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케냐 이원재선교사

최고관리자 0 951 2020.06.19 15:16

[땅끝에서온편지1] 케냐 이원재선교사

[ 땅끝에서온편지 ] 케냐 선교사로의 부르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7월 17일(목) 00:00
  
 
1998년 10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1997년 6월 꿈에 그리던 선교지 케냐에 현지답사차 도착하여 리무르라고 하는 곳에 여장을 풀었다. 적도선이 지나가는 아프리카의 동부 연안국가 케냐에서 맞은 첫날밤은 너무도 춥고 떨렸다. 한국에서의 동지섣달도 그보다 더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러 대에 걸쳐서 선교사들이 살다간 케냐교회협의회 선교센터의 사택에서 홀로 누워 밤새도록 개 짖는 소리에 두려움을 느끼며 뼈에 사무치는 추위에 시달리며  한숨도 못 잤던 그 밤을 잊을 수가 없다. 
 
꿈과 현실은 달랐다. 너무나 달랐다.
 
1976년 기독교학교인 경신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 나는 일가친척들 중에 제일 처음 기독교인이 되었다. 부모님의 반대와 핍박을 받으며 예수를 믿은 까닭인지 반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예수님과의 깊은 사랑에 푹 빠졌고 '맏물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안지 1년이 채 안되어 목회자가 되기로 서원을 하였고 이듬해인 1977년 민족복음화 대성회에 참석하면서 3일간의 금식기도 끝에 기왕이면 선교사가 되겠다고 재차 서원하여 그때 이후로 진로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이 1997년 선교사로 파송받기까지 20년을 보냈다.
 
1991년 신대원 졸업을 앞두고 동기들이 임지를 구하느라 동분서주할 때에도 나는 신대원1, 2학년 학우들과 함께 동남아로 한 달간 선교현지 실습을 떠났다. 그만큼 선교사로의 열망이 강했다. 부목사로 약수동의 신일교회를 섬기며 오랜 기간 선교부서 담당을 하며 40여 가정의 후원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의 면모를 익혔고, 또 성도들과 함께 남미, 북방, 동남아, 대양주의 여러 나라들을 단기선교 팀을 이끌고 다니며 선교현장들을 섭렵했다.
 
케냐를 사역지로 정하게 된 것은 다른 어떤 이유보다는 담임목사님이셨던 이광선 목사님께서 케냐를 선교지로 추천해주셨기 때문이다. 물론 나에게도 아프리카에 끌리는 마음이 있었다. 세계의 여러 대륙을 다녀본 결과 아프리카처럼 사람이 비참하게 사는 곳이 없고 적어도 이곳에서는 무엇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이들의 교육 여건도 괜찮았고 아내 진은현 선교사 역시 어릴 적부터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는 비전이 있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이 결정을 도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부아프리카 케냐 땅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12년, 짧지만은 않은 세월이 흘렀다. 현재 케냐에서 사역하고 있는 한국선교사들의 가정이 대략 80가정 정도 된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그 정도 숫자였다. 숫자의 변화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기실 내용을 살펴보면 끊임없이 많은 선교사들이 오고갔다. 길게는 4~5년 짧게는 1년 정도를 보낸 후 이 땅을 떠난 많은 선교사 가정들이 있었다.
 
얼마 전 중부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 선교사로 갔던 후배 목사의 가정이 그곳 선교지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 그보다 나중에 왔던 다른 한 가정이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또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서의 선교사역은 자신이 생각하던 선교사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중도 탈락 선교사들에겐 소명 혹은 부르심이 없었을까? 그랬다면 이곳 아프리카까지는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꿈꾸고 생각하는 선교의 비전이 각각의 선교지가 직면해 있는 현실과 필요(needs)와는 다른 경우가 왕왕 있다. 선교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는 아직은 너무 일방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소명은 기본이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선교지의 필요에 적합한 전문성과 은사와 인간성이 갖추어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를 보내소서' 하고 스스로 오는 자보다 '네가 가라' 해서 온 사람들이 더욱 현지에 적응을 잘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선교의 꿈이 너무 크고 고상한 것이 현장에서의 부적응과 시행착오와 큰 낭비를 가져오고 있다. 나 역시 이점에 있어서 아직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겨우 눈을 뜨고 걸음마를 마쳤다고나 할까?




[땅끝에서온편지2] 케냐 이원재선교사

[ 땅끝에서온편지 ] 떠오르는 기독교 대륙 아프리카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7월 23일(수) 00:00

  
 
PCEA 증경총회장 제시 까마우 목사(右)와 함께.
 
나를 이곳 케냐에 초청한 동아프리카장로회(PCEA, Presbyterian Church of East Africa) 교단은 영국의 스코틀랜드 자유 장로교회의 선교에 의해 시작되었고 지금은 약 4백만에 이르는 신도를 가진 세계 최대의 장로교단이 되었다. PCEA 교단 총회장은 개신교를 대표하여 정기국회의 개원식에 참석하며 대통령과 나란히 자리할 만큼 사회적 인지도와 영향력이 막강하다. 케냐에서 인구의 80%에 이르는 기독교(신구교)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WCC의 총무인 사무엘 코비아(Samuel Kobia) 목사도 케냐 감리교회 출신이다. 음비티(Samuel Mbiti) 같은 신학자는 케냐 출신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은 수없이 많은 박사학위 논문으로 나올 만큼 출중한 신학계의 거장이다. 케냐뿐만 아니라 사하라 이남의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기독교가 대표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프리카에, 케냐에 아직도 선교사가 필요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 교단만 하더라도 적지 않은 숫자의 선교사를 이곳에 파송했으며 80여 가정에 이르는 각 교단과 선교단체의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고, 이와 더불어 해마다 찾아오는 한국교회의 단기선교팀들은 공항에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케냐에서의 지나간 10년의 세월은 아마기독교 대륙 아프리카에서 한국선교사의 자기 정체성 찾기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국에서 막연히 아프리카선교를 생각할 때 리빙스턴이나 슈바이처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케냐에 오기 전에 한국에서 아프리카에 대해 그리고 있었던 그림은 전쟁과 기근, 질병과 가난이라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종교적으로는 무속적이고 정령숭배가 지배적인 피선교지로서의 미개한 땅이었다. 그것은 각종 선교관련 잡지나 선교대회 등의 행사에 쓰이는 사진자료들이 암암리에 심어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진들이 보여주는 전통복장이나 이교적 풍속들이 적용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곳 인구의 10%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보아 온 아프리카 사람들의 실상은 세계의 고물상에서 수집된 온갖 재활용품들과 옷가지로 남루하지만 현대적인 복색을 하고 돈을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물질 중심의 생활방식을 가졌고, 또 대부분의 교회는 열정적이면서도 보수적이고 동시에 사회참여에 첨예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1997년 케냐에 선교사로 처음 왔을 때 당시 PCEA 총회장이었던 제시 까마우(Rev. Dr. Jesse Kamau) 목사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 교단과의 선교동역(Partnership)에 대한 제의를 받자 들려준 대답은 가히 충격적으로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당신들은 아프리카의 교회들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으며 과연 정당(대등)하고 실질적으로 의사소통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내어준 것이 케냐장로교회의 헌법과 예식서였다. 우선 한번 읽어보고 연구하라는 것이었다. 그분은 이미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고 한국교회의 아프리카 기독교에 대한 선입관과 몰이해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계셨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PCEA의 총회와 노회를 수없이 참석하며 이들의 회의 진행 자세와 회무 처리 방식, 노회 운영 등을 보면서 진짜 장로교회란 이렇게 운영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배웠다. 총회와 노회의 권위를 존중하면서도 철저하게 민주적 절차를 따르고, 투명하게 운영되는 재정과 예의를 지키고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그들의 교회 질서 속에 있었다. 물론 아프리카의 교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했던 그런 연약한 교회는 아니었다.

어느 날 신학교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서 가져온 유일한 한국말 자료인 서정운 교수님의 선교학 개론 강의노트를 읽다가 '복종으로서의 동역(Partnership in Obedience)'이라는 제목의 WCC의 회의 슬로건을 보고 눈이 확 뜨였던 기억이 새롭다.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고 무엇인가 한국교회에서 내가 배운 것을 가르치고 전파한다고 생각했던 그런 선교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질서 속에서 복종하고 배우고 존경하는 가운데서 동역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바르게 확장되어 갈 수 있다는, 가히 역설적인 선교방식이 피부에 와 닿는 경험이었던 것이다.





[땅끝에서온편지3] 동부아프리카 장로교대학 교수 사역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8월 21일(목) 00:00

  
 
동부아프리카 장로교대학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 가운데 필자.
 
케냐  이원재선교사


동부아프리카 장로교대학(PCEA Presbyterian University of East Africa)에서의 선교학 강의를 중심으로 나의 케냐 선교사역은 시작되었다. PCEA의 교단신학교인 이 신학교는 한 학년의 학생 수가 고작 10명에서 많으면 20여 명이었다. 처음에는 교단의 크기와 교회의 숫자에 비해 목사 후보생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실제로 PCEA 교단은 케냐에서 가장 왕성한 개신교단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4천여 교회에 목사의 숫자는 4백여 명 밖에는 안 되어 한 명의 목사가 적어도 4~10개까지의 교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부담은 적지만 그래도 여러 교회를 동시에 목회하자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프리카 교회의 열악한 재정형편에서 교회마다 목회자를 두어서는 교회를 유지하기도 힘들고, 여러 가지 시급한 사회선교 사업에 힘쓸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PCEA교단은 신학교 내에 신학 연장 교육프로그램인 TEE (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를 통하여 평신도 지도자를 집중 양성하였고 현재까지 2만5천여 명의 졸업생을 내었다. 대부분이 지역교회의 장로인 이들이 개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행정적인 일들은 노회로 가져와서 처리한다. 이러한 평신도 지도자 활용을 통해 생긴 여력으로 교회는 각종 초중고교와 병원과 사회사업기관들을 운영하여 정부가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적 필요들을 감당하며 국가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단의 감독 아래 많은 교인들 가운데서 검증되어진 사람들이 선발되는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탁월한 지도력과 희소가치로 목회자가 최고의 예우와 존경을 받으며 전체 교회를 성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어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자신감과 경험으로 이곳에서 신학교를 시작하였는데 2000년대 초반엔 한국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가 케냐에만 9개가 있었고 성경학교(Bible School)까지 합하면 더 많은 숫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경우 지역교회에 기반을 두지 않은 초교파 신학교라 우수한 인재를 뽑기도 어려웠고 졸업한 후에 일할 수 있는 마땅한 교회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를 운영하는 선교사 자신이나 채용된 교수들이 제대로 된 학위를 가진 분들도 아니었기에 그 교육의 질도 질이려니와 이곳의 상황에서 검증되고 토착화된 신학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힘든 것이었다. 신학교육이 지도자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역교회와의 연계가 없는 목회자 양성은 이런 면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학교들은 그 선교사가 떠나거나 한국에서의 후원이 끊어지면 문을 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나 자신 역시 박사 학위를 가지지 못한 교수로서 한국에서의 교수 경험도 없었기에 언제나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강의를 시작할 때 "오늘은 여러분이 저의 제자들이지만 곧 졸업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저와 세계선교 동역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데에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당부를 하곤한다.

케냐를 비롯한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교회가 재정적으로 취약하고 인적자원이 부족해서 세계선교는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성경적으로는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영적부담의 문제이지 재정적인 문제 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 대학에서 선교학을 배운 학생들이 약 1백80명 정도가 되었다. 벌써 이 교단 목회자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나의 제자요 동역자가 된 것이다. 숫자 상으로는 그들이 목회하는 수백만의 교인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을 떠나올 때 후원교회 담임목사님을 통해 받은 부탁 중에 하나는 선교지에서 문어발처럼 이것 저것 많은 일들을 벌이지 말고 30~40년 동안 한 가지 일에만 죽도록 충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고 그들의 사역을 후원하며 연륜을 쌓으신 탁월한 선교지도력에서 나온 귀한 충고였다. 후원교회의 그러한 이해의 바탕이 있었기에 가시적 성과에 대한 큰 부담이 없이 신학교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고 부수적인 일들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동역교단과 연계한 현지인 지도자 양성과 세계선교에의 도전 이야말로 떠오르는 기독교 대륙 아프리카의 황금어장에서 선교사가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땅끝에서온편지 4] 리무르 노회와의 협력사역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8월 21일(목) 00:00

  
 
첫번째 협력사역 프로젝트였던 키나래 난민어린이센터에서 리무르 노회원들과 함께 도서관 전달식을 갖는 필자(左).
 
케냐 이원재선교사

처음 케냐에 와서 정착하고 살던 곳은 '리무르'라고 하는 작은 타운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결된 노회가 PCEA 리무르노회였다. 나를 이곳에 소개해준 분은 그 당시 학장이었던 쿠리아 박사(Rev. Dr. Plawson K. Kuria)이다. 그는 선교 모라토리움을 주창했던 존 가투 박사(Rev.Dr. John Gatu)가 PCEA 교단의 총회장을 할 때 그와 함께 교단 총무로 사역 했던 분이다. 그가 들려준 선교 모라토리움 배경 설명에 의하면 선교나 선교사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기본 인프라를 갖지 못한 제3세계 교회 상황에서 외국선교부들이 독점하고 있던 인프라를 흡수하여 지역교회가 자립, 자주, 자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키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케냐의 PCEA는 이를 기반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리무르 노회의 관할 지역은 사방 2백kmdp 이른다. 서울보다 배나 큰 지역을 관할한다. 기본적으로 PCEA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은 시간이 걸려도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고, 또 그 교인들을 목회하는 일은 현지인목회자가 감당하고 각종 지역개발 프로젝트나 사회복지 사업은 선교사와 협력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처음 맡겨진 협력사역 프로젝트가 키나래 난민촌 어린이사역이었다. 나이로비 북방 70km 쯤에 위치한 키나래 난민어린이 센터는 부족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살던 지역에서 도망오거나 강제 이주 정책으로 광야에 버려진 사람들의 자녀들을 모아 교육을 하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비극적인 부족 갈등도 식민주의 유산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곳에 모인 2백여 명의 어린이들은 대다수가 부모 없는 고아이거나, 편부모 밑에서 일반 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어린이들이다. 케냐 정부가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한 2004년까지 약 5년간 이 학교는 계속되었다. 건물은 노회에서 교사 봉급은 정부에서 그리고 한국의 후원교회들의 손길이 닿는 대로 각종 책과 간식, 의류 등을 제공하여 학교는 운영되었고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 리무르노회와의 협력사역은 나록 아가페 청소년 재활센터이다. 나록은 리무르에서 1백2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중소도시로 맛사이 부족이 유목을 하는 건조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케냐 서부지역에서 나이로비로 올라오는 중간기점에 속한 도시라 각 지역에서 몰려온 고아와 가출 청소년들이 특히 많은 지역이다. 농촌지역의 고아들이 친척에 의해 돌보아지는 반면 도시지역의 고아나 무연고 청소년들은 거리를 헤매며 각종 범죄와 본드 흡입 등의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들을 수용해서 교육하고 직업훈련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취지이다. 땅은 정부에서 2에이커(8093.6㎡)를 제공하였고 건물은 한국교회(사랑의집교회:김삼수 원장)에서 지어주고, 운영은 노회가 맡아서 하기로 하고 건축을 마친 상태이다. 이런 과정에서도 재정의 집행이나 감독은 노회가 맡아서 하였다. 아직 노회의 재정이 여의치 않아 아이들을 수용하여 운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한국교회의 후원을 통하여 빨리 시작하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처음 약속대로 상호협력으로 이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으로 일이 더디어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에 있어서도 후원하는 교회의 이해와 인내가 필요하다. 빨리 눈에 보이는 결과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협력사역의 원칙을 깨는 것은 상호존중과 지속가능한 개발의 미래를 짓밟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력사역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비록 외국에서 온 선교사이지만 노회의 회원들과는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되었고 노회에서 정식으로 나를 총회 총대로 뽑아주어 노회대표로 총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처절하고 비참한 사회현실 속에서 전인적인 선교사역과 지역사회 개발은 절박한 요구이다. 동역하는 교회와의 상호존중과 복종을 통해 그들의 자부심을 키워주고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돕되 선교동역자인 우리들 자신은 완전히 뒤로 감출 때 그 사역은 지속되어 질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확장되어 간다고 나는 믿는다.





[땅끝에서온편지 5 ] 여전히 험난한 아프리카 선교사의 삶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9월 02일(화) 00:00

  
 
강도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박삼일 선교사를 방문한 세계선교부 총무 신방현목사.
 
케냐 이원재선교사

지난 5월 아내 진은현 선교사와 함께 한인교회 교사로 봉사하던 OOO자매의 장례식을 치르고 오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매는 모 선교단체의 단기선교사로 일년을 약정하고 케냐에 와서 오지를 다니며 어린이 사역의 장기선교를 꿈꾸고 있던 귀한 청년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서 불신자였던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왔었다. 자매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새벽 2시까지 식당 설거지 일을 하며 딸을 대학교육까지 시켰는데 어이없게도 자동차 전복사고로 이 땅에서 딸을 잃었다. 그녀와 함께 동승했던 단기선교 방문 팀의 고3학생은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봉사의 마음을 갖기 위해 왔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 자동차가 조금만 더 튼튼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들의 고귀한 죽음의 의미는 어떤 식으로든 폄하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들을 당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너무 서둘러 해외선교지로 젊은이들을 내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05년 9월 우리가 사는 집에도 20여 명의 떼강도가 들어왔다. 총기와 정글도(刀), 쇠망치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집을 때려부수고 들어와서는 숨어 있던 어린 딸들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며 돈을 요구하고 정글도로 나의 머리를 내리쳤던 그 끔찍한 밤의 기억은 아직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진흙 발에 무참히 짓밟힌 성경책을 보며 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던 아내와 아이들의 신앙의 용기에 감사하기는 했지만 3년이 다 된 지금도 우리 가족은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먼저 살던 리무르의 사택 대문 앞에서 행인 두 명이 지나가다 밤에 강도의 칼에 맞아 죽은 것을 보았고 우리가 이사한 후에 그 집 마당에서 강도 두 명이 사살된 사건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케냐에서 12년 동안 8번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중 두 번은 차가 전복되었거나 추돌사고로 폐차 처리되었고 한 대는 반파된 큰 사고들이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우리 신학교의 수위 아저씨도 강도에게 피살되었고, 교수 중에 많은 사람이 칼에 맞고 강도를 당했다. 우리 교단의 박삼일선교사는 얼굴에 총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서숙자선교사는 강도들에게 집 앞에서 납치되어 차에 태워져 끌려 다니기도 했고 김옥실, 고은임선교사는 차 안에 앉아 있다가 총을 들이미는 강도에게 모든 것을 털린 일도 있었다. 바로 우리 주변의 선교사 중 여러 명이 지난 몇 년간 이 땅에서 총에 맞고 강도를 당하고 다치거나 죽어갔다. 아프간이나 이라크에서조차도 선교사들이 이보다 더 많은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회교 국가들이 신변의 안전으로 볼 때는 훨씬 더 안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선교사들은 이런 환경에서 어린 자녀들을 키워야 한다. 그냥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국 부모의 가정에서 살고 미국 사람들의 선교사 자녀 학교에서 미국 교과과정으로 교육받고 아프리카 문화의 토양 속에서 자라난 우리들의 자녀들은 거쳐야 하는 정체성의 갈등과 불확실한 미래를 다독거리며 살아간다. 또 함께 사역하는 현지인 사역자들의 필요를 돌봐야 하며 고통당하는 이 땅의 교인들이나 이웃 사람들의 애환을 때로는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기도 하고 때로는 견제를 해야만 하는 정신적 부담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인지 오랜 경험을 가진 서양의 선교부들은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안식년 기간엔 반드시 정신과나 상담과의 심리치료를 받게 한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선교하는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리와 통제만이 아니라 적절한 돌봄과 위기상황에 대한 대책과 보호, 제대로 된 장비와 합리적이고 유연한 재정적 후원 체계일 것이다. 나의 경우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도움의 손길들이 답지해 위기의 상황들을 수습하고 그때그때 재적응 할 수 있었지만 이런 일들은 보다 제도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는 '선교사 파송 세계 2위 국가' 혹은 '선교사 10만 명 파송의 비전'과 같은 숫자나 순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수의 선교사를 보내더라도 전문성과 소양을 갖추고 사역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적확한 절차에 따라 보내고 필요한 장비와 안전 장치, 검증과 계속교육, 사후 관리와 복지를 고려한 선교사 파송 정책과 전략이 교단적 차원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춰진 상황에서도 사고는 일어나고 중도탈락자가 나오는데 이런 시스템조차 준비 안 된 상황에서 일단 파송하고 보는 식의 선교는 정말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땅끝에서온편지-完] 아프리카 선교 '아름다운 동역'을 꿈꾼다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9월 02일(화) 00:00

케냐  이원재선교사 

  
 
2007년 8월 본교단 총회장과 PCEA 총회장이 협약식을 갖는 장면.
 
2007년 8월 PCEA 18회기 총회장 데이빗 기띠(Rev.Dr.David Githii)목사님과 본교단 91회기 총회장 이광선 목사님이 참석한 가운데 양 교회 간의 선교 동역 관계를 위한 협약을 체결하고 양해각서(MOU)를 교환하였다. 우리 교단에서 PCEA 교단의 요청으로 선교 동역자를 파송한지 1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케냐에 첫 선교사를 파송한지 사반세기가 지나고 나서 이제야 우리 교단은 PCEA의 선교동역교단으로서 공식적으로 이 땅 케냐에서 사역하게 된 것이다.

본의 아니게 '침략자'가 되거나 이 땅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선교사역이다. 교회가 왕성한 이곳에 단지 자신이 속한 교단을 심기 위해 혹은 선교단체의 교두보를 설정하기 위해 선교사가 파송되어 오는 경우도 있다. 케냐의 유명한 국립공원인 암보셀리를 가다 보면 도로변에 큰 바위 위에다 한글로 'OO교회'라고 한국의 특정 지명을 써서 머릿돌에 새겨 넣은 교회를 본 적이 있다. 그 근처의 호텔에 투숙하기 위해 프론트 데스크에 갔다가 지배인과 주고 받던 말끝에 공원 입구의 교회가 한인교회냐고 진지하게 묻는 바람에 당황했던 적이 있다. 그 공원 가는 길에는 한국식 이름의 한글 교회 간판들을 여러 개 더 볼 수 있다. 물론 교회 건물의 기증자나 방문객, 단기팀의 편의와 자부심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할 일이다. 후대에 케냐교회는 과연 한국교회의 선교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리고 이들이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는 어떤 본을 따를까?

아프리카 교회와 한국교회의 선교동역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아프리카의 교회와 지역사회가 외국선교사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여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의 학교, 병원, 지하수 개발, 농업 개발, IT보급과 훈련 같은 지역사회 개발이나 사회복지사업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 선교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전문인 선교사 혹은 각 분야의 개발 전문가 출신의 목회자가 이 땅에 진정으로 필요한 선교사가 아닐까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선교사 간의 협력과 후원교회의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선교를 지양하고 선교지의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아름다운 희생이 아직은 너무 부족하다.

아프리카 선교에 있어서 한국교회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또 다른 형태의 선교동역은 평화를 심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대부분 부족갈등, 종교갈등, 경제갈등으로 귀결될 수 있는데 이는 내부적이기보다는 외부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여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여러 이해 관계가 맞물려 생긴 문제들이다. 우리는 적어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입장도 아니고 이들과 국제적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다는 장점을 잘 활용하여 융화와 화합, 화해와 이해의 선교를 펼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들의 생존과 개발, 번영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에 촉매로서의 역할과 계층과 종교, 부족간의 폭넓은 이해와 협력에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하다. 보수적 경향을 가진 아프리카의 교회와 한국교회가 '역라마단 기도 운동' 같은 방식으로 타종교를 자극하고 모욕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타종교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서 존중하는 방식으로 선교에 임했던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따름이 요구된다. 선교를 영적대결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시급하고 절실하게 요구되는 또 다른 선교동역은 나눔의 선교일 것이다. 나눔은 선교의 동기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확실하고 구체적인 증거이다.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시혜로서의 나눔이 아니라 동역교회를 높이고 지역사회를 살리는 나눔이 필요하다. 한 번은 강의 시간에 한 학생이 자기가 섬기고 있는 지역교회의 근처에서 사역하는 어떤 한국선교사가 매년 콘테이너로 물건들을 실어다 지역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바람에 자기교회 교인들이 그쪽으로 많이 갔다고 불평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좋은 마음으로 현지인들을 돕고자 했던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지역교회의 질서를 깨뜨려 폐해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 반면에 미국장로교회(PCUSA)의 경우 동역관계인 PCEA교단의 신학대학 건축을 위해 지난 3년간 2백만 달러를 후원하였지만 건축 과정이나 건축비의 집행과정에 선교사가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지금은 PCEA가 이 돈을 집행하면서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동력으로 스스로 이 대학을 잘 운영해 나가고 있다. 상당수의 한국교회나 선교사들은 현지교회에 대한 신뢰문제와 일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그 돈을 직접 집행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르는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왼손이 한 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듯 시혜자는 감추어지고 현지교회가 높임을 받아야 모두가 산다.

아프리카에는 아직 미전도 종족이 많이 있고 훈련되지 않은 명목상의 신자들이 많아서 교회 개척과 복음 전도, 제자화와 목회 지도력 개발이 계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것들은 현지 교회의 몫으로 남겨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교회가 이름을 내지 않고도 아프리카 교회가 잘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동역은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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