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기독교 박해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 온 편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8년 12월 17일(수)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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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바망갈라교회 개척지에서 열린 주일 성탄행사 모습. |
2 . 평화의 크리스마스를 바라며
성탄 전야와 아침에는 교회와 곳곳에 세운 간이천막 안에서 성탄찬양과 촛불 예배 등을 드리며, 어린이들에게는 무르끄(한국의 꽈배기와 비슷한 인도의 전통 과자)가 든 과자봉지나 케이크 등을 나눠준다. 추수감사절 때처럼 시골에서는 헌금 대신 아직도 양 새끼와 닭 등의 성탄 헌물을 드리며, 예배후에는 헌물된 가축들을 경매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지금은 없어진 한국의 옛 풍습처럼, 성탄절 낮에는 교인들 각자 집에서 만든 성탄 과자를 그릇에 담아 이웃을 찾아가 성탄 인사와 함께 나누어 주며, 저녁에는 이웃을 초청하여 교회학교와 청년들이 정성껏 준비한 성극과 찬양, 율동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함께 즐긴 후 참석한 사람 모두 성탄 식사를 함께 나눔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안타까운 것은 성탄 때 교회에 제법 나오던 사람들이 축제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 부활절이 될 때까지 썰렁하고 허전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힘든 것은 청소년들이 곳곳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 외양간과 성모와 아기 예수의 모형을 만들어 마치 힌두교인들이 우상을 섬기듯 하며, 어린아이들까지 확성기의 볼륨을 최대한 올린 채 밤새 퇴폐적인 영화를 흉내내어 고성방가와 신들린 듯 광란의 춤을 추는 모습이다.
'괴로운 밤, 시끄러운 밤(?)'을 견디다 못해 그들을 찾아가 타이르면 순순히 듣는 것 같다가도 잠시 후면 또 다시 이 짓을 되풀이 한다. 더 이상한 것은 다들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막상 누구 한 사람 그들을 나무라거나 타이르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올해에는 연속적인 테러와 뭄바이 사건으로 테러리스트들이 찬양팀으로 위장하여 침투할까 봐 저녁 9시 이후에는 모든 집회와 캐롤 라운드마저 금지되어 비교적 조용한 성탄절이 될 것 같다.
극우 힌두정당인 바랏 자나타 파티가 정권을 잡은 1998년의 성탄절은 힌두교로 재개종을 요구하는 바즈랑달을 비롯한 31개의 극우 무장 힌두단체들에 의하여 수백 개의 교회가 방화, 파괴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아 살해된 '블랙 크리스마스(Black Christmas)'로 알려졌다.
이 박해로 1999년 1월23일에는 호주의 그라함 스테인 선교사가 그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산채로 불에 태워져 순교 당했고, 계속해서 많은 선교사들과 현지 전도자들이 무참히 살해되고 있다. 대도시의 큰 교회들마저 연쇄적으로 폭파 당했고 극우 힌두무장단체인 'RSS'는 2000년 10월 3일 정부에 선교사들을 모두 내 쫓고 인도교회가 중국의 삼자교회처럼 외국 교회 및 바티칸과도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도록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23일 오릿사주 간다말 지역의 교회를 공격하여 1백7개의 교회와 수천 명의 교인들 집을 방화하여 파괴하며, 최소 7명의 교인을 살해한 폭동의 주모자인 힌두 스와미 락시마난다 사라스와티와 그의 제자들 4명이 금년 8월 23일에 낙살라이트(공산 폭도 단체)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공산 폭도들이 자신의 소행이라 주장했고 이를 인정한 경찰 수사 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VHP'를 비롯한 힌두국수주의자들은 교인들이 저들을 살해했다는 구실로 무자비한 피의 보복을 감행, 지금까지 정부 발표의 10배가 넘는 5백여 명의 교인들이 살해당했고, 수천 채의 교인 집들과 수백 개의 교회들이 파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인도의 실리콘밸리 또는 창으로 알려진 뱅갈로는 IT 업체를 중심으로 외국기업들이 가장 많이 들어온 지역으로 인도의 바티칸이라 할 정도로 2백 개가 넘는 수도원과 2백50여 개의 수녀원들이 몰려 있고, 비교적 교회의 핍박이 적어선지 수백 개의 선교단체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5월 선거에서 남인도에서 최초로 힌두 정당이 정권을 잡자마자 교회의 핍박이 표면화되어 9월에만 카르나타카주에서 20여 개의 교회가 예배중 습격을 당했고, 뱅갈로에서도 9월 14일 주일에만 세 개처의 교회가 습격을 당했다.
7월에는 마이소르 근교의 한인 선교사의 사역지가 힌두 과격파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필자와 한인 선교사들이 가장 많은 뱅갈로에는 한인들이 세운 신학교 등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경찰들이 한동안 와서 머물거나,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며 선교사들의 신분이 노출됨으로 폭도들에게 습격을 당하거나 또는 정부로부터 추방당할 위험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헤롯왕의 어린이 학살과 같은 연속적인 무차별 살상의 위협과 경제적 위기, 치열한 정치, 계급, 종교적 충돌 속에서도, 이번 성탄절을 맞아 인도의 모든 영혼들이 동방박사와 목자들 같이 다시 오실 주님을 찾아 귀한 예물로 드리고, 시므온과 안나처럼 경건과 기쁨으로 화목제물로 오신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며, 재림하실 예수에 대한 소망과 약속 위에 믿음으로 굳게 서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함으로,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파하여 모든 족속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고, 온 누리에 진정한 화합과 일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 드리며, 이곳 그리스도 은혜 선교회(C.K.F)의 모든 동역자들과 성도들을 대신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성탄 인사를 드린다.
인도 이용범선교사
인도의 '그린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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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18일(목) 15:19
인도 이용범선교사
인도는 축제의 나라이다. 특히 힌두교는 통일된 예배의식이나 교리, 직제 등이 명확히 없지만 축제를 통해 종교적 일체감을 공유한다. 계절의 변화가 없는 이곳에서 축제마저 없었더라면 세월의 변화를 전혀 가늠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생일은 알면서도 정확한 나이를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필자도 인도에 살면서 철없는 아이처럼 계절과 나이마저 잊고 사는 것 같다.
더운 건기가 지나 몬순이 한창인 8월부터는 힌두 축제가 계속된다. 지혜와 재물의 신으로 알려진 코끼리 우상을 만들어 물에 빠뜨리는 가네샤 자얀티(생일)로 시작해서 아유드부자(각종 연장, 기계 차량 등에 드리는 예배), 다사라(라마신이 라바나를 이긴 승리의 축제), 두르가(시바신의 부인중 하나로 열개의 팔을 가진 힘의 여신)부자(예배) 등등, 그야말로 만신전이란 말에 걸맞게 각종 축제 기간에는 그에 따른 우상들의 다양한 패션으로 홍수를 이룬다.
몬순이 끝날 무렵인 10월과 11월 중순 사이에 가장 큰 힌두축제인 디발리(빛의 축제)에는 마치 각종 포화가 작열하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란의 폭죽놀이가 10여 일간 계속되며, 공중의 까마귀 떼들과 길거리의 개들도 놀라서 이리 뛰고 저리 날며, 특히 인도에 처음 온 어린이들에겐 수난과 공포의 축제로 기억된다.
이에 질세라 가톨릭에서도 아기 예수 축제와 성모 생일로 알려진 성마리아 축제, 벨랑가니 축제 등이 열려 많은 사람들이 주황색 옷을 입고 성모상과 악대를 앞세우고 거리를 메우다시피 행진을 한다. 마리아상이 이적을 행했다는 벨랑가니로 수십만의 순례객들이 몰려들어 힌두교도들처럼 머리를 짤라 성당에 바치기도 한다. 혼합종교의 색채가 강해 많은 힌두와 무슬림까지 성 마리아 축제에 참석해 대 성황을 이룬다.
금년 10월 무슬림의 람잔(라마단)에 이어서 12월 9일 바크리(희생의 축제)와 함께, 내년 1월 중순까지 41일간 금욕과 고행을 행하는 순례 계절이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대강절에 이어 다가오는 인도의 성탄은 '그린 크리스마스'이다. 남인도의 야경을 이국적이며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야자수 사이 사이로 찬란한 왕별(?)이 하나 둘 씩 스카이 라인에 떠오르면, 바야흐로 인도의 성탄 축제의 막이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다.
4백50년간 포르투칼의 지배를 받다가 1960년대 인도에 반환된 고아에서는 12월 첫 주일을 인도의 사도로 알려진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축제일로 지키며, 이 축제는 AD 52년에 인도에 와서 72년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 성 도마 축일(12월 셋째 주일)에 이어 성탄 축제로 연결된다.
인도의 성탄절은 집집마다 대나무로 별의 5각중 밑부분을 유난히 길게 틀을 만들어 얇은 흰 종이를 씌우고 안에는 밝은 등을 켜서 야자수나 지붕 위에 달게 되는데, 이 큰 별은 마치 캐롤 팀을 환영하여 자기가 걸린 집으로 오라고 손짓하여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별을 단 성도의 집을 방문한 교회의 캐롤 팀들은 문밖의 거리에서 먼저 타블라(인도의 전통적인 타악기로 큰 북과 작은 북이 한쌍을 이룸)와 하모니움(휴대용 손 풍금)의 반주로 템포가 빠른 이곳의 토착적인 캐롤을 몇 곡 부른 후, 안으로 들어가 동행한 목사나 인도자가 성탄 메시지를 전하고, 그 가정을 위하여 축복 기도를 드릴 때 헌금을 하며, 미리 준비한 다과 등을 대접하곤 한다. 때로는 힌두들이 교회 캐롤팀을 초청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왜 밤중에 시끄럽게 하느냐며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다.
이때만큼은 평소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청년들도 열심히 참여하며, 이렇게 2~3주간 계속하다 보면 너무 힘들고 지쳐서, 내년에는 중단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적도 있지만 이때가 바로 아기 예수님 탄생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만민에게 전하는 소중한 기회로 생각되어 해마다 대심방처럼 성도와 유치원 어린이들의 가정을 순방하고 또 양로원과 고아원, 재활원 등을 방문하곤 하지만 올해는 테러로 이마저도 힘들 것 같다.
나는 왜 인도로 갔는가 (上)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8년 12월 22일(월)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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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뱅갈로선교관에서 특송을 하는 이용범 노은경 선교사. |
'달마는 왜 동으로 갔는가?'의 반제(反題)로 '나는 왜 인도로 갔는가?'로 잠시 생각을 돌이켜 본다. 인도 선교를 처음 생각하게 된 것은 1984년 9월 21일, 금요일 오후였다. 인도 출국을 며칠 앞둔 김영자 선교사와 당시 영락교회 전도 II부(해외 선교)를 담당했던 이명일 목사와 김 선교사의 환송오찬을 교회 인근의 파인힐이라는 식당에서 함께 했던 자리에서였다. 김 선교사가 1984년 초부터 교역자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해 왔으나, 그 때까지 마땅한 선교사를 구하지 못한 어려움을 이 목사가 설명하다가 갑자기 "이용범 전도사님이 어떻습니까?"하고 김영자 선교사에게 물었다. 그때 김영자 선교사는 의외란 듯이 "이 전도사님이 선교사로 나가려 할까요?"라고 반문했다.
뜻밖의 반문에 당황했던 그 순간에 이 목사는 "이 전도사님은 평소부터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기도하며 준비해 왔어요. 그런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하는 것이었다.
김영자 선교사가 "정말이세요?"라고 물어서 "예! 선교사로 나가려고 준비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만…, 인도 생각은 미처 못해 봤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럼 지금부터 인도를 위해 기도하신 후 대답해 주세요"라고 했다. 이 목사도 "이 전도사님이 인도에 가시면 좋겠습니다. 두 분이 함께 협력선교를 하시도록 돕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인도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기도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신학교 입학 후, 몇몇 동기들과 날마다 수업 전에 기도탑에 올라가 남미 복음화를 위해 팀선교를 하게 해달라던 철없는 기도가,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는 철든 기도로 변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인도로 오라는 도전에 선뜻 응하지 못하고 도피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했지만, 솔직히 그때까지 인도에 대하여 잘 몰랐던 데다가, 아직 기도와 준비가 부족하여 갑작스런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감격보다는 두려움이 앞선 것 같다.
김 선교사의 출국 후, 인도로 가기 위한 진지한 숙고와 기도는 커녕, 의식적으로 인도에 대한 생각 자체를 지워버리고, 때마침 브라질, 미국, 호주 등에서 선교사로 오라는 요청을 차분히 검토하려 했지만, 인도를 피하면 피할수록,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온통 인도에 관한 것으로 사로 잡으시는 강권적인 주님의 섭리를 체험하며 인도로 인한 마음의 고통이 크게 더해졌다.
1984년 10월 31일 당시 인디라 간디수상이 시크교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한 보복으로 인도 군대들이 시크교의 성지인 암리차르 황금사원에 침입하여 수천 명의 시크교도들을 학살한 충격적인 사건의 보도가 차츰 잦아 질 무렵, 12월 3일 인도의 중심부인 보팔에서 미국계 유니온 카바이드회사의 유독가스 유출 사고로 수천명이 죽고 수만 명이 중독된 대형 사고가 다시 일어나 날마다 신문 지면과 TV화면에 인도에 대한 뉴스로 채우심으로, 다시스로 도망치려는 요나를 니느웨로 되돌리신 그 분께서 인도로 꽉 붙잡아 매시는 것 같아 전율케 하셨다.
각종 매스컴들이 계속 인도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들과 대형 사고들을 보도함으로 인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붙드시는 주님의 강한 손길로부터 도망치려 안간힘을 썼지만, 읽는 책들도 어느 틈엔가 간디와 마더 테레사, 인도의 사회와 종교, 역사, 지리 등을 소개하는 책자들로 바뀌었고, 무심결에 인도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할뿐 아니라, 1984년 12월 이명일 목사가 동남아 선교지를 거쳐 인도의 마드라스와 이롯 지방을 순방 후 그 곳 소식을 소상하게 전해 주었을 때, 질병과 가난, 끊임없이 계속되는 재앙속에서 인도인들이 '어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 손짓하며 부르는 듯, 마음이 뜨거워지는 자신에 스스로 놀라고, 연말에는 너무 괴로워 3일간 금식 기도를 마친 후 집에 돌아와 85년 새해에 식구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 때, 작은 아이 아람이가 "아빠! 우리는 미국으로 가자" 하는 말을 듣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 가서 편하게 지내겠다는 생각은 결코 해 본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인도에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은연중 더 편한 나라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숨겨진 마음을 들춰 낸 것 같아 하나님께 두려웠고 자신에 대한 수치심마저 일어났다.
그래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살고 예수도 잘 믿으며 인구는 2억5천만인데, 인도는 가장 가난하고 예수도 거의 믿지 않지만 인구는 미국의 세배가 넘는 7억 5천만이나 되는 가난한 나라"라고 다시 설명을 한 후 "어디로 아빠가 가야 하겠냐?"고 물었다. 그 때 큰아이 보람이가 "아빠! 그럼 인도로 가야지요"하는 대답을 듣는 순간, 제 마음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기쁨이 넘쳤다.
복음은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진리인데도 순종보다 엉뚱한 핑계로 도피하려 했던 것을, 주님께서는 철없는 작은 두 어린 것의 입술을 빌어 자신의 숨겨진 속내를 들춰내며 회개의 영을 부어 주셨고, 자신의 음성보다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토록 마음의 눈과 귀를 밝혀 주셨다.
인도 이용범선교사
감사와 평안함으로 변한 인도행 [ 땅끝에서온편지 ] 4 .나는 왜 인도로 갔는가 (下)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8년 12월 29일(월) 17:20 | | | ▲ 인도 현지 크리스마스 예배 모습. |
인도 이용범선교사 도마가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고, 3백여 년의 영국 통치기간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러 갔으나 기독교가 미약하여 7억이 넘는 인구가 가난과 질병, 계급제도의 멍에와 우상숭배에 시달리고 있는 인도를 생각할 때마다 김영자 선교사를 도와서 빨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사람은 국내라면 어떤 오지나 낙도라도 마다 않고 따라 가겠지만, 인도에는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신학교 입학 때도 목회자의 삶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며 신학교 입학을 반대했다가 차차로 마음을 돌이켰던 것을 기억하고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은 주님과 남편, 가족의 뒤를 따르리라 믿고 기도를 계속했다. 1985년 2월 총회 선교사로 선발된 후에도 다시 주님께서는 시험과 연단을 통해 인도 선교를 위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셨다. 인도의 입국과 장기체류가 어려워 학생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오랜 기간 기다리던 중, 집사람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과 동역자들로부터 '왜 하필이면 선교가 금지된 인도에 가서 고생하려는가', '국내에서 사역하며 선교사를 후원하면서 조실부모한 후 온갖 사랑으로 키워주신 90이 넘으신 조모님을 모시는 것이 장손의 도리가 아닌가'하는 사랑의 권면(?)을 받으면서 인간적인 정리를 끊는 어려움을 통해 갑자기 선교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목회자가 아니라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고 그렇게 가기 싫던 인도 선교사로 이미 선발까지 되었는데 뒤늦게 선교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다니 누구에게 드러내놓고 의논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서정운교수가 들려준 곽안련선교사의 이야기와, 영어 성경을 함께 공부하던 청년부 손옥순자매를 통해 박영희선교사도 막상 파송을 받을 때 두려워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만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고난주간 철야기도를 인도하며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주님의 기도를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셨지만, 집사람의 고집은 수그러지기는 커녕 불순종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으로 병까지 얻게 되었다. 무덥던 8월 어느날, 교회에서 돌아온 아내가 어눌하지만 결연히 '저, 인도로 가겠어요'라고 말했다.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아니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소?'하고 물었더니, 아내는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모두 산상기도회에 참석하느라 텅 빈 교회의 선교관 기도실에 홀로 갔더니 어느 노 권사님이 먼저 오셔서 영락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들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기도하던중 '가마솥같이 뜨겁고 숱한 악령들이 들끓는 인도에서 선교하시는 김영자 선교사님을 주님께서 꼭 지켜 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채워 주세요…'라는 기도를 엿듣고는 '나 혼자만 인도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성령님뿐 아니라 성도의 기도가 함께 따라온다'는 감동이 여태껏 두렵고 괴로웠던 마음을 감사와 평안함으로 변하게 했다고 말했다. 1985년 10월 30일 파송예배를 드릴 때 교회 주위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져 나왔고 그 때 필자가 답사를 하는 차례가 되었다. "아! 한국이 드디어 멕시코 월드컵 최종예선 경기에서 일본에게 한 골을 넣어 온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기뻐하는 소리군요. 지금 천국문에서는 승천하신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 그리고 모든 천군 천사들과 성도들이 함께 선교지를 지켜보며 잃어버린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올 때마다 온 천하를 얻은 것보다 더 기쁜 환희와 축하의 함성을 외치고 계십니다. 윌리암 케리가 부탁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파송한 선교사가 영적 싸움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을 건져 내어 마지막 승리를 얻기까지 뜨거운 응원의 줄, 생명의 줄이 끊기지 않도록, 기도의 줄을 꼭 붙들어 주십시오! 부족한 종이 귀한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가 인도를 향한 나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
선배에게서 선교의 길을 찾다
[ 땅끝에서온편지 ] < 5 > 인도 첫 선교사 지겐발크 이야기①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1월 07일(수)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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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돌로매오 지겐발크 선교사는 교육, 문화, 출판, 사회 사업 등을 펼친 인도 선교의 개척자로 존경받고 있다. 사진은 새예루살렘교회 안에 걸려있는 지겐발크 선교사의 초상화. |
선교지에 도착후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를 통해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영어와 현지어를 배우고, 인도의 역사, 사회, 종교, 문화 및 전통적 관습을 익힘으로 현지인의 삶에 적응하는 한편, 먼저 인도에 와서 사역한 선교사들의 삶과 선교방법을 연구하여, 빠르게 변화되는 다양한 콘텍스트(Context) 속에 시대에 적합한 선교의 패러다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Text)을 선포함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전인적인 삶으로 증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인도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선교의 좌표를 확인하고 미래의 선교 방향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인도 기독교 선교의 첫 번째 요람은 케랄라주의 도마교인들이 탄생한 꼿당갈루르(주후 52년 도마가 상륙했다고 알려진 Cochin 북쪽 16마일 해안), 두 번째는 16세기초 바스코다가마의 인도 총독 부임과 함께 가톨릭 선교가 시작된 고아, 세 번째는 1706년 7월 9일 마드라스 남쪽 1백50마일 떨어진 코로만델 해안에 덴마크의 왕 프레드릭 4세가 보낸 젊은 루터교 선교사 바돌로매오 지겐발크(1682-1719)와 헨리 플루초(1677-1748)가 상륙한 트랑코바르, 네 번째는 현대 개신교 선교의 요람인 세람포(Serampore )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는 포르투갈과 화란, 영국에 이어 네 번째로 동인도 척식회사를 설립, 인도양에 연한 남부의 트랑코바르(1620)와 북동의 후글리 강가의 세람포(1755)를 식민지로 삼았지만, 자원 수탈만을 목적으로 한 서구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왕실의 재정을 통해 현지인의 구원을 위한 교육, 문화 사역 등을 지원 뱅갈 르네상스를 통한 인도근대화에 큰 공헌을 했다.
윌리암 캐리가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듯이 지겐발크는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로, 아시아 언어(타밀)로 처음 성경번역과 찬송을 만들었고 인도의 사회와 문화, 종교 등을 경건주의운동의 본산인 할레 대학에 소개한 인도의 첫 문화 인류학자며, 교육, 문화, 출판, 사회사업 등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영어권 선교의 영향 때문인지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1699년 덴마크의 프레드릭 4세가 왕이 되면서, 루터의 소명의 교리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 왕으로서 '라자 다르마'(Raja Dharma:인도어로 왕의 신성한 의무란 의미)를 위해 이교도인 원주민들의 구원과 복지를 위해 파송할 선교사를 구했으나 찾지 못하다가, 프랑케의 열렬한 지지와 독일인 왕실 목사 프란츠 줄리우스 뤼트켄에 의해서 추천된 두 선교사가 1705년 코펜하겐에서 안수받은 후 왕립 선교사로 트랑코바르로 보내졌다.
지겐발크가 인도에 도착할 때 트랑코바르 식민지는 빠라야 (천민)를 포함한 15개의 촌락에, 약 2~3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1709년 8월 27일자 지겐발크의 편지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은 백인들과 포르투갈 혼혈족, 그리고 황색의 회교도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검은 말라바리(타밀족)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트랑코바르에는 한 개의 천주교회와 복음주의 시온 교회가 있었고, 그 외에 큰 회교사원과 원주민들을 위한 5개의 큰 힌두사원이 있었다
실제로 지겐발크와 플루초가 인도에 오기 전 화란과 영국인들, 그리고 덴마크 상인들이 데려온 개신교 목사들에 의해 이미 17세기부터 남인도에 개신교회가 세워졌다.
소위 기독교인들로 알려진 식민지의 유럽인들은, 대부분 일확 천금을 꿈꾸는 상인들과 군인, 모험주의자, 범죄자들로 힌두나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보다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았고, 소수의 원주민 개종자들도 이들과 함께 온 서구 목사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다. 첫 선교사들에 대한 하시우스(Hassius) 총독과 두 덴마크 목사들이 보인 모욕적인 대접도 경건주의자인 왕실 선교사에 대한 불경건하고 타락한 그들의 적대감 때문이라 추정된다.
이용범선교사
인도 선교의 기초를 다지다
[ 땅끝에서온편지 ] < 5 > 인도 첫 선교사 지겐발크 이야기②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1월 14일(수)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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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랑코바르의 바닷가. 지겐발크, 헨리푸르초 선교사 상륙 기념비,1990년 힌두교도들이 파괴하려했으나 타밀 루터교인들이 철야 기도를 하며 지켜냈다. |
지겐발크는 선교지에 도착한 얼마 후, 종려잎 전도지를 만들 12명의 필사자들을 고용하여 아주 간단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명을 종려나무 잎사귀 위에, 포루투칼어와 나중에 타밀어로 수백, 심지어는 수천 매씩 복사하여 힌두교도들 가운데 나누어 주었다. 1710년 초에 마드라스로 여행 중 타밀어로 번역된 마태복음서와 '기독교 교리에 대한 설명'이란 책자를 힌두들에게 배포한 후, 문서선교는 브라민들과의 훌륭한 접촉방법이란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문서사역은 할레 대학으로부터 타밀어 사도신경의 조판과 함께 라틴어 인쇄기가 도착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첫 교정본이 1713년 10월 4일 런던에 있는 독일 궁정 목사인 뵈메(Boehme)에게 보내졌고, 선교사들은 첫번째 책자가 인쇄중임을 덴마크에 보고하였다. 지겐발크의 문서사역은 타밀어와 인도어 전체에 있어서 현대적인 인쇄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1715년 1월 24일에 48개의 찬송가가 포함된 첫 타밀 성가집이 출판되어 후임자들에 의해서 더 많은 찬송가들로 증보되었고 루터의 교리문답서도 아시아 언어로서는 처음 번역되었다. 같은 해 7월 13일 첫 타밀 신약성서의 인쇄를 마친 후, 지겐발크는 다시 구약 번역을 시작 룻기까지 마친 후 36세로 1718년 그가 헌당한 새 예루살렘 교회에 묻혔다.
지겐발크는 그 당시 현지인 대부분 문맹이었지만, 교육 받은 소수 높은 계급들의 복음화와 현지인의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조직적인 문서선교와 성서 번역사역을 계속했다. 문서사역은 직접 전도할 수 없는 넓은 지역에 많은 복음의 접촉자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문서선교와 교육선교의 튼튼한 기초를 놓은 개척자가 되었다.
인도에서 실제적인 개신교 선교는 '데니쉬 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트랑코바르 선교회의 첫번째 선교사들이 인도에 최초의 루터파 선교회를 넘어선 첫 개신교 선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덴마크왕실뿐 아니라 독일 교회를 중심으로 종파와 국가를 넘어선 선교동역관계를 형성함으로 가능하였다.
뒤이어 영국인들, 화란인들, 스웨덴인들 또는 미국인들까지 다양한 방법과 서신을 통해서 이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장차 개신교 선교의 전 분야로 협력관계가 발전되게 하였다. 이렇듯 시작부터 협력 선교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은 지겐발크의 계획을 넘어선,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지겐발크는 '어떻게 덴마크와 독일과 영국, 화란에 있는 대학들을 연결하여 이 곳 인도에 있는 이교도들의 개종을 능력있게 수행할 수 있는가'하는 저서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유럽과 선교지와의 선교협력 방법을 찾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했던 에큐메니칼한 경건주의 복음전도자라 할 수 있다.
지겐발크는 개종으로 가족과 계급으로부터 쫓겨난 교인들의 심각한 가난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우리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사역과 그들의 필요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들을 구원하는 수단을 박탈하는 것이 되고 결국 그들은 육신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어디로든지(도움을 줄 수 있는) 가야만 된다.'
초기 선교에 따른 이교도들과의 갈등과 논쟁들을 포함해 교육, 의료, 복지 등을 선교수단으로 사용하는 문제, 교회내의 계급제도와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신자쟁탈, 선교현지의 이해 부족으로 인한 파송기관과 선교현장의 마찰, 선교의 자급 자립 등 20세기 초에 J R 모트와 간디 사이의 '쌀 교인'(Rice Christian이란 현지인들이 먹는 것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빗대어 하는 말) 개종 논쟁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많은 논쟁들이 선교지의 현안으로 남아있다.
첫 경건주의 선교사들은 그 더운 인도에서도 가발과 장식이 달린 예복을 입고, 그들에게 고국음식과 맥주를 공급하는데 많은 비용을 쓰게 했다는 비난과 일부 부정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개척선교(Holistic Pioneering Approach)를 소개함으로써 기독교 선교역사에 귀한 역할을 했으며 개신교 선교의 튼튼한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2006년 트랑코바르 선교 3백주년 기념 집회 참석시 성경을 번역한 지겐발크의 어릴적 이야기가 주일학교의 어린이들에 의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그의 어머니가 어린 남매를 병상으로 불렀다.
'얘들아, 내가 천국 가기 전 너희에게 가장 귀한 보물을 주겠다. 그 보물안에 너희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단다.' 어머니가 줄 보물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찬 가난한 어린 남매에게 주어진 것은 머리맡 베개 밑에서 꺼낸 낡은 가죽성경이었고, 이 보물은 그들을 통해 인도사람들의 가장 귀한 보물이 되었다.
인도 이용범선교사
시편 23편과 선교지에서의 첫 기도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이용범선교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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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1월 21일(수) 14:28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고 했던가? "고생이 참 많으시지요?" 선교지에 오는 팀마다 공통적으로 묻는 위로의 말이다. 그때마다 "어려움이 많을수록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도 큽니다"라는 말로 답하곤 한다. 이곳 선교사들이 어려울 때마다 시편 23편을 통해 주님의 위로를 함께 나누며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회상해 본다. 특히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지 못할 때마다 항상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 때마다 늘 전에 알지 못했던 방법으로 위로해 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1985년 11월 12일, 폭풍 속에서 칠흑같은 어둠을 희미하게 밝히는 활주로의 비상등을 따라 곡예비행을 하며, 끊임없이 터지는 폭죽의 소음과 이에 놀란 까마귀들의 시끄러운 환영을 받으며 어렵사리 인도 마드라스(첸네이) 공항에 도착했다.
11월 17일 주일부터 김영자 선교사와 동인석재의 지사장으로 나온 단 한 가정의 자녀들과 주일학교와 한글학교를 시작, 이듬해 5월 18일에는 오순절에 마드라스 한인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고 세 사람(권영필 37세 여, 송홍덕 40세 남, 서두석 31세 남)에게 학습을 베풀었다.
1985년 12월 처음으로 김영자 선교사의 선교지인 이롯 등을 방문, 김선교사와 협력하는 남인도 교단의 모세스목사 부부와 7개 처의 개척교회를 방문해 현지 전도자들과 첫 만남을, 이어서 12월 24일부터 28일까지 첫 성탄예배를 현지인들과 함께 드리는 감동을 맛보았고, 1986년 1월부터 6월까지 국제 타밀어 학원에서 현지어를 배운 후 7월부터 제수잇이 세운 로욜라 칼레지의 사회사업 대학원의 지역사회 개발학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의 심정을 다음 편지(1986.7.31)를 통해 회상해 본다.
"기후문제나 문화적인 충격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인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선교의 비전이 점차로 식어져 간다는 사실이다. 이곳의 사정을 조금씩 알게 되고 현지생활에 적응해 갈수록 내 나름대로 지녔던 인도에 관한 지식들과 선교계획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허황된 것들이었나를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좌절과 낙망 가운데서 하나님보다 인간적인 위로를 더욱 갈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놀라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선교를 가로막는 장벽이 인도정부나 힌두교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암담함과 좌절감을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때로는 사랑의 빚진 자로서 빨리 선교해야겠다는 조급한 부담감과 외국의 목회자가 발붙일 수 있는 단 한치의 땅조차 없다고 느껴지는 냉엄한 현실속에서 자기보다 늘 주님을 부인하려 했던 육과 영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이기적이고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의 당혹감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동안 계속된 갈등과 절망의 어두움속에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눅18:1)'을 깨우쳐 주셨고, 또한 심히 부족하고 연약한 자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하신 말씀을 체험케 하셨다."
얼마 전 인도에 처음 도착 했을 때 드렸던 기도를 생각하며 뼈아픈 눈물과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마드라스 공항에 착륙하기 직전, 무섭게 휘몰아치는 사이클론으로 가랑잎처럼 마구 흔들리던 비행기 안에서, 적전 상륙을 앞둔 병사들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 가족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시편 23편을 한 절 한 절 함께 읽으며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늘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해 주시는 주님! 아무리 무섭고 험한 폭풍이 몰아 칠지라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기쁨으로 인도의 모든 영혼들을 채울 수 있게 하옵소서."
그 동안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지 못했음을 고백함으로 주님께서는 다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오직 선한 목자만을 따를 때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사는 기쁨을 주셨고,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 진정으로 우러나는 감사와 찬양과 영광의 예배를 드리며, 오랜만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하신 참포도나무 안에 거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 땅끝에서온편지 ] < 8 > '선교사'라는 직책의 어려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2월 11일(수)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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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큐메니칼운동의 본산지로 알려진 UTC의 동문들ㆍ교수와 함께 한 필자(맨 오른쪽). |
1988년 로욜라 칼리지(지역개발전공)의 졸업을 앞두고 또다시 부딪친 문제는 선교가 금지된 인도에서 계속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당시 여행자 비자도 1개월이나 길어야 3개월밖에 주지 않기 때문에 장기 체류를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는 계속 공부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사회사업을 전공하게 된 동기도 인도사회의 실질적 체험을 통해 선교가 금지된 인도에서 사회 복지사업단체로 등록하여 사회사업가로 비자를 얻으려 계획했는데, 뒤늦게 알게 된 인도 정부의 정책은 사람은 받지 않고 오직 재정적인 지원만 받는 것이었다.
선교지를 스리랑카로 옮기는 방법과 새로 생긴 봄베이(뭄바이) 한인교회의 초청을 받아들여 타타 사회사업 대학원의 박사과정에 등록하고 한인 목회를 하며 현지인 선교를 하는 방법 등을 생각해 봤으나, 3년 동안의 영적인 갈급함을 재충전하는 일이 제일 시급한 것 같아 에큐메니칼운동의 본산지로 알려진 뱅갈로의 UTC(United Theological College)에 입학, 비교종교학을 전공하기 위해 2년간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인도교회사 석사과정으로 바꾸었다.
마드라스에서 뱅갈로로 옮길 때 짐과 함께 도둑맞은 인도 체류서류 등을 재발급 받는 과정에서 신분이 노출되어, 중앙수사국으로부터 72시간 내에 인도를 떠나지 않으면 강제 출국시키겠다는 위협도 받았지만, 그때마다 누군가를 통해 돕는 주님의 더 큰 손길을 체험하며 겨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뱅갈로로 옮긴 후 장기 선교사로 파송해 준 것으로 알았던 후원 교회로부터 약정 기간 3년이 곧 만료되어 후원을 계속할 수 없으니 귀국하라는 뜻밖의 통보에 큰 충격을 받았다. 놀란 마음을 간신히 기도로 진정시키고 그동안 후원해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비록 선교비 후원은 중단될지라도 주님께서 인도를 떠나라 하실 때까지는 계속 인도에 남아 선교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선교보다는 계속 공부할 목적으로 협력 선교를 중단, 선교지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결국 3년 만에 홀로 귀국해 그 당시 유행하던 청문회(?) 비슷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성급하게 선교의 열매를 요구할 수 없다. 보내는 교회나 보냄을 받은 선교사는 다 같은 추수의 동역자일 뿐, 오직 예수님만이 추수의 주인이시다. 3년의 사역을 위해 30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겸손히 배우신 주님처럼, 과거 식민지의 아픈 경험을 가진 선교지에서는 가르치는 선교사가 아니라 배우는 선교사를 원한다…'는 내용을 요지로 선교현장에서 배움의 중요성과 이에 대한 후원교회의 이해를 구했다. 3년 후에도 같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현지 공부의 필요성에 대한 약간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협력선교에 대해서는 선교사 각자의 열린 마음과 지속적인 노력, 인내뿐 아니라 선교관(宣敎觀, Mission Perspective)의 일치와 공동의 비전을 갖기까지 꾸준한 준비와 훈련, 협력선교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와 구조 등이 필요함을 역설했으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에 대한 정책을 세우기보다는 선교사역을 분리, 조정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인도 이용범선교사
핍박 속에 피어난 하늘의 열매
[ 땅끝에서온편지 ] < 9 > 위협과 박해…그러나 은혜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2월 18일(수)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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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은혜 선교회(Christhu Krupa Fellowship : CKF)' 건물 전경. |
인도로 돌아와 전부터 남인도 교단과 협력하여 추진하던 도시빈민 사역과 인도복음 선교회(총무:데오도르 윌리엄)와의 교회개척 협력사역이 지연됨에 따라 UTC의 신학생들과 시작한 기도모임을 주축으로 1990년 '그리스도 은혜 선교회(Christhu Krupa Fellowship : CKF)'라는 종교복지 법인을 조직, 로욜라 대학 동문인 조이 신부를 설립자로, 남인도 교회(CSI)의 빈센트 비노드 쿠마르 목사를 초대 이사장으로, 우리 부부는 평 이사와 재무 이사로 정부에 등록하여 인가를 받고, 선교관을 건립하여 직업훈련과 어린이선교, 문서선교와 뱅갈로와 마이소르 등에 개척교회를 세우며 제자훈련 사역과 현지목회자 훈련 사역을 시작했다.
선교관을 건축 중이던 1994년 2월부터 11월까지 매주 2회씩 2대의 밴에 뱅갈로 도시개발국에 속한 경찰과 철거반 30여 명이 몰려와 인부들을 구타하여 쫓아버리고, 힘들게 구입한 건축자재를 빼앗아 갔다. 골조만 올라간 건축현장에서 주일과 금요정오예배를 드리는데, 이곳은 정부에 속한 재산으로 모든 집회와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을 붙이고, 이사장 빈센트 목사를 소환하여 심문하고 건축업자 베누를 체포하더니, 집권당의 깡패집단까지 몰려와 이웃을 위협해 고발장을 내게 하는 등,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끈질긴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기독교인 변호사 조지 바게쉬와 그 당시 뱅갈로 경찰청장이던 상글리아나를 보내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뒤늦게 문제의 발단이 믿고 지원했던 사띠아 루벤 목사가 정부와 신학교에 투서하여 선교사를 쫓아내고 선교회(CKF)의 땅을 차지하려던 음모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스스로 사임하게 하셨다.
어려운 와중에서도 주님께서는 더 큰 위로를 주셨다. 뱅갈로에서 40여 킬로미터 떨어져 지금은 전자도시로 IT 산업의 중심지가 된 지그니에 보낸 전도자들이 1년간 단 한 명의 결신자도 얻지 못해 전도대상을 어른 대신 어린이들로 바꾸자 5주만에 1백2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링가얏(힘과 풍요의 상징인 시바신의 남근(男根) '링가'를 믿는 브라민에 준하는 높은 계급) 어린이들이 힌두축제날 시바신 대신 주님을 찬양하자 큰 충격을 받은 힌두주민들은 전도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마을에서 모두 쫓아 냈다.
그러나 한번 그들 심령밭에 뿌려진 생명 씨앗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진리와 사랑의 말씀으로 자라나 인도 복음화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귀한 밀알들로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을 확신하며 주님의 성호를 찬양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핍박에 앞장섰던 경찰두목인 링가얏 한 사람을 위한 기도의 응답으로 1백20여 명의 링가얏 어린이들을 주신 예수님, 언젠가는 힘들여 건축한 선교관의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지고 우리 육신의 생명도 끊기겠지만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척박한 돌짝밭 같은 저들의 심령이 언젠가는 옥토로 변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주렁주렁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을, 때로는 선교가 일시적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기도에는 결코 실패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우쳐 주셨다.
"우리는 바나나나 비스켓이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와 찬양을 배우고 싶어요."
지그니 마을 어구를 지키던 군다(깡패)들이 전도자들에게 다시 오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예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비스켓 등 먹을 것으로 아이들을 꼬이기 때문에 이들이 모인다고 하자 이를 지켜보던 어린이들이 한 말이다. 대부분 먹을 것을 위해 몰려오던 빈민가의 어린이들과는 달리, 경건하게 팔짱을 끼고 한 목소리로 요절을 암송하며 "Jesus loves me, this I know…" 열심히 찬송 부르던 링가얏 어린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조용히 미소 짓는 주님의 얼굴이 겹쳐진다.
인도 이용범선교사
"선교는 천국의 소꿉장난"
[ 땅끝에서온편지 ] < 完 > 인도의 모든 영혼 구원하소서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2월 25일(수)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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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원 어린이들, 교사들과 함께한 필자.(앞줄 맨 왼쪽). |
선교지에 와서 10여 년 간 나름대로 가장 고심했던 것은 '내게 선교란 무엇인가?' 하는 내 자신의 고백적인 삶의 명제(命題)로서의 선교였다. 지난 해 7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카고 한인대회에 참석하곤 '한국교회에게 선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제를 다시 떠올렸다. 천여 명에 가까운 한국선교사들과 MK들을 위한 각종 모임, 세계의 유수한 선교학자들과 강사들로 2백여 개가 넘는 세미나와 선교포럼 등이 마치 백화점의 상품같이 전시된 화려(?)한 대회였다. 그러나 피선교지에서는 거의 참석자가 없는 일방적인 우리만의 반쪽 잔치로 끝나고 말았다. 아직도 한국선교는 십자군 운동이나 구미의 선교식민주의적 오류를 탈피하지 못하고, 인본주의적 학문과 세속적인 방법에 따른 물량주의에 치우쳐, 선교를 기독교인이 살아야 할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프로젝트나 학문적 연구대상의 객체로 축소, 또는 화석화되어 버린 것 같아 자괴심(自愧心)마저 들었다.
선교란 인도의 인사 방법같이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상대방이 두 손을 모아 '나마스떼(안녕)!'하면 그대로 따라 하면 답례가 된다. 선교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대로 따라 하는 'Imago Dei'가 아닐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삶은 결코 쉽지 않다.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요 13:1),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빌 2:)하셨다. 인간의 타락된 성품으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살전 5:16~18)할 수 있을까? 단순함이 반복됨으로 깊이와 폭, 높이가 더해지고, 명확함으로 초점이 모여 집중되는 복음의 진리를 기도와 성령의 도움없이 어찌 알고 신실함으로 계속 행할 수 있으랴!
선교사로 떠날 때부터 은퇴를 앞둔 지금까지 "언제까지 인도에 있겠느냐?" 물어 올 때마다 주님만이 아신다는 뜻으로 하늘을 가리키곤 한다. 은퇴후 한국으로 오라는 사랑의 권면에도 "돌을 공중에 던지면 땅에 떨어지듯, 나를 던지면 인도 땅밖에 떨어질 데가 없다"고 말하지만, 선교가 성령 안에서 예수의 사랑과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는 총체적이고 전인적인 삶일 진데, 주님께서 본향에 데려가실 때까지 인도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로 죽으리라는 결단마저 주님의 뜻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선교를 준비해야 하는가?' 새로 온 선교사들이 물으면 '주께서 내 안에 사시도록 내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맡기는 삶이 선교'라 답한다. 재림의 종말적인 약속이 선교의 동기요 재림의 성취가 목표라고도 한다. 선교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주께서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기에 실패가 없다. 주께서는 인간의 실패마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로 바꾸신다. 만약 선교에 실패가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선교가 아니라 인간의 선교이기 때문이리라. 성서에서 굳이 성공이란 말을 찾기가 어렵지만, 지금, 여기에 다시 오신다는 긴박감으로,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그때까지 복음을 계속 전하는 것이리라.
인도에 와서 계속 드리는 두 가지 기도 제목이 있다. 인도 땅과 사람을 달라는 기도다. 첫 번째 기도는 주님께서는 1999년 11월, 서남아 선교사 창립대회 때 강사로 온 고무송목사(전 기독공보 사장)가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알려진 뱅갈로의 전자도시를 지나 호수르에 들러 "주여, 이 황무한 땅을 제게 주옵소서" 함께 기도한 후 이를 표제(2000년 2월)로 한 기사의 응답으로 지금까지 약 2만여 평의 국제문화 선교학교(International Institutes of Mission & Cultures)의 대지를 새천년 선교사와 제자훈련의 모판으로 주셨고, 뱅갈로 근교 사바망갈라에 도시농촌 선교를 위한 영어학교와 직업훈련, 정박아 재활원을 세울 땅을 주셨다.
두 번째는 한국교회가 성령의 불씨 역할을 감당하여 4억 5천만이 넘는 15세 미만의 인도 어린이들과 중국의 청소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시켜, 마지막 때 추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해달라는 기도다.
선교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요, 천국의 소꿉장난이다. 이 세상에 살며 선과 악, 빛과 어둠, 육신과 영혼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 철부지 아이처럼 쓰러지고 넘어지고 자빠질 때마다, 은혜의 손길로 씻겨주시고 능력의 손길로 붙잡아 주시며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시며 진리의 손길로 이끌어 주시는 그 분을 의지하고, 미숙하지만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며 이 세상의 삶이 끝나 천국에서 시작될 참되고 영원하며 거룩한 삶을 이 땅의 주께 속한 어린이들과 미리 연습하는 진지한 천국의 소꿉장난이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한국교회에 간절히 두 가지 부탁을 드린다. 선교사는 시작부터 혼자가 아니라 동시에 2명 이상 파송되어야 증거의 능력과 투명성이 있다. 모든 교인들은 재림 때까지 가든지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 선교를 기도와 물질로 지원함으로 집중, 협력, 계속, 확장의 성서적 선교 원칙을 꼭 지켜야 한다. 이제 96세에 소천하신 처조모께서 늘 인도를 위해 드리던 기도로, '땅끝에서 온 편지'를 마친다.
"주님께서 공중에 재림하실 때, 인도의 한 영혼도 남김없이 모두 들림 받아 어린양 혼인잔치에 참여케 구원하소서." 아멘!
인도 이용범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