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태국 조준형선교사

최고관리자 0 1,268 2020.06.19 20:36

'태국으로 부르심을 받다'

[ 땅끝에서온편지 ] <1>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5월 14일(목) 10:13

  
▲ 지난 1986년 총회에서 선교사 파송식때 선서하는 필자와 아내.
장신대 신대원에 재학 중인 필자에게 '선교사파송연구회'라는 모임을 통해 선교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필요한 절차들을 거쳐 마침내 1979년 1월에 방글라데시에서 사역하는 고 정성균선교사님 사역을 돕는 단기선교사로 한 달간 파송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방글라데시 선교사로 사역할 것을 생각하고 기도했다. 하지만 정 선교사님 가정이 파키스탄으로 사역지를 옮김으로 인해 필자 역시 기도 제목을 파키스탄으로 바꾸게 되었다.

졸업 후 후원관계가 여의치 않아 미국에서 선교학 공부를 먼저 하고 교육 행정 담당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했다. 2년 남짓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 Min) 과정을 수료했을때, 정 선교사님이 파키스탄에서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것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으시고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오직 주님 나라를 위해. 그후에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외국선교 단체에도 가능성을 타진하는 등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선교사 후보생으로 곧 선교지로 갈 것을 생각해 어느 교회에서도 전임으로 사역 할 수도 없었다.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조언을 구하던 후배들은 각자 선교지에 이미 파송되었는데 필자는 아직도 선교지에 나가지도 못한 채 마냥 지낼 수만은 없어 어느 교회 대학부 지도 목사로 이력서를 냈다. 소개해 주신 목사님도 꽤 자신 있어 했는데 그만 이력서에 중요한 한자 하나를 잘못 기재함으로 담임 목사님께서 보류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대학부를 맡게 되면 적어도 3년은 섬겨야 하는데, 그만큼 선교사로 갈 수 있는 길이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무거운 마음으로 이력서를 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결과는 하나님께서 머지 않아 나를 선교사로 보내시려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큰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서정운 장신대 전 총장님께서 새문안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고 김동익목사님을 만나보라고 전화를 주셨다. 태국에 새문안교회 창립 1백주년 기념 선교사를 보낼 계획이 있는데 필자를 추천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동익목사님과의 첫 만남에서 태국 선교사로서의 비전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씀드리니 김 목사님은 함께 기도하자고 하시며 후속 조치를 취해 주셨다. 아내 이명화선교사와 함께 파키스탄을 위해 기도해왔기에 갑자기 태국으로 선교지를 바꾼다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인지 당황해 하면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꿈을 꾸는데 야자나무가 늘어져있는 바닷가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 장면이었다. 곧이어 그날 저녁 아내도 어느 산에서 오렌지색 옷을 입은 머리를 민 사람들이 내려오고 돼지가 나타나고 사탄과 싸우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놀랍게도 그 산은 치앙마이의 '도이수텝산'과 같고, 오렌지색은 승려 복장이고, 그 산에 아주 유명한 절이 있었다.

이런 꿈이 파키스탄만을 고집하던 우리를 향한 주님을 뜻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렇게 얘기가 오고간지 불과 5일만에 총회 선교부, 새문안교회, 우리 부부를 후원하던 선교회와의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척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태국선교사로서의 부르심 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선교지를 정해놓고 이 길 아니면 안되는 듯 낮이든 밤이든 기도 드릴때마다 보내 달라고 했던 우리의 모습, 어려운 곳에 가겠다는데 왜 주님은 응답이 없으신가에 대해 많이 답답해 했던 우리 부부. 주님은 너무 더디고 마냥 먼 듯 보였던 선교사로서의 길을 그 분의 때에 따라 이렇듯 급속히 이루어주신 것이다.

처음엔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기도해왔던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에 대한 열망과 기도 또한 꼭 그곳에 가야한다고 생각해 왔던 시간들을 당장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의지와 기도대로 선교지에 갔었더라면 아마도 우쭐함도 있었겠고, 선교의 주체에 대한 혼돈과 시행착오가 많았으리라. 그러므로 선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즉 어느 나라, 어느 때, 파송교회, 사역까지라도 주님이 정하시는 선교의 주체가 되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22년간 사용하고 계신다. 선교의 주체이신 주님께서, 아직 이루지 못한 태국 복음화와 주변국을 위해 무익한 종인 우리 가정을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할렐루야!

사역 초기부터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있어 한국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 가정과 태국에서 사역하는 모든 동역자들이 태국의 영혼들을 사랑하며 영적 지도자들을 바로 세울수 있도록 돕는 것과, 태국인들이 자신들이 죄인일 때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복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준형
태국 선교사






'주의 종을 세워나가며'

[ 땅끝에서온편지 ] <2> 선지동산에서의 사역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5월 21일(목) 09:35

  
▲ 맥길버리 신학교 강의실에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여정을 공부한 후 학생들과.

맥길버리 신학교! 미국장로교회가 파송한 다니엘 맥길버리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1백20년의 전통을 지닌 학교이다.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된 주의 종들이 태국 교회를 섬기고 있다. 1974년에 첫 기독교 사립대학인 파얍대학교가 설립되면서 대학교 편재로 들어갔다.

우리 부부는 9개월 간 방콕에서 태국어를 배우고 1988년 6월 신학기에 전도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비록 언어시험을 통과하고 태국어 성경을 공부했다 할지라도 많은 신학용어를 태국어로 가르쳐야 하는 부담감이 컸다. 철학 용어 사전, 신학용어 책자 등을 보고 또한 다른 선배 선교사들과 태국 교수들에게 물어가면서, 혹은 스스로 단어를 새롭게 만들어가면서 태국어 신학 용어들을 익히고 가르칠 내용을 문장으로 잘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학생들에게 한참 설명하고 나서 이해했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시원치 않다. 그래서 영어로 설명하고 한 학생이 간단히 설명한 적도 있다. 문제는 표현이 부족한데다가 한국적인 사고에서 나온 설명을 그대로 태국어로 옮기다보니 문화적으로 다른 상황에서 살아온 학생들이 이해를 잘 못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라는 말을 하면서, '부인'의 태국어인 '빠띠셋'이 아닌 비슷한 발음의 '빠띠틴'(달력)이라고 말하니 학생들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한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강의를 인내하면서 들어준 초창기 제자들이 참으로 기특하기만 하다.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초창기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만나면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면서 웃곤 한다.

첫 해 제자 중에 두앙수다전도사는 우리 교단 전장학금을 2년간 받았으며 지금은 신약학 교수가 되어 같이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다. 신학교는 총회가 목회자를 양성하는 선지동산이다. 그러나 대부분 졸업하면 교회보다는 학교, 병원, 기독교 기관으로 가고 4분의 1정도만이 교회에 남는다. 이러한 상황이 적잖이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과반수정도 되는 여학생들은 졸업 후 목회자가 되는 경우조차 드물다.

그러나 그동안 배출한 주의 종들이 총회 임원으로, 노회장으로, 목회자들로, 기관의 주요 부서에서 섬기는 것을 보면서 신학교육이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는 더없이 중요한 사역임을 깨닫는다. 이에 따라 학생들을 기존 교회 목회자로 양육하는 것과 더불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도록 신학교 안에 '개척교회 관심자 기도모임'을 조직했고, 생활비 지원과 더불어 목회 현장에서의 고민들을 상담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학점이 우수하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신실한 학생 한 명을 선정해 우리 교단이름으로 장학금과 교재비 등을 지원하도록 했다.

한국교회는 교회 건축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신학교육과 일꾼을 양육하는 데는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하지 않는 것 같다. 현재 신학교 사역을 펼쳐나가는 데 있어 더많은 선교인력이 필요하다. 선교사로 지원하는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이 선교학을 공부하지만, 신학교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성서신학과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사람들도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태국의 신학교육과 목회자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런 면에서 맥길버리 신학교(파얍대학)와 장로회신학대학교 간의 협력을 추진 중이며, 또 다른 사역지인 우돈타니 전도훈련원에 신학부(B. Th, 맥길버리 신학교의 분교)를 세우는 것을 진행 중이다. 태국 동부지역에는 정부에서 인가된 신학교가 없어서 교단과 노회 등에서 이 곳에 신학교가 세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라오스를 포함한 주변국의 인재들도 이곳에서 신학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교수 요원 및 시설 확충을 위한 재정적 지원도 절실하다.

신학교육은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는 근간이기에 미래를 좌우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처음부터 주 사역을 신학교를 통해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현재도 목회자와 지도자들을 세우는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은 필자에게 있어 큰 영광이 되고 있다.


조준형
태국 선교사






그리스도의 흔적

[ 땅끝에서온편지 ] < 3 > 교회 지원 사역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6월 02일(화) 18:45

  
▲ 메마른 땅에 지하수가 개발되어 푸른 농장을 만들고 교회도 새로 건축한 씨춤교회 교인들.
선교사는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실천하는 본이 되는 존재이다. 우리 가정이 어느 지역에서 사역하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여러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한 번 설교를 부탁드리겠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치앙마이에서 70km 떨어진, 노회 차원에서 볼 때 소외된 지역에 위치한 쫌통교회를 방문하자 어떤 할머니 한분이 "꼭 와서 도와주세요"라며 눈물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말이 마치 사도행전 16장의 마게도냐 사람의 "와서 도우라"는 부르심의 손짓으로 받아들이고 노회의 허락을 받아 그 지역 교구목사로 시무하면서 퐁싹전도사와 동역을 시작했다. 사실 그곳은 목회자들이 기피하던 지역이었다. 그 곳에는 세 교회(후에 다섯개로 늘어남)가 있었는데 이런저런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즉 헌금은 하지만 교인들이 빌려 쓰고는 갚지 않았고, 교회 부지가 장로 명의로 되어있어 나중에 재산권 분쟁의 가능성이 있었다. 건물이 낡아 제대로 예배드리기도 어려웠고 성경공부와 설교자가 없어 장로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는데 영성이 없었다. 또 지역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어린이 학교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가족들은 주말이면 전도사님들과 함께 장년과 청년 성경공부, 기도회, 주일 예배를 시작했다.

또한 쫌통군 일대를 순회하면서 전도와 교회 개척을 병행했다. 2~3년 간 꾸준히 사역을 하자 교회들이 변화되었다. 씨춤교회는 장로들이 나서서 자녀들과 교인들에게 주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외국 선교부가 땅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양도하자 자립을 위해 받은 땅의 십일조와 농산물의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후 식수 펌프 하나로 서른 가정이 간신히 의존해 생활했던 그 교회는 외부의 도움을 받아 지하수 시설을 만들어 식수와 농업 용수로 사용하게 되어 초록색 과실을 수확하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다른 한 교회는 지금까지 빌려간 헌금을 갚도록 하기 위해 교회 건축시 교인들이 와서 일하고 일당 중 반은 빚을 갚는 것으로 정해 결국 모두가 빚을 청산하게 되었고, 교회 부지에 대한 재산권은 총회 유지재단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교회들이 생명력을 갖고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주님께서는 영육간에 많은 복을 내리셨다. 쫌통교회는 한 장로님의 10년 간의 헌신으로 많은 복음의 결실을 거두게 되었고, 해당 지역으로부터도 인정받게 되었다.

태국에서 제일 높은 산인 인타논산 정상을 지나 전도하러 갈 때였다. 한 차에 일곱 명이 타고, TV와 영사기 등의 짐을 가득 실은 상태에서 꼬불꼬불한 99고개를 내려 가다가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아무런 느낌 없이 푹 들어가면서 차가 서지 않는 것이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것이다. 내리막길 커브였다면 모두 수 십길 낭떠러지로 굴렀을텐데 주님의 은혜로 마침 오르막길이어서 차가 간신히 설 수 있었다. 내려보니 바퀴에서 연기가 나고 기름이 새어나오고, 휠이 너무 뜨거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는 정규노선 차를 타고 기술자를 불러 수리한 후 전도사역을 감당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내리막 길을 갈 때마다 뒤에서는 "아짠 조(조 목사님), 브레이크를 밟지 말고 낮은 기어를 쓰세요"라고 명령아닌 명령을 한다. 그 후에 동승했던 일곱 명은 '역전의 용사'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필자는 가끔 이 길을 다니면서 그 당시를 회상하고 기어를 사용하면서 다닌다.

주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셨다면…, 선교는 주님의 인도와 역사하심 없이는 할 수 없음을 안다. 이 교회들을 돌아보면서 우리 네 식구는 교인 가정이나 교회 바닥, 툇마루에서 자면서 추위에 떨기도 했고 도마뱀 보다 10배쯤 크고 끔찍하게 생긴 '뚝께'라는 파충류가 천정에서 '뚝께 뚝께'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을 들으며 몸서리치기도 했다. 모기는 말할 것도 없고 20년이 넘은 지금도 진물이 나올 만큼 지독한 벌레에 물리는 경험을 하면서 사도 바울이 간증한 '그리스도의 흔적'(갈 6:17)을 기억하고 우리의 모든 상처들이 그리스도의 흔적임을 상고하며 감사함으로 사역하고 있다.

새로운 선교사가 올 때 필자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기 보다는 먼저 기존 교회에서 사역을 경험하고 새로운 사역을 모색하도록 권고한다. 부디 세계 각처에서 사역하고 있는 모든 선교사들에게 생명의 위험과 각가지 질병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복음의 진보가 있기를 소망한다.


조준형
태국 선교사







태국인의 삶 속으로 파고들다

[ 땅끝에서온편지 ] < 4 > 람푼 한태 선교관 사역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6월 11일(목) 11:25
  
▲ 1998년 5월에 헌당된 '한태선교관' 앞에선 필자.

태국 조준형선교사


쫌통지역 교회지원 사역을 하면서 도시에 교회개척을 어떤 형태로 할 것인가로 고민하던 중에 동역자인 퐁싹목사와 대화를 하면서 절에서는 주말이면 노인들이나 거처가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불공을 드리게 한다며, 교회에서도 노인들이 토요일에 와서 자고 주일에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사역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면 절, 태국인, 태국사회가 무슨 연관이 있기에 상부상조하는 것인가? 태국인에게 절이란 이런 곳이다.승려가 있는 곳, 거주지 지역의 승려가 되는 사람들이 모인 곳, 질서가 있고 깨끗한 곳, 주민들이 가서 쉬는 곳, 학교와 병원 같은 곳, 분쟁이 있을 때 찾아가는 재판소, 예술을 장려하고 지금은 박물관의 역할도 하는 곳, 불교의 전당으로서의 종교적인 역할과 주민들의 절기 축제의 중심지로, 또한 동네의 잔치가 있으면 절에서 필요한 기구들을 빌려 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절은 태국인의 삶의 자리이며 정신적 영적 지주이다.

태국인이 교회를 볼 때 현재의 태국교회의 모습(주일예배 중심)이 아닌 절의 개념을 가진 눈으로 교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즉 개념적인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닌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하는 현실성에 더 관심이 있다. 이런 면에서 교회가 단지 주일예배 중심의 장이 된다면 태국인들에게 무시와 무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나는 '태국문화에 맞는 절의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치 구약의 성전의 역할을 하는 교회라기 보다는 회당의 역할을 하면서 태국인들의 삶과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첫 사역기간을 마치고, 언제 어느 도시에서 이런 사역을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치앙마이시는 기독교 문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다. 신학교, 병원, 기독교 학교, 큰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피해 복음이 필요하고 기독교의 혜택이 없는 도시인 람푼(치앙마이에서 30킬로 남쪽으로 쌍둥이 도시로 발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곳엔 1백16년 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던 당시 마련된 2천평 부지가 있다. 제2차 대전 당시에 교회가 핍박을 받아 교인들이 흩어져 교회는 사라지게 되었고 그 후 이곳은 외인들이 들어와 우상단지들을 세우고 식당겸 술집 가라오케가 있는 곳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하루는 그 곳을 지나가는 중에 동행한 참난목사를 통해, "선교사들이 선교하던 곳인데 지금은 이렇게 버려져 있습니다"라는 내용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듣는 순간 부끄러움과 함께 하나님께 대한 죄송함과 안타까움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눈물이 나는 것을 경험했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빛나던 곳이 이렇게 황무하게 되다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내어주어 이렇게 버려져 있다니' 이곳을 지나는 자들이 바라보면서 고개를 흔들고 조롱했을 생각을 하면서 '수년내에 회복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회복을 원하셨던 주님이 그 마음을 부족한 종에게 주셨으리라 확신한다.

일련의 짧지않은 과정을 거쳐서 건축하려하자 그 땅에 이미 오랫동안 거주하던 주민(13가정)들이 어떻게든 땅을 교회로부터 빼앗아 보려고 단합했다. 그러나 그들이 법원에 문의하여보니 1백년 전의 판결에 '이 땅은 복음 전파와 진료를 위하여'라는 헌납자의 유언을 존중한다는 법원 판결이 있어 법적으로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고 나중에 한 공무원이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 땅에서 나가지 말고 돈이라도 받아보자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주동자인 경찰 간부가 갑자기 죽었고, 끝까지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던 식당주인과 연관된 국회의원이 선거에서 낙선하는 일이 있게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애태우던 일들이 다 마무리 되어 그곳에 한태선교관이 새문안교회의 지원으로 아름답게 태어났다.

이곳에서는 네 가지의 사역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교회 개척 사역, 교회 지도자 양성 사역, 사회봉사 사역, 해외선교 사역 등이다. 숙박시설을 갖춰 다양한 수련회와 봉사 사역이 이뤄지고 있다. 교회가 주민들을 찾아가고 주민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항상 개방되어 있다.
1998년에 5월15일에 헌당하면서 8백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오늘 이 시간 하늘나라에서는 과거 미국의 선교사들과 고 김동익목사님이(건축 중에 천국으로 가심) 이 예배를 함께 보시면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고 계실 것 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센터가 들어서기까지 눈물과 아픔이 많아 보따리를 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들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시면서 오히려 그것이 은혜를 체험하는 좋은 시간들이었음을 깨닫게 하셨고, 이곳의 주인도 선교사가 아닌 바로 주님이심을 철저하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는 이곳을 떠난지도 5년이 된다. 열정있는 좋은 후배 선교사(김장원, 박철범선교사)들이 잘 감당하고 있고 창립된지 올해로 11년이 되었는데 많은 기적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다. 무당이 예수 믿고 귀신들이 쫓겨나가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 성도가 2백여 명에 이른다. 현 태국 목회자가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한국보다 60년 먼저 복음을 접하다

[ 땅끝에서온편지 ] <5> 태국의 기독교와 미래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6월 17일(수) 09:14

태국 조준형선교사 

태국은 오랫동안 불교가 국교의 역할을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불교가 태국인의 뼛속까지 깊게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 복음이 태국에 들어오게 된 원인은 정치적인 요소 때문이다.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동남아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영국과 불란서가 인도차이나 지역을 양분하고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태국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불란서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점령하였고, 서쪽의 미얀마, 남부의 말레지아와 싱가포르는 영국의 손에 들어갔다. 남은 것을 태국으로 양대국이 삼킬 태세로 달려들자 태국은 미국을 그 중심에 끌어드렸다. 미국에 대하여 선교사를 받아들이고 복음 전파의 자유를 주면서 양대국의 영향력을 막아줄 것을 기대한 것이다. 이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이리하여 개신교가 태국에 들어 온 것은 1828년으로 한국 보다 60년 빨리 복음을 접하였다.

  
▲ 쓰나미가 지나간 지역 근처의 교회인 방무앙교회 헌당식 모습.
1837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방콕에 교회(마이뜨리침례교회/중국인 대상)가 세워졌고 복음이 들어온 때를 기점으로 태국인이 세례를 받은 것은 30년이 지나서였다. 개신교 선교사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왔고 북태국에서 복음의 꽃을 피웠다. 당시에 치앙마이제일교회(다니엘 멕길버리 선교사 개척)의 교인 두 명이 치앙마이 분봉왕에 의하여 순교를 당하였다. 두 사람의 출신 동네(메부카)에 기념하여 교회가 세워졌다. 그런데 아주 은혜로운 사실은 그 분봉왕의 후손 중 한 명과 순교자의 후손 중 한 명이 결혼하였고 그 자녀가 현재 신실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다.

현재 기독교 인구의 3분의2가 북쪽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발표에 의한 종교 현황은 변함이 없이 불교 95%, 회교 4%, 기독교 0.5%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성장하고 합하여 1%가 넘게 보기도 한다. (1백만 명). 교회는 2천여 개이다.

태국개신교연합회(CCT)에서는 2010년까지 모든 면(面)단위에 예배모임을 세우고 모든 동네가 복음의 소식을 듣게하는 것이 목표이다. 필자가 속하여 일하는 태국교단에서 필자를 개척교회 담당자로 일을 맡겼는데, 모든 도청 소재지에 교단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현재 17개 도에 교단교회가 없음) 연 두 곳에 개척교회를 하려고 기도 중이다.

선교사의 사명은 현지인들을 세워주고 자신들의 전도사역을 통하여 민족 복음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태국 교회는 성장하고 성령님의 인도로 뜨거워지고 있다. 그 원인은 성도들이 잘 해서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복음 증거할 수 있는 기회와 도전을 늘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로 쓰나미의 재앙을 통하여 회교가 강한 지역인 남부에 복음전파의 좋은 기회를 만드시고, 우리 교단 홍경환선교사를 중심으로 3년 전부터 사회봉사사역을 시작하게 하셨다. 방콕에는 최승근선교사 가정, 북부에 김장원선교사 가정 등을 중심으로하여 17개의 선교사 가정이 전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필자는 청년ㆍ대학생 등 젊은층을 전도 복음화의 제자로 세우기 위한 사역을 3년째 하고 있는데 이들을 위한 전문인 선교사가 필요가 절실함을 깨닫고 이를 위해 기도중이다. 또다른 분야는 특수선교로서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사역이 태국에는 거의 없다. 태국은 복음 증거의 문이 환히 열려 있다. 이를 빌미로 한국의 이단들이 들어와 선동하고 성도들을 갈라내고 있으며, 기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영적으로 혼란하게 하는 무리들도 들어와 연약한 교회를 분쟁의 갈등 속으로 더욱 몰아넣는가 하면, 이단이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유혹하는 경우가 있다. 종합적으로 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한국교회가 협력하고 섬길 수 있는 부분은 복음화를 위하여 많은 추수할 일꾼들을 세우는 것이고 주변국 복음화의 기초를 놓아가는 것이다. 이 사역들을 위한 전문적인 선교사가 더 필요하다.





동남아의 문(門) '태국'

[ 땅끝에서온편지 ] < 6 > 주변국에 대한 선교방향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6월 24일(수) 15:05

태국 조준형선교사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태국의 비중은 아주 크다. 그 이유로는 우선 지정학적 의미가 있다. 태국의 지형적인 모양은 코끼리의 머리와 긴 코 모양이다.  태국은 4개국과 국경을 하고 있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에 있다. 전 세계의 비행기 노선이 거의 다 들어와 있으며 태국에서 주변국으로 가기가 편리하다. 또한 치앙마이에서 중국 곤명까지 가는 노선 주변국으로 가는 노선도 열려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는 태국이 동남아 나라로 들어가는 문(門)의 역할을 한다. 태국의 국경 도시들을 통해 물자 교환이 빈번하며 메콩강을 중심으로 중국과 무역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화의 추세로 도로, 교통, 통신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이 된다. 즉 인도차이나를 꿰뚫는 도로망이 동서남북으로 이어진다. 몇 년 후에는 사다리 같은 도로망이 열려 중국을 거쳐 실크로드로 연결될 전망이다.

  
▲ 멕길버리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베트남에서 온 신대원 학생들과 필자.
두번째 정치적 의미가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제 3세계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에 맞물려 미국과 서방의 영향권에 벗어나려고 공산 세력 주변에서 지난 40년간 민주주의의 대변적인 역할을 했으며, 주변국이 공산화될 때 유일하게 반공국가로 남아 공산세력의 남침을 막아주고 서방은 태국을 발판으로 주변의 공산세력들과 싸워야만 했다. 이로 인하여 태국의 국경은 항상 전쟁의 위험과 주변국에서 탈출한 소수 부족들과 공산 세력에 등을 돌린 난민들로 북적거렸다. 현재는 많은 안정을 찾고 있으나 아직 버마의 국경지대에는 카렌 난민 수십만 명이 난민촌에 정착하고 있다. 또한 UN의 여러 기구가 방콕에 있어 국제적인 나라이다.

셋째로 경제적 의미가 있다. 태국은 아세안의 중심국으로 한국을 쫓아오는 경제적 모델로서 경제력을 과시하고 있다. 안정된 바트화는 주변의 약한 국가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덧붙인다면 어느 나라보다 IT면에서도 앞서 있다.

넷째로 기독교적인 면에서 WCC, CCA(본부가 홍콩에서 치앙마이로 이전) 주변국의 창구로 태국교회(CCT)를 이용하고 있다. 주변국의 교회들도 태국교회를 하나의 모델로 삼고 있다. 라오스를 예로 들면, 우리 교단 이름으로 1996년부터 10년 간 CCT와 합하여 라오스교단을 지원하였다. 공산당 문화부(종교부도 관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문화관광 진흥이라는 명목으로 태국에 초청하여 교회가 하는 사역 즉 학교, 병원, 사회봉사 등을 견학하여 기독교가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는가를 보여주었다. 한 번은 간부 한 사람이 은연중에 나에게 "가는 곳 마다 십자가가 있는데 무슨 뜻이냐?"고 물어 간단히 복음을 전하였더니 "잘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들이 돌아갈 때는 모두 합장하며서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길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이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면 교회 개축, 전도, 봉사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계로 4년 전에는 라오스 교단이 정부에 청원하여 위앙쨘 시내 교회 세 곳에서 외국인에게 설교하도록 허락했는데 CCT 총무, 쏨칫목사 그리고 필자였다. 라오스에서는 선교사가 자신을 선교사라고 밝힐 수 없지만 나는 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이기에 고위 관리에게도 그렇게 소개하였고 교회 한 곳에서 설교하였다.(태국과 라오스는 언어가 같음) 태국교회는 주변국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발전을 돕고 있다.

반대로 태국 교회가 주변국 교회들로부터 배우는 면도 있다. 예로 신학생들과 함께 베트남과 라오스 선교훈련을 다녀오면서 태국의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목회하는가를 알게 되고 핍박 속에서도 성장하고 열심을 가진 두 나라의 교회를 보면서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치앙마이에서 차로 라오스 국경을 가고 배타고 메콩강을 건너 라오스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베트남의 다낭까지 다녀오는 선교훈련은 감동적이고 선교의 장을 새롭게 여는 계기가 되었다. 라오스는 평지이기에 길이 완성되었고 베트남은 산을 깍아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이제는 협력하고 개방하여 문호를 열면서 복음은 길을 따라 넓게 퍼져나갈 것이다.

아직도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순 없고 베트남은 소수부족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막아 놓았지만 주님은 방송을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시고 자체적으로 결신자들이 생기고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라오스 역시 1990년 초반 개방할 땐 1만명인 교인이 10년 지나 10만명으로 성장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라고 1차 선교 여행을 마친 바울의 보고처럼 믿음의 문을 여신 주님의 역사를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본다. 핍박 속에 교회가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키웠고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려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 땅끝에서온편지 ] < 7 > 새로운 사역지 '우돈타니'로 부르신 하나님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01일(수) 15:18

태국 조준형선교사

태국선교 사역을 17년 감당하면서 새롭게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생각해 보았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역을 하는가? 지금까지의 경험을 가지고 도전적으로 사역을 감당하는가? 개척자의 심정을 가진 선교사인가? 아니면 기득권을 가진 안일함에 빠진 선교사인가? 등을 생각하면서 몇 달간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루었기에 그것을 누리려는 것이 아닌 처음 올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신뢰와 사랑으로 후원해 주신 새문안교회, 그 새문안교회 1백주년 기념 선교사라는 자부심! 이런 명예를 떠나 주님만을 의지하는 선교사로 새로 서야함을 알게 되었다. 새문안교회 담임목사이신 이수영목사와 당회원들께서 의아해 하시면서도 나의 뜻을 이해해 주시면서 사임을 허락해 주셨다.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의 마음에는 '새문안'이 존재하고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고 중보기도의 우선권에 있다.

사임한 상황을 알게된 태국교단 임원들께서 직접 치앙마이까지 찾아와 나의 계획과 미래 사역에 대하여 묻고, 혹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하셨는지 돌아가지 말고 전도 개척교회 사역을 새로 시작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후원 없이 홀로 새로 시작하려는 선교사를 무시하지 않고 격려하면서 오히려 힘을 북돋아 준 현지 태국교단 지도자와 교회를 쉽게 잊지 못하리라.

늘 '지체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한 개척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분들은 나에게 개척교회 사역을 맡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후 전도부 안에 개척부를 신설하였다. 우돈타니 지역 노회에서 2년 전부터 사역 요청을 해왔는데 후배 선교사가 오면 그쪽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선교사가 오기까지 1~2년 기간이 걸리고 국제학교가 없어 선교사 자녀 교육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실 몇몇 선교사가 그곳에서 사역하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당시에는 선교사가 없는 상태였다.

어느 주일에 마가복음 2장 1~12절을 아내와 나누면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생각하였다. 주님은 열심히 백성들을 가르치시며 사역하시길 원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은 감시의 눈초리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 나는 어떠한가? 주님이 부르시고 새롭게 사역하길 원하시는데 뒷짐지고 옆으로 곁눈질 하면서 우돈타니지역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였다. 아내에게 우돈타니로 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묻자 선뜻 "그렇게 해요. 이곳 치앙마이는 80여 명의 한인 선교사가 있고 그곳에는 아무도 없잖아요"라고 답하였다. 늘 주님의 사역에 동역해 주었던 아내였지만 이렇게 준비된 마음일 줄이야.

많은 사랑의 충고를 뒤로 하고 2006년 8월 25일에 이사하였다. 그때 떠오른 찬송은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242장)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해 황무지에 백합화를 피게 하시고,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시고, 영적으로 눈뜨게 하실 것으로 확신했다. 부임한 타뚬훈련원은 아주 열악한 곳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는 것이 좋을 지를 한참 망설이게 하는 곳. 정말 소망이 없는 곳으로 바라보았다. 예배실은 벽없이 오픈된 곳으로 양철 지붕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생각하기도 싫은 더위와 갖은 벌레들, 소음, 겨울에는 추위, 흰개미가 먹어 썩고 약해져 쓸어질 것 같은 기둥, 이런 악조건을 이기고 요동없이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모습은 어느 지역의 교인들에게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곳 교인들의 열정, 단결, 도움이 필요하다는 영적인 갈급함 등을 보았다.

이사 온 6개월 후에 20년 된 과거 서류를 정리하면서 놀라운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였다. 제목은 '타뚬 프로젝트'로 내가 쓴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에는 이것을 언제 썼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러면서 몇몇 노회지도자들과 만나 기억을 되살리면서 알게 된 것은 1992년(15년 전) 태국교단 총회 때 이곳 13노회 노회장과 몇몇 지도자들이 나를 찾아와서 타뚬훈련원 사역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 당시 한 번도 이곳을 방문한 적 없는 상태에 이야기만 듣고 앞으로 이런 이런 사역을 하고 싶다면서 써 놓은 프로젝트 였다. 가보지도 않은 상황에 단순히 기도와 머리로 상상하면서 세운 사역으로 그 당시에 신학교 사역, 훈련 사역, 주변국 선교 사역, 봉사 사역 등을 기록하여 놓은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상황이 변화되어 노회에서 다시 요청하지 않았고 나 역시 서류를 넣고 마음 한 구석에는 생각하였으나 잊어 버렸다.

15년이 지난 이 서류를 보면서 심장이 뛰고 머리카락이 서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제가 이곳에 와서 사역하는 것이 내 자신의 바른 결정이나 스스로 헌신한 것이 아닌 주님의 계획 안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험을 쌓게 하시고 15년 후에 이곳으로 다시 재배치해서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묘하고 신기할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계획할지라도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 속에 이뤄짐을 믿고 또한 후원자들을 허락하시어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되게 하는 역사로 센터의 환경이 바뀐 것이다. 목적에 따라 미래를 준비하고 지도자를 세우는 센터로 굳건히 서도록 기도 부탁 드린다.






< 8 > 전도훈련원 사역의 현재와 미래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08일(수) 10:03

태국 조준형선교사

태국교단의 우선적인 정책은 전도와 교회 개척이었고, 전도 훈련원의 주된 목적은 전도자 양성과 교회를 개척하여 태국복음화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전도 훈련원의 사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규적인 전도 훈련을 통하여 복음 증거와 교회 없는 지역에 교회 개척하는 '전도 제자' 양성 사역이다. 둘째, 평신도 지도자를 양육하고 목회자 훈련, 청년, 남ㆍ여전도회, 교사 등을 훈련시키는 교회 지원 사역이다. 셋째, 지역사회 속으로 들어가 음악, 언어, 스포츠, 문화, IT 등을 가르치는 봉사와 복음 증거 하는 사역으로 사회봉사사역이다. 넷째로 주변국 복음 사역을 위하여 교역자 훈련, 평신도훈련, 선교방문과 선교협력 등을 돕는 선교 사역이다. 다섯째, 멕길버리 신학교의(치앙마이) 분교로 목회자 양성, 직장인들 신학훈련을 하는 신학교 사역이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에 의하면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전도훈련을 받은 후에 친척들을 찾아가 복음을 증거하였으나 처음 반응은 냉소적이었는데, 할머니에게 전도하고 함께 기도하던 중 앞을 보지 못하던 할머니가 앞을 보게되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자 친척들 14명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농경지에서 놀랍게도 배 이상의 소출을 얻게 되었다면서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축복이며 축복받은 자로 살게 됨을 증거했다.

전도훈련 받는 사람들 중 27명은 치앙라이에서 14시간, 12명은 남태국에서 30시간을 봉고차를 타고 온다. 지금까지 전문적인 전도훈련을 받지 않았기에 교단적 차원에서 우돈타니에 가서 훈련받도록 지원해주고 평신도 훈련의 질적 성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교단 국내선교부의 교재를 사용하며 교재 집필자가 강사로 와서 가르친다. 연 4회 참석자에게 양 교단 총회장님의 이름으로 수료증도 준다. 감사한 것은 지난 2월 27일에 제1기 43명이 수료하였다. 이들은 나가 복음사역자로 서게 될 것이다.

훈련원 내의 전도처에서 2008년에 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쑥'이란 이름의 직원은 나이가 63세인데 그동안 오토바이 면허없이 지내다가 도전하여 면허를 취득했다. 컴퓨터로 시험을 치르는데 감독관이 "아저씨 컴퓨터를 다룰 줄 아시나요?"라고 묻자 "저는 컴퓨터를 만져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고 하나님께 기도로 간절히 도움을 구하면서 시험을 치렀는데 놀랍게도 최고점이 나왔다. 30점 만점에 28점을 받아 주변의 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어떤이는 영어도 잘하는가 하고 물으면서 지식인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또한 믿는 자에게 존귀함을 주심을 감사드릴뿐이다.

우리는 가끔 폭발적인 성장이나 열매를 보길 원한다. 그러나 1백60여 년 전 선배 선교사들이 수십년 걸쳐 한 영혼을 구원받도록 인도한 것에 비하면 오늘날의 전도 열매는 어떤 면에서 폭발적이다. 그러나 한 영혼, 한 영혼을 깊은 사랑으로 섬기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선배들의 눈물과 진심, 한국교회의 기도 후원 등이 아울러 이런 열매들을 맺게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우돈타니에서 50분 나가면 라오스 국경이 나오고 넘어가면 수도 위앙짠이 나온다. 라오스는 중국이나 베트남과 같은 공산국가이기에 제한이 많지만, 이런 지역적인 관계로 라오스복음주의교단과 연계하여 저희 전도 훈련원에서 라오스교회가 필요로하는 교육과 훈련 및 선교협력이 강화되길 기도한다.

기도제목:
1. 라오스교회에서도 전도훈련원에 와서 신학훈련, 농업훈련, 청소년 훈련 등을 받을 수 있도록
2. 훈련원 안에 2년 내에 문교부가 인정하는 신학교교육을 (B. TH) 실시할 수 있도록
3. 전도훈련 2기생 50명을 받아 1년 간 잘 훈련하여 전도자로 세우도록
3. 여러 훈련들이 진행 중인데 훈련이 훈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영성 있는 바른 지도자를 세우고 개교회     에서 질적-양적 성장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오묘한 역사

[ 땅끝에서온편지 ] < 9 > 산족사역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21일(화) 18:49

태국 조준형선교사  

태국에는 약 1백만 명 남짓 산부족들이 미얀마와 긴 국경을 이루는 산 속에 살고 있다. 카렌족, 라후족, 리수족, 몽족, 아카족 등 각 부족들 안에 여러 계파까지 합치면 20여 부족이나 된다. 왜 이들이 이렇게 태국 땅에 살고 있는가?

티베트 남부로 미얀마, 중국의 서남부의 연안지역, 라오스, 베트남에 흩어진 부족사회들이 자신들의 문화, 언어 전통을 가지고 자치주의 형태로 살았는데 18, 19세기의 서구 열강 즉 영국과 불란서가 이 지역에 들어와서 산과 강을 중심으로 나라를 임의로 나누고 보니 한 종족이 몇 나라로 흩어져 사는 형태가 되었다. 부족들 중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식민 통치를 위하여 강대국이 그들에게 유익을 줌으로 식민시대가 종식하면서 정권을 잡은 주부족이 다른 기독교 부족들을 핍박하게 되었다. 공산정권이 들어오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를 찾아 경제적인 혜택을 받고자 태국쪽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화전식의 농사와 유실수를 심어 생계를 유지하고, 태국 왕족이 이들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 이들은 정령숭배가 대부분이기에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태국인들보다 효과가 더 많다. 이들은 고난과 삶과 죽음의 벼랑에 내몰렸던 사람들이기에 복음을 더 빨리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국내에서 이들의 인구 비율은 전체 태국인구 6천5백만 명의 1~1.5% 정도이고 복음화률은 20~30%에 이른다. (태국선교 ^ 산족선교라는 것은 잘못된 인식으로 산족선교는 태국선교의 한 부분이다) 태국 정부의 이들에 대한 정책은 가급적이면 태국에 동화와 산에서 평지로 내려 가도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태국 사회 속에 살기가 상당히 어렵다. 기후, 언어, 삶의 형태, 문화가 전적으로 다르다. 현재 어린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태국식 교육을 초등학교에서부터 받고 있어 점점 자신의 부족 언어(문자)와 문화를 잃어간다.

  
▲ 산족교회 세례식 모습.
1988년에 카렌족 교회를 농롬(인타논산 중턱)동네에 개척할 때 대나무로 만든 좁은 집에 30여 명의 어른과 어린이들이 빽빽히 모여 말씀을 들었다. 우리 네 식구가 가면 자신들의 식생활 방식대로 큰 쟁반에 밥을 헤쳐놓고 고추장같은 반찬 한 가지를 놓고 먹는다. 김이나 다른 반찬을 가지고 가서 나누어 먹기도 하면서 저들이 먹을 반찬이 없을까봐 우리 아이들에겐 많이 먹지 못하게 했다. 혹은 미리 음식을 먹여 배를 어느 정도 채워서 올라가기도 하였다.

성탄절 즈음에는 영사기를 돌리고, 비디오를 가져가 '예수' 영화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겨울 산속의 날씨는 스산하여 추위를 느낀다. 밑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허리를 시리게하여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에 식구 중 한 사람이 화장실을 가면 모두 일어나 함께 집 뒤에 있는 화장실을 가야갔다. 그 당시 어렸던 아이들이 이제는 결혼하여 아이의 엄마, 아빠가 되었어도, 지금도 그 지역을 방문하면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성원-아라, 잘 있는지 보고 싶다"면서 눈물을 닦는 사람들도 있다.

1988년에 깊은 산속 동네에 단기 전도 팀 6명이 들어가서 한 주간 전도한 적이 있다. 동네에 화장실조차 없는 삶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에서 이와 서캐를 잡고 감겨주고 함께 생활하면서 지냈다. 그 후 함께 일하는 전도사가 이곳을 방문 전도하였으나 우리는 16년 간 방문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하루는 작정하고 방문하였는데, 너무도 놀라웠다. 2~3백명 들어갈 수 있도록 교회가 지어졌고, 당시에는 두 가정만이 기독교인이었는데, 동네의 80%가 교인이었다. 아무도 단기 팀을 기억하지 못하나 과거 머리를 감아주던 일을 이야기하자 생각이 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님의 복음 역사는 참으로 묘하다. 복음 증거를 누가 시작하였든 추수할 일꾼을 통하여 거두시는 주님이셨다. 어느 라후족 지역에서는 약 2년 간 무당이 관심을 가지고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겠다고 결심하고 자신이 거느리던 세 가정이 함께 믿게 되어 14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적도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회들이 많은 개척교회와 교회 건축 지원을 하였다. 오늘날 이들에게 필요한 사역은 자녀들을 위한 기숙사 사역이다. 믿는 가정들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교회가 기숙사를 운영해주길 바란다. 많은 선교사들이 이들을 위한 기숙사 사역을 하고 있지만 너무 부족하다.

 필자 역시 산 속 두 곳에 카렌 어린이 38명과 라후 어린이 20명을 위한 기숙사 사역을 시작하여 현지인 전도사들이 감당하고 있다. 중등교육을 받으려면 읍 단위 도시로 내려가야 한다. 한국교회가 교회건축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를 향한 산부족 교회의 바람인 기숙사 사역을 위한 지원이 시급하다. 현지 노회와 교회들이 기숙사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시설이 미비하고 더 많은 기숙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선교는 1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닌 미래를 향한 비전을 가지고 씨를 뿌려야 한다. 저들이 태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교육 선교 지원이 절실하다.






< 10 > 문화적으로 조심해야 할 것들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7월 29일(수) 09:23
태국 조준형선교사

태국에 선교사로 온다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야 하기에 어려움이 있고 조심해야할 것들이 있다. 예로, 태국 왕권에 대한 불미스러운 말을 하는 것, 불상을 훼손하는 것, 가족 관계를 해치는 일을 하는 것, 태국 사회와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 등이다. 한 번은 강의 시간에 사단의 정체에 대하여 강의하면서 에스겔서 28장 11~19절의 두로왕과 비교를 하면서 교만하고, 하나님의 신성 모독 등의 내용을 칠판에 썼다. 두로왕을 태국어로 '왕, 타이라스'라고 썼는데 마치 '왕, 타이'라고 보였는가 보다. 그날 대학성에서 장학관이 나와 서류를 점검하면서 제 강의실을 지나가다가 그 내용을 보았다. 잠시 후에 태국교수가 내려와 나를 부르더니 "외국인이 태국 왕에 대하여 말을 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기에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의 두로왕에 대한 것이지 태국왕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자 성경을 들고 올라가서 해명한 일이 있었다.

선교사는 복음을 중시하고 전파하는 것이 본질적인 사역이다. 물론 사회의 변화와 성경적인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잘못하면 타종교를 비하하거나 경쟁하는 듯한 모습이나 왕권에 대하여 불미스럽게 말하거나,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태국이 못사는 나라 혹은 문화적으로 뒤처진 나라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나는 가끔 태국에 왕권이 있기에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비교하여 설명하곤 한다. 또한 가족제도와 형제자매 간의 긴밀한 관계를 비교하여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나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잘못되었다고 한다. 그렇듯 우리도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이 땅에 살면서 좋은 일을 하고 공덕을 쌓은들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복음을 제시한다. 이런 '조심해야 할' 문화적인 것이 복음의 장애가 아닌 복음 증거의 좋은 접촉점을 제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에서 탁신 전 수상이 부정부패, 왕 제도에 대한 도전, 노동자와 농민층의 지지로 인한 지식층의 반발 등으로 밀려나 망명을 떠났지만 그에 대한 지지는 별로 떨어지지 않았고, 비록 그가 만든 당은 해체되었으나 추종자들에 의하여 다른 당을 만들고 선거에서 승리하여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자 짬롱 전 시장과 쏜띠 등이 연합그룹(노란색으로 왕을 상징)을 만들어 수상관저 앞에서 여러 개월 동안 집회를 가지고 심지어는 작년 11월 말에 국제 공항, 지방 공항 등을 점거함으로 폐쇄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란색의 주장은 탁신과 추종자들이 왕권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기간에 선교사들도 큰 피해를 보았다. 즉 전도집회(12월1-5일) 강사들이 입국할 수 없어 모임을 연기해야 할 것인가, 강행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비록 정치적인 혼란은 있지만 이미 짐을 쌌고 갈 준비를 다하였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강의하면서 전도에는 늘 고난과 장애, 핍박이 있지만 이것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기고 감당하는 것임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회를 물리적으로 진압하지 않았고 내버려두는 듯한 모양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새로운 내각이 들어섰고 아피씻 수상은 영국 옥스포드에서 공부한 엘리트이고 젊은 사람, 청렴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는 탁신 지지 세력이(독재에 항거하는 민주그룹, 빨간 색) 노란색처럼 수상관저 앞에서 데모하기 시작하여 아시아의 정상들이 묵는 파타야 지역 호텔에 납입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정상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귀국하고, 태국 수상 역시 자리를 피하였다. 그리고 강렬한 집회를 관저 앞에서 하였다. 군인들이 투입되 사격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러던 중 데모대 내부적인 강온의 갈등과 불순분자들이 참여함으로 스스로 해산하여 한숨을 돌렸다.

올해 5월 5일이면 왕(80세) 즉위 60주년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왕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태국 교회가 나라를 위한 기도를 더 열심히 하길 바란다. 또한 태국인이 복음 이외에는 소망과 행복이 없음을 알고 마음의 문이 열리길 기도한다.



태국 조준형선교사 <에필로그>

[ 땅끝에서온편지 ] 주님ㆍ선교사ㆍ후원자들의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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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8월 12일(수) 13:59
  
▲ 선교 초기 필자의 산족교회 전도모습.

교회는 우리를 선교지로 보내면서 5년을 견딜까 했다. 식구 4명이 꿈을 안고 선교지에 도착해 우연히 한인교회 사역을 위해 파송받은 선교사를 만났다. 그들은 은혜를 강조하는 교단에서 파송되었는데 나중에 그들이 "성령을 받지도 못한 선교사가 왔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선교지로 출발하기 전에 우리 부부는 그 교단에서 하는 기도원에 가서 둘이 합해 예수님께서 하신 것보다 조금 못 미치는 금식기도를 하고 떠났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보였었나 보다.
 
존경하는 동기목사 한 분이 자주 필자를 소개 할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선교지는 발판이고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살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선교지에서 오랫동안 잘 선교하고 있다."
 
선교지에 도착해 새문안교회 1백주년을 기념해서 선배선교사들을 초청해서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한 선교사께서 안식년으로 태국을 곧 떠난다고 하시더니, 우리를 빤히 보시면서 "조 선교사님을 보니 심성도 그렇고 어찌 이 척박한 태국에서 견디실지 모르겠다"면서 염려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 우리를 두고 한 추측들이 맞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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