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폴란드 김상칠선교사(1~5회)

최고관리자 0 1,381 2020.06.21 19:10

그들과 같은 색깔, 향기를 가지는 것

[ 땅끝에서온편지 ] <1> 유럽의 중원, 폴스카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2월 25일(목) 10:01
폴란드 김상칠선교사 

  
"야훼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 125:1)
올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가장 큰 국경일인 성탄절 즈음에 40여 명의 동사자가 발생하더니 이제 그 수가 1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영하 30도까지 내려간 적이 있었지만 올해는 영하 25도에 수은주가 고정되어 있는 것 같다.

많은 분들이 폴란드 선교사라며 소개를 하면 어떻게 그곳을 가게 되었느냐는 질문과 동시에 지금까지도 폴란드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폴란드는 1998년 동유럽국가 중에 가장 먼저 사회주의를 버리고 민주화의 불을 지폈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웬사가 이끌었던 자유노조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만 사실은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폴란드 교회의 힘이 가장 컸다.

1998년 3월 7일 진주남노회의 세계선교부 파송으로 몇가지 옷과 등산용 식기를 넣은 배낭을 들고 네식구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폴란드 크라쿠프 땅을 밟았다. 1년동안 코펠에 밥을 해먹으며 옷 한 벌로 4계절을 버티는 가운데서도 날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새로운 기대 속에 신이 나있었다.

IMF의 영향으로 힘든 것도, 고국에 대한 향수의 외로움도 느끼지 못하며 그야말로 전투적으로 초기의 정착을 이루어 낸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거리나 공항, 은행 등 관공서에 기관총을 맨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과 무표정한 폴란드인들의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 생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3천8백만 명의 인구에 국토는 한반도의 1.5배의 면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90퍼센트 이상이 평야로 되어있어 활용 면적은 몇 배 더 많다고 봐야 한다.

  
▲ 폴란드 전통의상을 입은 여인들. 선교는 현지인들과 같은 색깔이 되고 같은 냄새를 풍겨나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인접해 있는 국경은 서쪽으로는 독일과 체코, 남쪽은 슬로바키아, 동쪽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백러시아), 리투아니아, 북쪽은 러시아와 발틱 해를 건너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인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를 만날 수 있다. 현재 EU 가입국가로 경제와 정치 그리고 지리적 요건으로 중앙유럽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선교초기에는 국민소득이 5천달러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1만 7천달러를 넘는다. 또한 서유럽과 동쪽에 위치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비롯한 발틱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을 연결하는 선교의 허브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유럽의 중원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겪은 작은 문화충격을 소개하고자 한다.
24시간 문을 열고 있는 한국의 가게와 달리 이곳은 오후 5~6시가 되면 상점이 모두 문을 닫는다. 목요일 저녁부터 부활절 연휴가 시작되는 것을 모르고 있던 우리는 빵과 물을 얻지 못해 월요일이 될 때까지 무척 고생했다.

월요일 아침 일찍 가게에 가던 길에 양동이와 물병을 손에 든 폴란드 청소년들과 마주쳤는데 우리를 옆으로 훔쳐보던 아이들이 서로 보며 웃더니 갑작스럽게 물세례를 퍼부었다. 온몸이 물에 젖었지만 목사로서 화를 낼 수 없는 터라 웃고 넘기려니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으면 후일에 우리 아이들이 같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혼을 내주기로 하고 고함을 치며 잡으러 갔는데 한 시간여를 따라 다녔으나 결국은 잡지 못했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고 어설프게 아이들을 혼내지도 못하고 오히려 화만 불렀으니 그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어렵게 방을 구했는데 다시 이사해야 하는지 너무 고민이 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찾아온 유학생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웃으며 하는 말이 부활절 다음 월요일은 성수세일로 물을 뿌려 죄를 사하는 풍속이 있는 날이라고 알려주었다. 그것도 예쁜 여자에게만 물세례를 준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좋다고 물을 뿌렸는데 처음 듣는 이상한 말을 외치며 잡으러 오는 동양인(그 당시만 해도 크라쿠프에는 동양인을 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그 아이들은 아마도 그 날 마음 고생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심각한 일이었다. 선교지에서의 정착은 많은 충격들을 흡수하며 그들과 같은 색깔이 되고 그들과 같은 냄새를 풍겨야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희망이 시작되기를'

[ 땅끝에서온편지 ] < 2 > '루무노비'와 '요한 바오르 2세의 아이들' 폴란드 김상칠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3월 02일(화) 17:12
지구촌 최대의 홀로코스트 현장인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는 독일식 발음) 유대인 수용소가 크라쿠프에서 불과 6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곳 도심 한복판에는 아직도 유대인들을 격리했던 게토의 담벼락이 남아있고 쉰들러의 공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모두들 게토가 비인간적이며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상 게토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전에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양반과 천민의 사회가 사라졌다하지만 더 비참한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폴란드의 민족 격리정책이라는 기사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6백만 명의 사람들이 현대판 게토에 갇혀 일반인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폴란드에는 여러 군데의 게토지역(빈민가)이 있는데, 우지 시내에 있는 게토 초입에는 "여기서부터 법은 끝난다"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사진은 크라쿠프 시내에 있는 게토.

폴란드의 청소년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게토지역에 살고있는 '루무노비'(하얀 피부를 가진 흑인)와 보통 청소년으로 나눌 수가 있다. 폴란드에는 아직도 이러한 게토가 여러 군데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우지 시를 들 수 있는데 우지 시내에 있는 이들의 거주지 초입에는 "여기서부터 법은 끝난다"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어 경찰의 공권력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무법지대이다. 이들은 사회보장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며 소망이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주로 마약 밀매와 도둑질을 하며 마약(우리나라 돈으로 1천원 안팍이면 마약을 구할수 있으며 주문시 피자보다 빨리 배달이 된다)과 알코올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다.

사진으로 두 부류 젊은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눈빛부터가 다르다. 이 두 청소년들이 서로 마주칠 수 있는 것은 평생에 2번이라고 한다. 첫 번째의 만남은 슬럼가에 살던 아이가 금품을 강탈하기 위해서 접근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하기 위해 대질하는 경우라고 한다. 폴란드 정부와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땅히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여러 선교단체에서 체육활동을 위한 재활교육을 연구하며 실시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마워폴스카 지역의 일반 청소년들은 '요한 바오르 2세의 아이들'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고등학생들로 기본적으로 2~3개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올림피아드 대회의 입상과 재학 중 해외로 교환학생을 나가며, 오케스트라 단원의 일원으로 기본적인 악기를 다룰 줄 알고 교외생활에서도 자신의 관심분야에 전문적인 지식과 실력을 쌓아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유럽연합에도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울 정도로 촉망받고 있다.

폴란드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이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현 상황에서 폴란드의 교회들은 어떻게 해야 민족격리정책이라는 게토를 무너뜨리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야 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매우 힘들어 하고 있다. '98%가 가톨릭 신자인 폴란드에 선교사가 왜 필요한가?'라며 선교 자체를 부인하는 가톨릭교회의 목소리 뒤에는 이런 아픔이 감추어 있다. 반면 아직 0.5%도 안 되는 개신교회들의 외침이 EU통합 이후 서서히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더욱 커져가고 있다. 아직도 귀족 문화가 생활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폴란드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게토가 허물어지길 기도한다.

우리 자녀들이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도구를 습득케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선행되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자녀들의 심장 속에 그리스도의 심성을 심어 복음주의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히틀러와 빌리 그래함을 보자. 똑같이 청중을 사로잡는 웅변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빌리 그래함은 교회의 대부흥과 영적 각성을 이루어낸 반면 히틀러는 민족과 세계인류에 절망을 뿌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좋은 도구를 취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지 못하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 경제의 자립과 소수의 능력자보다 다수의 소외된 이들을 먼저 돌보고 이들의 편에 서서 함께 하는 폴란드 교회가 되도록 강력한 기도의 동참을 청한다.








차가운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 땅끝에서온편지 ] <3> '거지'에도 서열이 있다 폴란드 김상칠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3월 11일(목) 10:32
  
▲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폴란드 노숙자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일자리를 잃은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오늘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거리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계속되기를 기도한다.

폴란드인들은 크라쿠프를 가리켜 폴란드안의 또 다른 왕국이라고 말한다.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는 귀족들을 위한 도시로, 도시 내에 평민이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을 지정했었다. 평민들을 위해서는 크라쿠프 외곽에 노바후타(새로운 도시)라는 거주지를 만들었고, 마부 하녀를 비롯한 평민들은 매일 크라쿠프로 출퇴근을 했었다고 한다.

2002년에 시작한 선교사역 중 집시와 노숙자들을 위한 거리사역이 있다.
대부분 노숙자 쉼터를 거부하고 중앙역 지하나 폐수가 흐르는 하수구 곁에서 잠을 청하는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된 이들과 일자리를 놓치고 실업자가 된 이들을 위해 점심을 제공하고, 겨울에는 침낭을 나누어 주는 일이다.

처음 급식사역을 시작할 때는 점심 한 끼를 나누어 주는데 3~4시간이 소요되었다. 영하 15~20도를 내려가는 날씨에 오랜 시간을 야외에서 서있는 고통은 참을 수 없을만큼 힘들었다. 이들의 주식인 간단한 빵과 음료수를 나누어 주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된 이유는 급식시간이 되면 모여드는 노숙자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정작 음식은 받아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모두 흩어지면 급식을 마치고 우리도 돌아올 수 있을텐데 몇 걸음쯤 떨어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두고 돌아올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우리가 음식을 들고 찾아가 나누어 주면 절대로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동양인에게 음식을 얻어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먼저 음식을 받아간 노숙자들은 크라쿠프의 외곽이나 다른 도시에서 온 이들이고 주위를 맴돌며 우리를 괴롭힌(?) 이들은 크라쿠프에 살고 있는 노숙자들이었다. 이들 세계에도 귀족과 평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서열을 따진다는 것이다. 거지에도 귀족과 평민이 나뉘어져 있단다.

8년이 지난 지금은 산처럼 높던 자존심을 버리고 한 식구가 되어 동양인이라며 무시했던 나에게 "줄 좀 제대로 서라"는 꾸지람을 들어도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거지 대장으로서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고마운 것은 음식이 부족할 때에 서로 다투지 않고 양보하는 마음들이다. 비록 적은 양의 음식을 받아도 한결같이 "부크푸아치(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헌옷을 모아 나눌 때도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아무리 새 것이라도 욕심을 부리지 않고 놓고 간다. 간혹 보이지 않아 궁금해 하던 노숙자들이 거리에서 좌판을 놓고 작은 사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큰 기쁨을 얻기도 한다. 또한 이들에게 음식준비에 보태라며 동전 몇 닢을 건네받을 때는 어느 헌금보다도 큰 것으로 여겨 거절하지 않고 받는다.

거리사역을 하면서 때로는 딜레마에 봉착할 때도 있다. 지난 번에 준비한 음식이 부족해서 이번에는 많은 양을 준비했는데 노숙자가 예상외로 적게 모여 준비한 음식을 버리게 되기도 하고, 반면에 매번 많은 노숙자들이 몰려들어 정신없이 배식을 하고난 후에는 한편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노숙자 사역을 하면서도 하루 빨리 거리에 노숙자들이 없어져야 진정 좋은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들이 노숙자가 되는 많은 이유 중 한 가지를 들면, 폴란드가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유럽연합에 속하면서 서유럽의 기업들이 속속 폴란드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 폴란드에서의 외국어는 독일어나 러시아어였는데 이제는 영어를 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퇴출을 당하게 되었다.

4~50대에게 새로운 언어와 컴퓨터를 습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새로운 직장을 얻지 못하면 세금을 낼 수 없고 연금 혜택에서 제외되고 만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집을 떠난 이들이 돌아갈 길이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복지국가란, 제도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천국일지 몰라도 제도 밖으로 밀려난 사람에게는 냉정한 지옥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음식은 하늘이다. 부자라고 다 가질 수 없고 가난하다고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어느 누구도 배고픔을 면할 권리는 가지고 태어났건만 오늘도 굶주림에 시달리며 영하의 날씨에 신문지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하는 이웃이 있다. 주님께서 이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길 소망한다.









<4>폴란드에서의 로마 가톨릭

[ 땅끝에서온편지 ] 폴란드 김상칠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3월 18일(목) 10:14

 집 나간 자식들이기 때문에?

폴란드에서 기독교의 시작은 10세기경으로 본다. 대부분의 유럽국가와 비슷한 양상으로 제왕과 제단의 관계가 맺어졌지만 폴란드의 경우에는 좀 특별한 점이 있다. 출발 시점부터 크라쿠프에 로마가톨릭 대교구가 생길 정도로 세가 막강했으며 모든 권력자들은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서 민족과 함께한 흔적들이 깊이 남아있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영향은 폴란드 모든 시대의 역사를 구성하고 문화를 형성하는 요소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폴란드를 대표하는 기념물의 대부분과 민족의 문화는 로마가톨릭의 종교성과 연결되어 있거나 그 성향을 띄고 있는 것들이다. 이 영향은 생활 속 깊이 자리하고 있어(의복, 문화행사, 국경일, 전통행사 등) 이들의 사고와 삶에 고착화 되어버렸다.

  
▲ 쳉스토호바시에 있는 가톨릭교회 성지인 '야스나구라'성당을 향해 순례하는 폴란드인들.

앞부분에 폴란드에는 3개의 수도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중 종교적인 수도를 상징하는 쳉스토호바시에 가톨릭교회의 성지인 '야스나구라'라고 불리는 성당 안에 블랙마돈나의 그림을 전시해 놓고 있다. 이 그림에는 폴란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피를 흘리기도 하고 기적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해마다 5월 30일부터 8월 14일 기간내에 초등학생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폴란드 전역에서 쳉스토호바의 블랙마돈나를 만나기 위해 1주일 때로는 20일 동안의 순례의 길을 떠난다. 멀리는 5백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그다니아에서부터 출발한 이들은 공원이나 마구간에서 노숙을 하며 매일 30킬로미터 가량을 걷는다. 이 기간 동안 음식을 자제하며 기도와 고행을 통해 헌신하는 신앙을 고백하는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순례객의 규모로 따질때 세계에서 다섯번째라고 하는데 마치 이스라엘 청소년들이 마사다를 오르듯 민족의 성지를 향한 대이동이 시작된다. 폴란드인들에게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신앙을 떠나서 이들의 민족혼이 되었다. 동유럽 시절의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폴란드 교회는 위축되기 보다는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으며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를 배출할 정도로 경건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과 민족의 혼이 1989년 자유의 불씨로 옮겨져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폴란드의 귀족주의를 존속시키고 학교교육에 깊이 간여하는 등의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하다.

우리가 겪었던 예를 들어보면, 개신교 목사들이 기드온 협회에서 발행한 작은 신약성경을 초ㆍ중등학교에 배부하기 위하여 교장과 면담 약속을 하고 방문했는데 어제만 해도 매우 긍정적이며 협조적이었던 교장의 태도가 돌변해 최종적으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전했다. (폴란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학교에 가톨릭의 교리과목이 들어있다) 젊은 교리 교사를 만났지만 대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작은 예이지만 폴란드에서는 "모든 일의 끝에는 신부와 수녀가 있다"는 암묵적인 말이 있다. 교장 위에 신부, 건물주인 위에 수녀, 공공기관, 정치인,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초법적인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모든 학교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교회학교였고, 18세기까지는 예수회에서 운영했으며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 의한 종교수업을 의무화하고 있다. 교실마다 붙어있는 십자가를 볼 수 있으며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나 교장, 모든 직원들은 교회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학기의 시작과 끝은 학교에서 시작하지만 최종적으로 전교생이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면서 실질적인 행사가 마무리 된다.

개신교에 대한 핍박도 교회적인 차원이 아니라 행정적인 상황에서 이뤄진다. 얼마 전 한국과 폴란드 아카데미 회원인 팔로비체교회에서 주민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고자 지역 문화원 사용허락을 시청에 요청한 적이 있다.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되어있어서 처음에는 순순히 허락을 하는가 싶더니 행정적인 절차를 진행하면서부터 스스로 포기하도록 하는 제제가 가해졌다. 진행하려는 프로그램에 명시된 음악이외는 연주할 수 없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 이외는 할 수 없다는 공문과 함께 정확한 사용시간 등과 관련한 압박이 가해졌다. 한마디로 '너희들은 집나간 자식들'이라는 것이다.

숨 쉬는 것조차 감시한다는 가톨릭교회의 권세 아래 폴란드에서 '예수님의 이름'이 당당히 선포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와 관심을 요청한다.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라

[ 땅끝에서온편지 ] <5> 마리아 숭배사상- 폴란드 김상칠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3월 25일(목) 10:55
폴란드 여성들은 인근 국가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것 같다. 지나치기 쉬운 '여성의 날' 행사가 이곳에서는 마치 명절을 연상케 하듯 진행된다. 이날에는 남학생들이 모든 여학생의 이름을 적어 학교 벽에 예쁘게 장식하여 붙이고 선물들을 준비해 여학생들을 기쁘게 한다. 만약 이를 소홀히 여기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학생은 크게 따돌림을 받을 정도이다. 어쩌면 폴란드에서는 오히려 남성들이 성차별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끼리 주고받는 말 중에 "어린아이와 남자는 같다"는 유행어가 있으며 중요한 일은 남자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폴란드가 유럽연합의 국가가 되면서 남성들의 활동과 경제력이 앞서가며 여성의 자리를 남성들이 많이 대체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여성의 위치는 막강(?)하다. 
이러한 분위기는 17세기부터 시작된 마리아 숭배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 폴란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마리아 숭배 사상은 선교사역에 있어 넘어야 할 과제이다.
마리아 숭배사상은 앞서 말한 쳉스토호바의 파울리누프 수도원(성 바울 수도원)에 있는 블랙 마돈나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마리아 숭배사상은 폴란드가 영토를 빼앗겼을 때나 공산치하에서도 더욱 강해졌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사건에서 보자면, 1656년 4월 1일 얀 카지미에쉬 대왕이 르보브 성당에서 마리아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엄숙하게 선언한 바 있고, 공산주의 시대에서는 스테판 비쉰스키 추기경이 선서를 통해 이를 재확인했다.

폴란드 각 가정에는 예수님의 그림보다 마리아의 그림이 더 많이 걸려 있으며 마리아를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철저하게 믿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항상 마리아의 기도문을 읽어주며, 스스로 마리아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친다. 

폴란드의 마리아 숭배사상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심화된다. 각 교구에는 반드시 마리아 숭배센터가 있고 이곳은 성지 순례와 지역의 축제를 지휘하는 수천 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에도 마리아 숭배사상의 모습들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초등학교에서는 달을 밟고 있는 마리아의 그림을 그리는 대회를 개최하고(이 그림을 '클로바 니에 비오스'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마리아가 하늘의 여왕'이라는 것이다.) 모든 폴란드 교회의 벽화에는 블랙 마돈나의 그림이 빠지지 않으며 폴란드의 문학과 역사 그리고 지방의 특성을 발간하는 책자에도 마리아를 향한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마리아 그림의 사본들에 대해 대관식(그림의 머리 부분을 황금 관으로 장식하는 것)을 거행하는데 보통 그 지역의 주교가 담당하나 상위의 추기경이 방문하게 되면 다시 대관식을 치른다. 가장 큰 대관식은 물론 교황이 집례한다.

히 5월과 10월은 마리아를 기념하는 특별예배를 매일 드리는데 이 예배만큼은 평신도가 인도해도 된다. 이런 예배는 마리아상이 있는 곳에서는 어는 곳이나 가능하다. 즉, 큰 건물의 외벽에 마리아상이 있거나, 마을 어귀에 서낭당 같이 세워진 카플리츠카(Kapliczka)라고 부르는 작은 기도처에서도 예배를 드린다.
경관이 좋은 골짜기나 명승지에는 어김없이 마리아상이 세워져 있으며 촛불을 피워 숭배하고 있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들의 정서에 깔려있는 기복적인 신앙이 폴란드 개신교회 신자들에게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90% 이상이 가톨릭에서 개종한 교우들인데, 기존 제도에 대한 개혁적 성향이 강한 반면에 아직도 걸러져야 할 부분도 많다. 개신교회가 1%도 되지 않는 갓난아기와 같은 연약함도 우리의 마음을 바쁘게 한다.

또 하나 조심스러운 걱정은 개신교회에 결혼적령기를 놓친 노처녀가 늘어나는 현상인데 이것은 같은 신앙을 가진 남성을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어서이다. 교회 안에서도 여성의 활동이 매우 강해서인지 남자 교우들의 수가 매우 적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순한 신앙이 문화와 환경에 동화되지 아니하고 순결함을 간직할 때 강보에 싸인 어린 아이 같은 개신교회가 이제 곧 걸음마를 시작할 것이고 이내 달음질 칠 것이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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