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태국 염승신선교사

최고관리자 0 1,441 2020.06.21 22:33


무소속 선교사의 첫 걸음

[ 땅끝에서온편지 ]

 

염신승 선교사

 

20140204() 16:08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첫 선교사역을 시작한 이래 현재 태국 치앙마이에서 사역 중인 나의 선교사역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목사가 되어 목회자의 삶을 살겠다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학부 1학년 때 '선교사파송연구회'에 가입해 선교사로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고 훗날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나라가 결정되었다. 동기 목사님이 선교하던 남미 볼리비아였다. 총회에 들렸더니 역시 총회 파송 선교사을 받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나는 '아직 월급 받고 선교할 만큼 준비가 안 되었다'고 정중히 사양했다. 돌이켜보니 참 잘 한 것 같기도 하고 바보같은 대답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19904, 부모님의 도움과 교우들이 십시일반 주신 헌금으로 '무소속 선교사' 가족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아내와 한 살 반 된 쌍둥이 딸, 그리고 나, 모두 네 명이었다. 후원교회도 없고, 무소속이고, 총회 파송도 아니니 교우들의 환송은 당연히 없었다. 일본을 거쳐 뉴욕에 내렸다. 직원이 부른다. '미국 통관비자가 없이 왔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아찔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냥 봐 준단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JFK 공항에서 뉴왁공항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짐도 많고 식구가 넷이나 된 걸 보고는 직접 실어다 줬다. 하나님 은혜로 뉴욕 도로 무료 투어를 한 셈이었다. 이후 뉴욕을 출발해 마이애미와 브라질 상파울로, 볼리비아 싼타쿠르스 공항을 거쳐 목적지인 코챠밤바 공항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다. 코챠밤바는 해발 2500m이다보니 숨이 차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땅 끝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집을 구했다. 문제는 재정이었다. 가장 허름한 집, 그래도 주인이 사는 멋진 집의 뒷채를 얻었다.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넘쳤고, 모기는 기본이고 싱크대 서랍엔 쥐가 새끼를 낳았다. 언어공부가 급했다. 선교사 언어학교는 비싸서 못가니 기도하며 방법을 찾는데 해법이 생겼다. 오전에 사립 초등학교, 오후엔 공립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초등학교에선 꼬마들이랑 놀고, 숙제도 하고, 똑같이 시험도 봤다. 체육시간에 같이 운동도 하고 춤을 출 때면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재미있게 스페인어 공부를 했다. 나중엔 대학교 청강을 하고 정식학생이 되기도 했다. 생존 스페인어에서 생활 스페인어로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그러던 중 볼리비아 선교사 모임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대상자는 총회파송선교사였다. 그런데 선배님들이 같은 교단 목사이니 와서 인사하라고 하셔서 수도인 라빠스로 가 반가운 마음으로 참여했는데 분위기가 어색한 것이 아닌가. 무소속 선교사가 끼어있었던 게 문제였다. 선배 한 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염 목사는 여기 회원이 아니지" 잠시 나가있으라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그랬다. 나는 총회파송도, 노회파송도 아니고 지정 후원교회도 없으니 당연히 들어야 하는 말이었지만 무척 섭섭했다. 눈물이 핑돌았다. 이제라도 총회파송 선교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처럼 무소속으로 오는 분들이 있다면 잘 돕고 섬겨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무소속 선교사의 첫 걸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29, 아내는 27. 그리고 기저귀를 찬 쌍둥이 딸과 함께. 후원교회도 없고 총회파송 선교사도 아니었기에 하늘과 가까운 볼리비아에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 주님!"

 

 



 

 

 

염신승 목사, 2의 선교지 태국에 정착

[ 땅끝에서온편지 ]

 

염신승 선교사

 

20140303() 11:26

 

 

 

 

파얍대학교 멕길버리 신학대 2008년 졸업식 장면.

 200423일 태국 방콕에 도착했다. 한국은 아직도 겨울이었는데 태국은 여름이었다. 사역은 치앙마이에 있는 파얍대학교 신학대학의 전임교수로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태국어를 공부하는 데는 방콕이 좋다"는 선임 조준형 선교사님의 조언에 따라 1년 정도 방콕에 거주하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곧바로 언어공부를 시작했다. 사역을 위한 첫 준비는 역시 현지어 공부다. 스페인어는 그리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고 배웠었던 것 같은데 태국어는 왜 이리 어려운지. 우선 암기력이 둔해졌다. 여러차례 시행착오 끝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이듬 해 언어 시험에는 합격 했다.

 

 방콕에 있는 동안 여러 한인교회들과 현지인 교회들을 다니며 예배를 드렸다. 또 현지인들과의 예배를 통해 태국인들의 찬양과 설교, 활동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마침 안식년으로 떠나시는 선교사님의 사역지에 공백이 생겨 방콕과 코랏의 교회를 교차로 방문하며 현지교회를 섬길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양으로 준비하시고 훈련시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해 12월 치앙마이로 이사를 했다. 한 나라 안이지만 거의 700km의 먼 길이었다. 치앙마이는 한국으로 치면 평양과 닮았다. 그래서 평양신학교 격인 태국기독교(CCT)의 신학교가 아직도 1,000만 도시인 방콕에 있지 않고 30만 정도의 치앙마이에 있다. 뿐만 아니라 총회 소속의 전도부, 여전도회, 청년국, 교육국, 기독학교 재단, 연금재단, 목회자 훈련원, 심지어 에이즈센터, 성경통신센터까지 작은 도시 치앙마이에 그대로 남아있다.

 

 파얍대학교는 1889년에 작은 신학교로 시작해 지금은 13개 단과대학에 영어로 수업하는 국제과정과 대학원 등을 두루 갖춘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태국 정부에서는 그동안 사립대학을 허락하지 않다가 1974년 파얍대학교를 태국의 첫번째 사립대학로 승인하기도 했다. 신학대학은 한국의 언더우드 선교사님 격인 맥길버리 선교사님을 기념해 맥길버리 신학대학으로 명명 되었다. 맥길버리 선교사님은 1858년 서른 살에 선교사로 태국에 입국해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태국 북부와 라오스까지 다니시며 신학교와 교회 개척, 병원, 학교 설립의 산파 역할을 감당했다.

 

 내가 맡았던 첫 강의는 20058, 영어로 조직신학을 강의하는 것이었다. 낯설기도 하고 처음 맡은 강의라 밤을 새우며 준비했다. 원어민 교수들 사이에서 강의하려니 쉽지 않았다. 태국어로 하는 조직신학 강의는 10월부터 시작됐다. 이제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셈이었다. 태국의 대학 강의 시간은 90분인데 첫 강의 때는 그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주중에는 신학교 사역으로 바쁘게 지내면서 주일사역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던 중 선임 선교사님의 주선으로 이곳 태국총회 제3노회를 소개받아 노회 협력 선교사로서 교회 사역을 겸하게 됐다. 집에서 교회까지는 왕복 220~420km 까지 떨어져 있었다. 당시 나는 주일 예배 설교를 했고, 아내는 교회학교 교사, 큰 딸은 바이올린, 작은 딸은 키보드, 막내 아들은 풀룻을 준비해 '주일 팀사역'을 하고 돌아왔다. 이제는 세 아이들이 모두 집을 떠나고 우리 부부 둘만 남았다. 매주일 더운 날씨, 장거리 운전에 사역이 쉽지는 않았지만 게으르고 부족한 저희들을 기다리시는 사랑하는 태국의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매주일 아침 교회를 향해 길을 떠난다. 할렐루야!

 

 

 







은혜로 세워지는 태국 교회들

[ 땅끝에서온편지 ]

 

염신승 선교사 jangci@pckworld.com

 

20140310() 17:12

 

 

 태국에 있는 본교단 선교사들은 대부분 태국기독교총회(CCT)의 노회에 속해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신학대학에서의 전임 사역과 함께 제3노회에 소속되어 협력선교사로 일을 하고 있다. 지면을 통해 제3노회 소속 교회들 중 몇 교회를 소개하고 싶다.

 

 ▲태국인에 의해 시작된 람빵 제1교회

 '람빵'이라는 것은 도()의 이름이자 시()의 이름이다. 람빵 제1교회는 이 지역의 첫 번째 교회이다. 태국에서는 제1교회가 있으면 다른 교단이라도 그 명칭을 쓰지 않는다. 그만큼 존중한다. 한국도 그렇듯이 태국도 첫 번째 교회들은 서양 선교사들이 시작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이상하게도 선교사님이 시작한 교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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