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인도네시아 허석구선교사

최고관리자 0 947 2020.06.21 20:33

선교사가 쓴 선교사 이야기

[ 땅끝에서온편지 ] 선교사가 쓴 선교사 이야기

허석구선교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2월 27일(목) 11:03
[땅끝에서 온 편지]

필자 소개 :1951년 5월 1일생,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M.Div. ), 장로회신학대학교대학원(Th.M. 구약학전공), 풀러세미나리(Th.M. 선교학전공), 웨스턴카버넌트대학교(Ph.D.선교학전공), 부산영도교회, 부산산성교회, 서울응암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후 싱가폴에 선교사로 파송됨, 말레시아선교사, 2008년부터 인도네시아선교사로 일하고 있음. 
 
이야기를 시작하며
 
선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 민족, 나라에 하나님께서 주도자가 되어서 한 사람 혹은 팀을 보내는 것이다. 선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전하도록 선교지로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선교지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선교사는 아브라함, 요나, 바울,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선교사들의 경험을 그의 삶속에 심화시켜야만 한다. 선교사는 선교사의 뜻을 확장하기 위해서 선교지에 가는 것이 아니다. 선교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님과 함께 일해야만한다. 그러할 때, 선교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선한 선교사가 될 것이다.
 
(1) 선교사 생활
 
'선교사(missionary)'는 한국에서 존경받는 명칭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지에서는 선교사 타이틀은 기존 체제를 흔드는 세력으로써 의심받는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기독교인일 때는 선교사라고 해도 괜찮다. 비 기독교인일 때는 목사라고 소개하는 것이 좋다. 선교사는 현지인들이 존경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존경하지 않는데 가르침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사는 실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현지인이 존경하는 대상이 되도록 노력해야한다. 옛날 우리나라에 서양 선교사들이 활동할 때, 그들이 모든 면에 앞섰다고 믿어지기에 우리가 그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한국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서 그들이 현지에서 존경받을 위치에서 생활하도록 배려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요즈음 선교현장에는 현지인으로서 박사학위를 가진 분들도 많다. 우리나라 선교사들은 대체로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급수가 낮아서는 안될 것이다. 선교사는 무조건 고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도 버려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십자가이지만 선교사 가족의 생활이 열악해서는 안된다. 
 
(2) 자녀교육
 
선교사 자녀교육에 있어서 신앙교육과 가정교육은 학교교육을 우선해야함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필자가 선교활동을 시작한 싱가폴에는 그 당시에 유일하게 국립대학교가 하나뿐이었다. 음악대학은 없었고, 외국인은 법대, 의대를 지망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었다. 싱가폴에 한국 초등학교도 없었던 당시였다. 한국 대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자녀들 입장에서 볼 때 두려움 그 자체였던 것 같다.
 
2012년 요즈음은 세계 곳곳에 한국 초중고등학교가 세워져 있다. 선교사 자녀들을 이러한 학교에 진학을 시킨다면, 영어와 한국어 한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전수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선교사 자녀교육은 선교지 형편에 맞게 하되, 신앙교육 가정생활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3) IMF 위기를 겪으면서
 
1998년에 선교사들에게도 외환위기의 느낌이 왔다. 일반 직장인들은 퇴직을 당하고 가족들이 힘들어 했다. 싱가폴 한인교회 새벽기도회가 만원사례가 될 정도였다. 그 많던 단기 선교의 씨가 말랐다. 단기 선교팀이 많은 비용을 쓰면서 선교지를 방문하면 현지인들 중에는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도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외환 위기가 왔을 때, 단기 선교팀이 뚝 끊어지고, 선교활동도 수그러드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한번은 싱가폴 한인교회 교역자 가족 수련회를 인도네시아 바탐섬 부근의 꾸붕섬에서 가지게 되었다. 바탐섬 이민국에 한국인이 30 여명 도착하자 이민국 직원들이 싱글벙글하면서 대환영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단기 선교에 대하여 지지자가 되었다. 국가적으로 외환위기같은 어려움이 닥치면 선교활동에도 장애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2012년 근래에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유학하거나 직장을 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 외국인을 위한 인도네시아어 과정이 있는데, 과거에는 일본인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2008 년에는 한국학생이 60%, 2012년에는 80%에 이르고 있다. 국제화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한류열풍과 함께 세계 곳곳에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하는 것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디아스포라 한인교회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디아스포라 선교

허석구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3년 01월 04일(금) 15:17
[땅끝편지]

(3) IMF 위기를 겪으면서
 
1998년에 선교사들에게도 외환위기의 느낌이 왔다. 일반 직장인들은 퇴직을 당하고 가족들이 힘들어 했다. 싱가폴 한인교회 새벽기도회가 만원사례가 될 정도였다. 그 많던 단기 선교의 씨가 말랐다. 단기 선교팀이 많은 비용을 쓰면서 선교지를 방문하면 현지인들 중에는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도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외환 위기가 왔을 때, 단기 선교팀이 뚝 끊어지고, 선교활동도 수그러드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한번은 싱가폴 한인교회 교역자 가족 수련회를 인도네시아 바탐섬 부근의 꾸붕섬에서 가지게 되었다. 바탐섬 이민국에 한국인이 30 여명 도착하자 이민국 직원들이 싱글벙글하면서 대환영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단기 선교에 대하여 지지자가 되었다. 국가적으로 외환위기같은 어려움이 닥치면 선교활동에도 장애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2012년 근래에는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유학하거나 직장을 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국립대학교에 외국인을 위한 인도네시아어 과정이 있는데, 과거에는 일본인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2008 년에는 한국학생이 60%, 2012년에는 80%에 이르고 있다. 국제화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한류열풍과 함께 세계 곳곳에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하는 것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 같다.
 
(4) 싱가폴 한국 초등학교 
 
외환위기의 후유증이 대단한 기승을 부리고 있던 2000년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싱가폴 한국 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필자도 후원교회로부터 선교비가 끊긴지 2년이 된 때였다. 싱가폴 한국 초등학교 학생들이 1백12명에서 67명으로 급감하게 되자 학교 운영이 어려워졌다. 초등학교 이사진들의 회의 결과 한국에서 파견받아 오는 교장대신에 싱가폴에 거주하는 한인들 가운데서 교장을 뽑기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교장을 맡을 사람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 자리에 앉힐 수도 없는 문제였다. 마침 싱가폴 한인교회 장로 한 분이 싱가폴 초등학교 이사였는데, 그 소식이 나에게 전달되어 나는 이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이사장 말씀이 낮은 월급과 높은 월급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낮은 월급을 택했다. 후문에 나를 가리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었다고 했다. 방학 기간 중에는 선교활동을 하였고, 주일에는 싱가폴 한인 교회에서 설교와 행정을 맡았다. 1년을 돌이켜 보니 사회를 위해서 봉사를 했지만 이 때까지 해왔던 선교활동을 마음껏 못하게 된 것 같았다. 그 때는 지금처럼 후원교회에서 한국 학교 교장생활도 선교활동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안식년을 핑계하고 교장직을 1년만에 사직했다. 그 어려운 시기에 함께 했던 교직원들에게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이 선교활동을 계속하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자비량 선교를 경험케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5) 세계에 흩어져있는 한인 교회를 통한 선교(디아스포라 한인교회 선교)
 
나는 10년간 싱가폴 한인교회에서 선교와 행정과 심방을 담당했다. 1990년대에는 선교사가 무슨 한인교회를 돕느냐하는 비판도 있었던 때였다. 심지어 선교사들 중에서도 한인교회를 하는 선교사는 선교사가 아니라고까지 하던 때였다. 그러나, 10년간 한인교회를 싱가폴에서 섬겨본 결과 한인교회를 통한 선교활동이 대단한 것을 깨달았다. 싱가폴에 가까운 바탐섬에 선교관을 매입하여 선교사들을 발굴하여 보내고, 협력하며 일했다. 지금은 바탐섬에 바탐신학교, 신학교기숙사, 바탐 초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유치원도 4개이다. 바탐섬과 인근 작은 섬에도 복음을 전하며 예배당을 건축한 것은 감격적인 복음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수마트라 빨렘방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선교사, 인디아의 첸나이(Chennai)로 파송된 임하여 여선교사, 캄보디아로 파송받은 4 가정이 있다. 동말레시아 사라왁의 현지인 전도목사 다섯분에게 협력선교비를 15년 이상 보내었고, 이 분들을 통한 선교의 열매는 지면이 좁아서 보고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선교사 한 사람의 활동이 아니라 싱가폴 한인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초교파적으로 24가정의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작품이다.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선교사는 거짓선교사이다. 모두 하나님의 도움과 동료 선교사들의 협력이 있었고, 특히 선교지에 있는 한인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의 열매가 20년 후에 이만큼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교가 많은 인도네시아 땅에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디아스포라 한인 선교를 하는 선교사는 단순히 한인들을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정신을 품고 목회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선교에 눈이 뜨이도록 한다. 사실, 필자가 한국에 있었을 때 선교에 관한 책자를 읽어보아도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 나보다 먼저 선교사로 나간 동기 목사의 선교편지를 받아 보아도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선교사들이 선교편지를 보내는 것은 기도를 해달라는 요청이다. 그리고, 후원할만한 위치가 되면 물질적 후원도 해달라는 것이다. 물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간다고 하지 않는가? 물질만 보내고 선교사를 위해 기도를 간절히 안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요즈음은 인터넷도 있고, 인터넷 전화, 이메일, 페이스북 연락수단이 다양해져서 좋은 시대이다. 선교사에게 관심을 보이고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음을 알려주면 좋다.
 
해외 한인교회를 통해서 선교사를 또 파송하게 된다. 싱가폴 한인교회 집사 두 분이 선교지에 함께 갔다가 H그룹에 속한 직장을 그만두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경우와 같은 것이다. 싱가폴에 단순히 신학교 유학생으로 왔던 전도사, 목사들이 인디아, 캄보디아, 중국, 인도네시아로 선교사 파송을 받아서 나간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2-3년 주기로 바뀌는 교인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한인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선교에 접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도 많았다.
 
해외 한인교회가 자립하게되고 선교에 눈이 뜨이면 가까운 선교지에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현지 신학생 가운데 유망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며, 신학교를 세우고, 교도소에 가서 전도하며, 베트남 난민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교인들과 함께 하였다.  싱가폴에 가까운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선교관을 구입하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까지 세우게 되었다. 신학교도 세웠다. 수마트라가 인도네시아에 속한 큰 섬이었지만, 수마트라에 본 교단 선교사가 전혀 없었을 때였고, 그 곳으로 가서 활동할 어떤 선교사의 요청으로 땅을 구입하여 농장과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모든 선교활동은 초교파적으로 선교사들이 협력하며, 한국의 여러 교회와 교우들과 인도네시아 교인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교정신에 충만한 한인교회 교인들과 목회하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사업이 탄력을 받게된다.
 
해외에 있는 한인 교회는 대부분 선교관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폴 한인교회의 선교관은 무료로 운영되었다. 선교사들과 비전 트립(vision trip) 선교 활동을 하러온 분들이 잠간 머물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1년에 1천여명이 평균 4일 정도 머물다가 간다. 인도네시아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많은 교포들이 찾아와서 숙소로 사용한 적도 있다. 비자 수속을 위해서 2-3일 머무는 선교사들에게 무료 쉼터로서 사용되기도 했다.  
 
처음 선교지에 부임하는 선교사들은 한인교회를 위해 적극 협력하는 것도 좋다. 한인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의 정보를 얻는 것도 상호협력선교가 될 것이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한인교회와 협력하며 선교 지평을 넓히다

[ 땅끝에서온편지 ] 디아스포라 한인 선교

허석구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3년 01월 09일(수) 17:38
[땅끝에서 온 편지]

(5) 세계에 흩어져있는 한인 교회를 통한 선교(디아스포라 한인교회 선교)

나는 10년간 싱가폴 한인교회에서 선교와 행정과 심방을 담당했다. 1990년대에는 선교사가 무슨 한인교회를 돕느냐하는 비판도 있었던 때였다. 심지어 선교사들 중에서도 한인교회를 하는 선교사는 선교사가 아니라고까지 하던 때였다. 그러나, 10년간 한인교회를 싱가폴에서 섬겨본 결과 한인교회를 통한 선교활동이 대단한 것을 깨달았다. 싱가폴에 가까운 바탐섬에 선교관을 매입하여 선교사들을 발굴하여 보내고, 협력하며 일했다. 지금은 바탐섬에 바탐신학교, 신학교기숙사, 바탐 초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유치원도 4개이다. 바탐섬과 인근 작은 섬에도 복음을 전하며 예배당을 건축한 것은 감격적인 복음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 수마트라 빨렘방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선교사, 인디아의 첸나이(Chennai)로 파송된 임하여 여선교사, 캄보디아로 파송받은 4가정이 있다. 동말레시아 사라왁의 현지인 전도목사 다섯분에게 협력선교비를 15년 이상 보내었고, 이 분들을 통한 선교의 열매는 지면이 좁아서 보고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선교사 한 사람의 활동이 아니라 싱가폴 한인교회 교인들의 헌금과 초교파적으로 24가정의 선교사들이 협력하여 이루어낸 작품이다. 자신의 업적이라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선교사는 거짓선교사이다. 모두 하나님의 도움과 동료 선교사들의 협력이 있었고, 특히 선교지에 있는 한인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의 열매가 20년 후에 이만큼 나타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교가 많은 인도네시아 땅에 드러난 것일 뿐이라고 고백해야만 할 것이다.

디아스포라 한인 선교를 하는 선교사는 단순히 한인들을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정신을 품고 목회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선교에 눈이 뜨이도록 한다.

해외 한인교회를 통해서 선교사를 또 파송하게 된다. 싱가폴 한인교회 집사 두 분이 선교지에 함께 갔다가 H그룹에 속한 직장을 그만두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경우와 같은 것이다. 싱가폴에 단순히 신학교 유학생으로 왔던 전도사, 목사들이 인디아, 캄보디아, 중국, 인도네시아로 선교사 파송을 받아서 나간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2-3년 주기로 바뀌는 교인들은 짧은 기간이지만 한인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선교에 접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분들도 많았다.

해외 한인교회가 자립하게되고 선교에 눈이 뜨이면 가까운 선교지에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현지 신학생 가운데 유망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며, 신학교를 세우고, 교도소에 가서 전도하며, 베트남 난민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교인들과 함께 하였다. 싱가폴에 가까운 인도네시아 바탐섬에 선교관을 구입하고 선교사를 파송하여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까지 세우게 되었다. 신학교도 세웠다. 수마트라가 인도네시아에 속한 큰 섬이었지만, 수마트라에 본 교단 선교사가 전혀 없었을 때였고, 그 곳으로 가서 활동할 어떤 선교사의 요청으로 땅을 구입하여 농장과 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모든 선교활동은 초교파적으로 선교사들이 협력하며, 한국의 여러 교회와 교우들과 인도네시아 교인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교정신에 충만한 한인교회 교인들과 목회하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사업이 탄력을 받게된다.

해외에 있는 한인 교회는 대부분 선교관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폴 한인교회의 선교관은 무료로 운영되었다.

처음 선교지에 부임하는 선교사들은 한인교회를 위해 적극 협력하는 것도 좋다. 한인교회를 통하여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의 정보를 얻는 것도 상호협력선교가 될 것이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말레이시아 사라왁 울루 스꺼랑의 이반족 선교활동

[ 땅끝에서온편지 ] 사라왁 밀림선교

허석구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3년 01월 16일(수) 15:22

[땅끝에서 온 편지]

(4) 사라왁 밀림선교-1

미션(Mission)영화는 감동적이지만 모든 선교사가 오지에 가야 한다는 선교정책을 세워서는 선교의 퇴보를 가져올 뿐이다. 왜냐하면, 세계인구의 대부분은 도시에 몰려있고, 오지와 밀림에서부터 도시로 인구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2006년도 선교대회를 할 때, 전라도 오지에 가서 설교를 한 경험이 있었다. 우리나라 농촌과 어촌에는 청년들을 만나기 어렵고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 고령화 인구들이 교회에 남아 있었다. 선교지도 마찬가지 추세에 놓여있다. 오지선교, 밀림선교를 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가 최전방에 나갈 필요는 없다.

1991년에 사라왁을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말레시아는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이래, 해협을 두고 동말레시아와 서말레시아로 이루어져 있다. 말레시아 수도 쿠알라 룸푸르가 있는 쪽이 서말레시아이다. 소위 반도 말레시아(Peninsular Malaysia)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사라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르네오섬 서북쪽에 있는 말레시아 주이다. 보르네오섬은 세계 3대 밀림 중에 한 곳이다. 아마존, 중앙 아프리카, 보르네오 밀림이 그 것이다. 사라왁에 공식적으로 45개의 부족들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 사라왁의 이반족이 65만명으로 가장 큰 부족에 속하는데, 말레시아 2개주인 사라왁과 사바주 그리고 인도네시아 깔리만딴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이들은 원래 그 조상들이 해적이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반족 조상들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부근에 살고 있던 부족들이었는데 이슬람이 싫어서 동남쪽으로 이주하여 수마트라 북쪽을 거쳐서 보르네오 까뿌아스(Kapuas)강 부근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슬람 상인이 메카에서부터 찾아와서 포교를 하자 다시 옮긴 곳이 지금 말레이시아 사라왁쪽이었다. 지금도 대다수의 이반족들은 이슬람보다 기독교를 선호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전체 기독교율은 낮은 편이지만, 회교를 제외한 부족들의 기독교화는 상당히 높은 비율을 점하고 있다.

효과적인 부족 선교는 선교사 1인이 1부족을 택하여 오래도록 선교하는 것이다. 동말레시아 사라왁에는 예수를 잘 믿는 부족들이 있다. 그 한 예를 들면, 룬바왕(Lun Bawang)족은 4만 5천명인데 부족 전체가 예수를 믿는다고 보아야 한다. 한번은 산을 넘어 가며 룬바왕족 마을을 방문하고 있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룬바왕족은 자신의 부족 안에서는 전도대상자를 찾을 수 없는 부족이 되어버렸다. 싱가폴에는 산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고작 높은 곳이 300미터도 되지 않는다. 싱가폴에서는 산기도를 갈 수가 없다. 산이 없기 때문이요, 있다고 해도 산속에 기도원이 없다. 한국 사람들은 산에 가서 기도를 하는 독특한 민족인데, 룬바왕족들도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한다. 사라왁에 다녀간 견습 선교사가 많은데 그 중에 어떤 여자 견습 선교사는 열심이 특심이라서, 룬바왕족의 무룻(Mulut)산 기도원에 올라가다가 진흙탕길에 미끌어져 고생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기도활동을 열심히 한 까닭에 거기에 있던 선교사들이 많은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

룬바왕족은 밀림에서도 새벽기도를 매일 드리고 있다. 필자는 하도 신기해서 "언제부터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나요?"하고 물어보았다. 예수 처음 믿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1928년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룬바왕족의 새벽기도는 마을마다 조금씩 다른데, 새벽에 교인들이 통나무 북소리가 둥둥하고 울리면 교회에 나와서 찬송을 부른다. 목사가 목회하는 마을도 있지만 목사가 없는 마을이라도 교인들은 자발적으로 나와서 찬송하고 기도를 한다. 룬바왕족 마을을 방문하면 하루에 평균 8번 식사를 하게 된다. 그들의 식생활이 풍성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풍채가 다들 좋다. 예수 믿고 새벽기도하며 열심히 농사지어 풍성하게 살면서 다른 부족을 향해 전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교회 이야기가 일색을 이룬다. 정치 이야기도 없고 경제 이야기도 없고 교회이야기, 농사와 사냥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룬바왕족 출신 목사중에 어떤 이들은 예수 안 믿는 타 부족을 위해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동말레시아에서 함께 사역했던 다닐 까와(Danil Kawah)목사도 룬바왕 출신이다. 다닐 까와 목사는 이반족 아내와 결혼하여 이반어를 배우고 두 분은 이반족 선교에 평생을 바치고 있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한 부족을 꾸준히 섬겨라

[ 땅끝에서온편지 ] 이반족 선교

허석구목사
2013년 01월 24일(목) 14:07

[땅끝에서 온 편지]

사라왁 밀림선교 -2

이반족은 강을 끼고 살고 있다. 강이 흘러가는 방향과 평행하여 가능하면 동향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1백m 이상되는 목조 건물 안으로 골고루 햇빛이 스며들도록 그들의 긴 집 소위 롱하우스를 짓는다. 1호실부터 15호실 혹은 24호실 그 이상되는 롱하우스도 많다. 추장은 대체로 롱하우스 중간 부분에 살고 있는데, 추장집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지위도 높은 편이다. 만일 새로 이사오는 사람은 가장 끝 번호를 배당받고 지붕을 연장하여 짓는다. 이들은 꽤 넓은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깊은 밀림인지라 전기 공급이 되지 않아서 자가발전하는 곳이 많다. 낮에는 전기 사용을 특별한 때가 아니면 못한다.
 
이반족을 전도하려면 마을에 직접 찾아가서는 큰 소득이 없다. 오히려 도시 부근의 시장에서 이반족 추장을 만나서 밥도 대접하며 그의 믿음을 먼저 얻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사라왁에 처음 도착한 선교사는 혼자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현지 목사를 통해서 모든 밀림의 정보를 얻게 되고, 이반족 추장을 만나거나 이반족 마을 소식을 듣고 함께 활동해야 한다.
 
이반족 선교에 관심을 가진 현지 목사도 한국 선교사와 함께 활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 선교사로 인하여 선교활동이 더 잘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15년 동안 사라왁 밀림선교를 한 결과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스꺼랑(Skrang) 강을 따라 있는 27개 마을 중에 9개 마을이 예수를 영접하여 지금까지 잘 믿고 있다. 이제는 이반족 스스로 다른 이반족 마을에까지 가서 전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이반족이 예수를 잘 믿는 때가 있다는 점이다.
 
이반족이 예수를 잘 믿는 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이반족은 자정이 넘어서 예수를 잘 영접한다. 필자가 발견한 것은 밀림에 사는 이반족은 예수를 믿을 때 집단적으로 개종한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샤마니즘, 정령숭배사상을 가지고 있다. 이반족은 모든 자연에 영들이 깃들어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귀신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반족이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하는 시간은 밤 12시 이후라는 점이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 9시쯤 되어야 예배를 드리게 되고 밤 12시가 넘어야 비로소 결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는 밤에 이반족 전도가 시작되면 잠을 자서는 안 된다.
 
2)이반족은 명절 때에 예수를 잘 영접한다. 우리나라 설날에 해당하는 하리 가와이(Hari Gawai)라는 명절에 부흥전도집회를 가지는 마을도 있다.
 
3)이반족은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났을 때 예수를 잘 영접한다. 눈에 암이 발생하여 복숭아 크기 만한 안암 환자를 방문하여 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온 가족이 부적을 불 태웠고 얼마 있다가 그 환자는 죽었지만 그 이후에 온 가족이 예수를 영접했다. 숭아이 삐낭(Sungai Pinang)이라는 15가구 성인 1백3명이 살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에 빠진 마을 전체 주민들이 전도를 받고 집단 개종한 예이다. 농사도 계속 흉년이 들고,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고 있었을 때에 그들이 필자와 다닐까와 목사의 방문을 받고 복음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고백에 의하면, "마치 한 줄기 빛이 우리 마을에 비추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온 마을 사람이 예수를 믿은 이후에 아무도 죽어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그들은 간증했다.
 
4)이반족은 장례식 이후에 예수를 잘 영접한다. 선교사는 이반족 장례식장에 열심히 찾아가서 관심을 보이고 기도해주며 그들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5)이반족은 영결식 이후에 예수를 특히 잘 영접한다. 이반족은 장례식 이후에 집단 영결식 가와이 안뚜(Gawai Antu)를 행한다. 이반족 집단 영결식은 이반족 마을의 경제 사정이 가장 좋을 때를 택해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이반족 마을에서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집단 영결식이다. 선교사는 수소문하여 이반족 집단 영결식장을 미리 찾아가서 추장을 설득시켜야 한다. 집단 영결식에 선교사를 초청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집단 영결식이 끝나면 이반족은 집단개종의 시기가 왔다고 그들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믿으면 귀신을 겁내거나 귀신을 위해서 더 이상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범사에 응답하신다는 것도 강조해야 한다. 물론 영생복락의 기쁜 소식도 알려 주어야 한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선원ㆍ학원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허석구 목사
2013년 02월 18일(월) 09:30

선원 선교
 
싱가폴에는 매일 평균 1백20척의 대형 콘테이너선이 입항한다. 영국, 노르웨이, 싱가폴, 일본, 덴마크 선원의 집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 선원들을 위해서 외항 선교회 지부가 일찍이 있었지만, 싱가폴 선원선교회를 새로이 만들어서 선교활동을 하게 되었다. 싱가폴 정부로부터 선원선교회(혹은 해양선교회)를 인가 받기까지 2년이 걸렸다.
 
필자는 싱가폴 항구 출입증을 만들고 한국 선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선박은 크든 작든 약 25명의 선원들이 승선하고 있다. 한국 선원들은 대체로 사관급이다. 선장, 갑판장, 1ㆍ2ㆍ3등 항해사, 1ㆍ2ㆍ3등 기관사들은 긴 항해 중에 다른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한국 신문, 싱가폴 신문, 성경책,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선원들과 이야기하며 상담과 기도를 해줄 때 위로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원은 선박 일정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주일 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분은 세례 받을 기회가 없어서 세례를 미루다가 마침 주일에도 정박하는 틈을 이용해서 교회에까지 데리고 와서 세례를 베풀었더니 눈물을 머금기도 했다. 어떤 미얀마 선원은 불교인이었지만 귀국해서 반드시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중국인 선원들은 책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성경과 전도책자를 나누어주면 좋아한다. 선원 선교는 각국 선원들을 접하며 선교할 수 있는 넓은 선교의 장이다.

학원 선교
 
서양 선교사들이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가 신학교를 너무 많이 세운 것에 비해서 종합 대학교를 많이 세우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일반 종합 대학교를 선교지에 금방 도착한 선교사가 세운다는 것은 희망사항이요 탁상공론일 뿐이다. 아직 언어와 문화도 익히지 않은 신임 선교사가 세울 부분이 아니다. 적어도 고참 선교사들과 협력해서 세워야 한다.
 
한국 선교사들이 세계 여러 나라로 파송받았지만 일반 종합 대학교를 세웠다는 소식은 가뭄에 콩나듯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조직과 경험과 재정과 현지 사정이 잘 조화를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 신학교 교수 사역을 하는 한국 선교사들이 많다. 신학교를 비롯하여 기독교 유치원, 초중고등학교까지는 한국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아직 일반 종합대학교는 설립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이 일을 위해서도 기도중에 있다.
 
신임 선교사이든 고참 선교사이든, 유치원을 설립하든 신학교를 설립하든지 기독교 종합 대학교 설립의 꿈을 가지고 학원 선교에 임하면 좋겠다. 왜냐하면, 기독교 종합 대학교는 그만큼 선교현지의 사회 저변에 많은 기독교 일꾼을 내보낼 수 있는 저수지가 되기 때문이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도시ㆍ협력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허석구 목사
2013년 02월 22일(금) 10:38

도시 선교
 
예수께서도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었다. 하여튼 사람이 살지않는 허허벌판이나 나무만 무성한 산 속에 가서 선교활동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밀림 선교도 밀림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 도시가 아니고 또 어디란 말인가? 도시에는 각종 인종들이 살고 있고, 많은 부족들이 몰려들고 있다. 도시에서 빈민선교, 밥퍼선교, 고아원사역, 특수 사역, 스포츠선교, 대형집회, 목회자 훈련, 신학교 사역, 기독교 학교 사역 등 다양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지에 가서 선교활동을 해야 진정한 선교사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지와 농촌에 가서 선교도 해야 되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더 활발하게 선교를 할 수 있다. 한국만 해도 사람들이 도시로 몰리고 있지 않은가?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포항 같은 도시에 많은 교회가 있다. 이처럼 선교지에서도 그 나라 수도와 행정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후진국이 아닌 선진국 도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은 경제적으로도 더 많은 지출이 있어야 하고, 수면 시간도 짧다. 선교사들이 도시 중심으로 모여있는 것은 당연하다. 도시에서 자녀 교육을 시킬 수 있고 많은 정보와 현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도시는 선교의 가장 큰 장인 것을 한국 교회는 인식해야 한다.

협력 선교 
 
필자는 현재 중국계 인도네시아 교단과 협력 사역을 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급한 것 같은데 실상은 만만디이다. 이리 재어보고 저리 재어보는 것 같다. 많이 참아야 한다. 10년은 지나가야 동역을 하자고 할 것 같다.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필자는 하나님 은혜 중에 네델란드 선교사와 협력 사역을 하고 있다. 한국 고참 선교사들이 15년 혹은 20 년 혹은 30 년 되었습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필자는 "선교사 생활 50년 된 네델란드 선교사와 협력 사역하고 있습니다"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아니, 우리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2천년 동안 일하신 예수님과 동역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네델란드 선교사와 처음 만났을 때 인도네시아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국 사람들보다 더 생각이 잘 통했다.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모아서 4시간 성경을 배우게 하고, 4 시간 사회 봉사를 경험하도록 해서 선교사로 파송한다는 선교단체이다. 소위 BMW 신학교(Bible, Missionary, Work 신학교)이다.  매 년 1백20여 명의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 인도네시아 사회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서 기독교 정신으로 봉사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다. 
 
산토사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며 학교의 필요를 찾아서 도우며 협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대다수의 신학교는 재정난에 힘들어하고 있다. 신학교 도서관에 장서가 4천권 이상 있어야 하고, 그 중에 신학 서적이 3분의 1 이상은 되어야 한다. 정규 도서관학과를 졸업한 사서가 있어야 교육부 심사에서 최고 점수를 받는다. 산토사 신학교에는 도서관 장서만 따져도 불합격이다.
 
한국 교회가 생각하는 현지 신학교를 만들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신학교가 원하는 신학교가 되도록 돕는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현지에서 원하는 수준이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여러 번 상담한 후에 현지에 꼭 필요한 부분을 돕고 협력해야 할 것이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회교도 전도법, 인도네시아에서 배운다"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허석구 목사
2013년 02월 28일(목) 14:51

기도 생활
 
필자는 기도생활을 그 동안 게을리 해왔다.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어달리며 눈물로 기도한지가 태고적같이 느껴진다. 필자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은혜를 받고 크게 눈물로 통회자복하고 이슬람보다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자는 결심을 최근에 하고서 실천에 옮기고 있다. 아직 완전하게 습관화가 되지 않았지만 일찍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인도네시아와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한국을 위해서도 기도를 빼지 않고 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앞서서 일하고 계심을 하루하루 경험하고 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맺힌다.
선교지마다 상황은 어렵다. 그러므로 선교사와 후원교회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해야한다. 이것은 선교사 생활을 하셨던 예수님과 사도 바울, 모든 주님의 종들과 백성들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 선교지를 위하여, 선교사를 위하여, 선교활동을 위하여 더 열심히 기도할 때이다.

회교도를 전도하려면

여러 나라마다 회교도의 입국으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있다. 회교도들도 인간이다. 생활고로 인하여 돈벌이하러 오는 것을 무슨 수로 막겠는가? 한국이 좋아서 유학오고,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문제는 회교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있으나, 다른 나라에 들어간 회교도들은 마음껏 포교를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여러 대책들이 강구되며, 연구하고 있고, 세미나와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필자도 고민을 이 부분에서 하고 있다가, 한 번은 인도네시아 어떤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놀라운 보고와 간증을 접했다. 그것은 그 교회는 이미 8백90명의 회교인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고 있을 뿐만 아니라, 1천5백명이 전도를 받고 있다는 보고였다. 그들의 전도 방법과 비전을 배워서 실제적인 결실이 맺히는 회교인 복음화 전도를 해야 할 것이다.
 
고양이 목에 달아야 할 방울은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방울을 달아본 경험이 있는 자가 그것을 해내는 것이다. 아무리 연구해도 실천하기 어려운 전도 이론과 대책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기도와 함께 실제적인 노하우가 있는 인도네시아 현지 기독교회로부터 회교인 전도법을 우리가 배워야할 때이다. 많은 회교인들이 유럽과 미국, 한국으로 물밀듯이 들어온다고 겁낼 필요가 없다. "얼마든지 오너라. 전도할 기회는 왔다. 너희는 우리의 밥이다." 가나안 정탐을 했던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과 실천이 우리에게 있을 때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풍성한 결실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이야기를 마치며
 
선교사들의 활동분야에 선교사 내규를 통해서 체계가 잡혀가고 있으나, 그 법에 의하여 활동이 많이 제약되고 있는 면도 있다. 20년 전에는 왜 선교사가 선교지에 나가서 한인교회에 머물고 있느냐 밀림에 가서 살 의향은 없는가하고 주문을 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인선교를 통하여 더 큰 주님의 선교를 감당한다는 것을 깨닫고 선교지에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인교회를 하고 있다. 타문화선교사로 출발했다가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를 갑자기 하게 되기도 한다. 한인교회를 담당하는 선교사가 타문화 선교를 겸하기도 한다. 선교사의 자율성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다. 복음을 전한다면 타문화 선교를 하든지 디아스포라 한인선교를 하든지 모두 인정해 주어야 한다. 영어, 인도네시아어, 이반어, 중국어 모두 시원찮게 구사하지만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접하며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선교사 생활을 하기 위해 또 준비하고 있다.

허석구/인도네시아 선교사, 1990년 총회 파송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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