교사
2020년 10월 15일(목)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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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택 선교사(맨 뒷열 우측에서 네번째)가 섬기는 영국인 교회의 어르신과 학생들. 교인의 가족 또는 가까운 친척 중에도 동성애자가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동성애 문제는 매우 현실적이고 민감한 사안이다.
영국을 비롯해 유럽의 교회들엔 오랜 동안 동성애에 대한 입장차가 있었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 필자가 속한 영국개혁교회(URC)는 동성애자 결혼에 관한 입장을 각 교회의 결정에 맡겼고, 결의 내용을 총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그래서 각 교회는 동성애자의 결혼을 인정하고 교회에서 예식을 갖도록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교인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 문제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첨예한 입장차로 교인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필자는 세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각 교회의 상황과 결론이 다르기에 교회별로 소개해 본다.

먼저, 하남교회(Hanham)는 지난호에 언급했던 힐러리 여사 사건이 있었고, 또 교회 중직자들이 매주 모여 성경공부를 했기에 필자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해 모든 교인들이 반대 표를 행사했다. 교인 가운데 가까운 친척이 동성애자인 경우도 있었으나 감사하게도 성경적 기준에 무게를 두며 "만일 동성애자 결혼 거부로 목사님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 교회는 모든 결혼식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까지 내놓았다. 당시 영국은 동성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됐고, 동성애자라는 이유 때문에 장소 대여나 주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두번째인 올드랜드교회(Oldland)는 하남교회보다 조금 더 시골스러운 분위기로 다수의 교인들이 친족 관계이며, 몇 대째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었다. 교인들은 농담처럼 "이 교회를 다닌 지 40년이 됐지만 아직도 새신자"라고 말하는 곳이었다. 일부 교인은 교회가 동성애 거부를 논의하는 것만을 가지고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4명의 자녀를 둔 이혼녀와 결혼한 한 교인은 동성애자 아들을 두고 있기도 했다. 이 교인은 개인적으로 동성 결혼을 반대했지만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로 모인 첫 회의에서 교인들은 이미 동성애에 대해 허용적이었지만, 필자는 성경이 지적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 직원으로 일하는 한 교인이 "내 딸도 동성애자인데 만일 당신의 자녀가 동성애자여도 반대할 건가요?"라고 항의하며,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수십 년 동안 몰랐던 사실에 모두가 놀라고 있는데, 또 다른 할머니가 "내 딸도 동성애자다. 사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됐지만 나는 결혼식은 반대한다"며, 지지해 주었다.

필자는 생각보다 많은 가정이 동성애 자녀들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겪어왔고, 법이 동성애자를 인정하는 상황이 되니 자연스럽게 동성애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번째 윜교회(Wick)는 교세의 95%가 여성인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태어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온 교인들이 대부분이어서 역시 친밀감이 매우 높은 곳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모든 교인들이 찬성표를 던지며 필자를 강하게 압박했다. 그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세상의 시각이 어떠한가에 더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였다.

당시 세 교회가 취했던 각각 다른 반응을 회고하며 필자는 평소 말씀을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후 필자는 말씀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며, 교인들이 정기적으로 성경공부에 참여하도록 안내했다.


 목회자와 평신도, 말씀을 통해 만나야 한다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 선교사 9

장순택 선교사
2020년 10월 22일(목)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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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택 선교사와 정기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영국교회 교인들.
필자는 세 교회 목회를 한다. 처음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일에 세 교회 예배를 모두 인도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세 교회가 예배시간을 조정해 주면 모두 인도하겠다"고 했더니 "그럼 너무 힘들어서 안 된다"며, 매주 한 교회씩 돌아가며 예배를 인도하라고 권했다. 이것이 보통 영국교회 목회 현장이요, 교회 생활이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목회자 한 사람을 감당하기 힘들어 여러 교회가 함께 목사를 청빙하다 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 목회자가 방문하지 않는 주엔 보통 은퇴목사나 평신도가 대신 예배를 인도한다. 그러다 보니 설교보다는 시나 수필을 읽거나, 심한 경우엔 왜 성경을 믿을 수 없는 지에 대해 설명한 사람도 있었다.

영국에선 보통 한 시간 안에 예배가 끝나는데, 그 한 시간 동안 찬송가 다섯 곡과 주기도문, 구약(보통시편)과 신약 본문 읽기, 중보기도, 광고, 어린이를 위한 짧은 설교, 헌금, 어른을 위한 설교를 마쳐야 한다. 설교는 15~18분을 넘지 않아야 하고, 짧게 끝내면 더 좋아한다. 이런 상황이라 설교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만일 한 시간 안에 예배가 끝나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 '오븐의 음식이 다 되었다'며 가버리는 일도 있었다. 또 설교가 끝나면 찾아와서 다른 이유들을 언급하며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국교회는 주일 낮예배만 있고 저녁예배가 없는 교회가 대부분이고,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구역예배를 갖는 교회는 아주 드물다. 성경공부도 본문, 질문지, 답안지, 영상까지 포함한 재료를 사서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신앙고백이나 성경을 통해 깨닫는 살아있는 말씀보다는 교육자료 집필자 생각을 공감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다. 필자는 교인들이 말씀을 직접 읽고, 체험하는 성경공부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중요성을 강조해도 수십 년 동안 박혀있던 그들의 삶의 틀을 깨고 새롭게 뭔가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남교회에서 필자는 성경공부가 필요하다고 당회에 말하고 일 년 이상을 기다렸으나 계속 미뤄지는 모습을 보고 주일 예배시간에 "이번 주 수요일부터 성경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선포해 버렸다. 처음엔 참석자 수가 일정치 않더니 한 달 후엔 8명의 고정 인원이 참석하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30명 교인 중 8명이 참석하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필자는 성경을 한 장씩 읽으면서 철저히 말씀에 근거해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해 창세기를 시작했는데 창세기 1장 1절 말씀은 3주 동안 모임을 가져도 끝나지 않아 모두 놀라워하기도 했다. 성경공부를 하며 교인들은 많이 변했고, 대부분 "조금 더 일찍 말씀을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필자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올드랜드교회는 주중 유치원 모임과 금요일 기도회가 있는데, 따로 성경공부를 하기 힘들다기에 기도회 시간 중 한 달에 한번씩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성경공부에 재미를 느끼며, 오히려 더 적극적이 됐다.

성경공부가 잘 이뤄지는 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면 마음이 편하다. 대학 교수 출신인 교인들 앞에서 외국인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처음엔 많이 부담됐는데, 이제는 그저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편안하다. 그들은 예배가 끝나면 살포시 손을 잡고 '은혜 받았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공부를 갖지 않는 교회에선 마음이 굳어지고 긴장된다. 말씀을 통한 만남이 없는 것처럼 힘든 일은 없다.

내일의 고통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 땅끝편지 ] 영국 장순택 선교사(완)

장순택 선교사
2020년 10월 29일(목)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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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택(앞열 우측), 하점순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
몇 년 전 총회 선교부가 연결해 준 한 선교단체로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일이 있다. 너무 좋아서 박스를 열었는데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순간 마음이 먹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아내도 와서 보더니 울음을 쏟아냈다. 휴가도 안식년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24년의 세월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본머스에서는 부주방장으로 일하면서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했고, 이스트본에서도 자립선교를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국제교회를 섬겼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세 곳의 현지인 교회를 섬겼기에 휴가도 반납하고 열심히 뛰어야 했다. 외국인이었기에 모든 일이 낯설고 긴장됐다.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온 신경이 집중됐고, 특히 설교시간엔 필자에게 집중하는 교인들의 시선 하나 하나가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저녁예배를 마치고귀가하면 매번 녹초가 돼 있었다.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필자는 젊었고 현지인과 다른 한국적인 열정과 목회철학을 갖고 있었다. 교인 대부분이 노인이었기 때문에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직접 쟁반과 행주를 들고 음식을 대접했으며 식사 후에는 차와 커피를 만들어 주고, 테이블을 닦고, 끝까지 남아서 책상과 의자를 정리했다. 누구보다 일찍 교회에 도착했고, 마지막까지 남아 그들을 배웅했다. 그리고 심방을 정말 많이 했다. 노인들이기에 발음이 부정확하고, 이해하기 힘든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심방 때마다 한 시간씩 들어주면서 그들의 벗이 됐다.

이렇게 사역에만 매달렸는데, 2년 전 아내가 감기를 앓는 것 같더니 아프기 시작했다. 배에 통증이 있어 검사를 했지만 이상이 없다고 했다. 다음엔 혈압이 200을 넘어가더니 왼쪽 팔이 아파왔고, 심장도 검사해 보았지만 이상 소견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증상에 피검사도 수십 번을 했고, MRI촬영도 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계속되는 검사에 아내는 지쳐갔고 증상은 호전되지 않아 한국에서 치료를 받았고 상태가 호전되는 것 같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몇 달 후 다시 아프기 시작했고, 결국엔 입원하게 됐다. 다시 받은 검사에서 나온 병명은 '류마티스다발성증후군'이었다. 이 병은 원인도 모르고 특별한 약도 없어 면역력 조절 효과를 가진 스테로이드 처방을 받으며 상태를 지켜봤다. 그러나 7개월째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극심한 피로감에 누워있기만 했다. 아내는 주일예배도 참석하지 못하게 됐고, 어쩌다 교회에 나가면 교인들이 아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전에는 교인들이 아내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아내가 들어주었는데, 이제는 교인들이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아내도 영국개혁교회가 운영하는 평신도 지도자 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취득해 필자와 함께 영어 예배를 인도하며 사역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 보니 우울증이 생겼고, 공황장애도 찾아 왔다. 나는 2년 동안 병든 아내를 간호하며 집안 일과 요리까지 맡아야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집안일까지 기쁘게 감당했지만 가끔은 회의감과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기도하며 고통받는 교인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경험을 많이 했지만, 막상 아내의 병은 점점 심해졌다. 내게도 우울증이 찾아와 담당의사는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것을 권했다.

아픈 아내를 보면 때로는 화도 나고 신경질이 나기도 한다. 요즘은 코로나19 위험 때문에 아예 집 안에만 머물고 있다. 그런데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부족한 사람을 따라 외국에 와서 이야기 나눌 친구 하나 없이 외롭게 24년을 사역에만 몰두한 아내. 남편의 뒤에서 묵묵히 내조한 아내와 이제야 좀더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옆에 앉아 아내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고, 다리도 주무르면서 힘들었을 아내를 위로하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증상이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까지 도우시고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손길과 앞으로도 있을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을 믿기에 오늘도 또 한 걸음을 떼며 나아간다. 내일도 하나님의 도움이 있을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오늘을 살아낸다.

장순택 목사 / 총회 파송 영국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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