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온편지1] 케냐 이원재선교사
[ 땅끝에서온편지 ] 케냐 선교사로의 부르심
1998년 10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 ||
[땅끝에서온편지2] 케냐 이원재선교사
[ 땅끝에서온편지 ] 떠오르는 기독교 대륙 아프리카
PCEA 증경총회장 제시 까마우 목사(右)와 함께. | ||
[땅끝에서온편지3] 동부아프리카 장로교대학 교수 사역
[ 땅끝에서온편지 ]
동부아프리카 장로교대학 졸업반 학생들과 함께. 가운데 필자. | ||
동부아프리카 장로교대학(PCEA Presbyterian University of East Africa)에서의 선교학 강의를 중심으로 나의 케냐 선교사역은 시작되었다. PCEA의 교단신학교인 이 신학교는 한 학년의 학생 수가 고작 10명에서 많으면 20여 명이었다. 처음에는 교단의 크기와 교회의 숫자에 비해 목사 후보생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실제로 PCEA 교단은 케냐에서 가장 왕성한 개신교단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4천여 교회에 목사의 숫자는 4백여 명 밖에는 안 되어 한 명의 목사가 적어도 4~10개까지의 교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한국처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부담은 적지만 그래도 여러 교회를 동시에 목회하자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프리카 교회의 열악한 재정형편에서 교회마다 목회자를 두어서는 교회를 유지하기도 힘들고, 여러 가지 시급한 사회선교 사업에 힘쓸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PCEA교단은 신학교 내에 신학 연장 교육프로그램인 TEE (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를 통하여 평신도 지도자를 집중 양성하였고 현재까지 2만5천여 명의 졸업생을 내었다. 대부분이 지역교회의 장로인 이들이 개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행정적인 일들은 노회로 가져와서 처리한다. 이러한 평신도 지도자 활용을 통해 생긴 여력으로 교회는 각종 초중고교와 병원과 사회사업기관들을 운영하여 정부가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적 필요들을 감당하며 국가와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단의 감독 아래 많은 교인들 가운데서 검증되어진 사람들이 선발되는만큼 우수한 인재들이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의 탁월한 지도력과 희소가치로 목회자가 최고의 예우와 존경을 받으며 전체 교회를 성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어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자신감과 경험으로 이곳에서 신학교를 시작하였는데 2000년대 초반엔 한국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가 케냐에만 9개가 있었고 성경학교(Bible School)까지 합하면 더 많은 숫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경우 지역교회에 기반을 두지 않은 초교파 신학교라 우수한 인재를 뽑기도 어려웠고 졸업한 후에 일할 수 있는 마땅한 교회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학교를 운영하는 선교사 자신이나 채용된 교수들이 제대로 된 학위를 가진 분들도 아니었기에 그 교육의 질도 질이려니와 이곳의 상황에서 검증되고 토착화된 신학교육이 이루어지기도 힘든 것이었다. 신학교육이 지도자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역교회와의 연계가 없는 목회자 양성은 이런 면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신학교들은 그 선교사가 떠나거나 한국에서의 후원이 끊어지면 문을 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나 자신 역시 박사 학위를 가지지 못한 교수로서 한국에서의 교수 경험도 없었기에 언제나 학생들에게 미안함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강의를 시작할 때 "오늘은 여러분이 저의 제자들이지만 곧 졸업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저와 세계선교 동역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세계선교에 헌신하는 데에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당부를 하곤한다.
케냐를 비롯한 아프리카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교회가 재정적으로 취약하고 인적자원이 부족해서 세계선교는 자신들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성경적으로는 세계선교에 대한 비전과 영적부담의 문제이지 재정적인 문제 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이 대학에서 선교학을 배운 학생들이 약 1백80명 정도가 되었다. 벌써 이 교단 목회자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나의 제자요 동역자가 된 것이다. 숫자 상으로는 그들이 목회하는 수백만의 교인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을 떠나올 때 후원교회 담임목사님을 통해 받은 부탁 중에 하나는 선교지에서 문어발처럼 이것 저것 많은 일들을 벌이지 말고 30~40년 동안 한 가지 일에만 죽도록 충성해 달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고 그들의 사역을 후원하며 연륜을 쌓으신 탁월한 선교지도력에서 나온 귀한 충고였다. 후원교회의 그러한 이해의 바탕이 있었기에 가시적 성과에 대한 큰 부담이 없이 신학교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고 부수적인 일들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동역교단과 연계한 현지인 지도자 양성과 세계선교에의 도전 이야말로 떠오르는 기독교 대륙 아프리카의 황금어장에서 선교사가 필요한 이유 중에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땅끝에서온편지 4] 리무르 노회와의 협력사역
[ 땅끝에서온편지 ]
첫번째 협력사역 프로젝트였던 키나래 난민어린이센터에서 리무르 노회원들과 함께 도서관 전달식을 갖는 필자(左). | ||
처음 케냐에 와서 정착하고 살던 곳은 '리무르'라고 하는 작은 타운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결된 노회가 PCEA 리무르노회였다. 나를 이곳에 소개해준 분은 그 당시 학장이었던 쿠리아 박사(Rev. Dr. Plawson K. Kuria)이다. 그는 선교 모라토리움을 주창했던 존 가투 박사(Rev.Dr. John Gatu)가 PCEA 교단의 총회장을 할 때 그와 함께 교단 총무로 사역 했던 분이다. 그가 들려준 선교 모라토리움 배경 설명에 의하면 선교나 선교사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가 기본 인프라를 갖지 못한 제3세계 교회 상황에서 외국선교부들이 독점하고 있던 인프라를 흡수하여 지역교회가 자립, 자주, 자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키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케냐의 PCEA는 이를 기반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리무르 노회의 관할 지역은 사방 2백kmdp 이른다. 서울보다 배나 큰 지역을 관할한다. 기본적으로 PCEA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은 시간이 걸려도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고, 또 그 교인들을 목회하는 일은 현지인목회자가 감당하고 각종 지역개발 프로젝트나 사회복지 사업은 선교사와 협력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처음 맡겨진 협력사역 프로젝트가 키나래 난민촌 어린이사역이었다. 나이로비 북방 70km 쯤에 위치한 키나래 난민어린이 센터는 부족 사이의 갈등으로 인하여 살던 지역에서 도망오거나 강제 이주 정책으로 광야에 버려진 사람들의 자녀들을 모아 교육을 하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한 비극적인 부족 갈등도 식민주의 유산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곳에 모인 2백여 명의 어린이들은 대다수가 부모 없는 고아이거나, 편부모 밑에서 일반 학교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어린이들이다. 케냐 정부가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한 2004년까지 약 5년간 이 학교는 계속되었다. 건물은 노회에서 교사 봉급은 정부에서 그리고 한국의 후원교회들의 손길이 닿는 대로 각종 책과 간식, 의류 등을 제공하여 학교는 운영되었고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 리무르노회와의 협력사역은 나록 아가페 청소년 재활센터이다. 나록은 리무르에서 1백20km 정도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중소도시로 맛사이 부족이 유목을 하는 건조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케냐 서부지역에서 나이로비로 올라오는 중간기점에 속한 도시라 각 지역에서 몰려온 고아와 가출 청소년들이 특히 많은 지역이다. 농촌지역의 고아들이 친척에 의해 돌보아지는 반면 도시지역의 고아나 무연고 청소년들은 거리를 헤매며 각종 범죄와 본드 흡입 등의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이들을 수용해서 교육하고 직업훈련을 통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취지이다. 땅은 정부에서 2에이커(8093.6㎡)를 제공하였고 건물은 한국교회(사랑의집교회:김삼수 원장)에서 지어주고, 운영은 노회가 맡아서 하기로 하고 건축을 마친 상태이다. 이런 과정에서도 재정의 집행이나 감독은 노회가 맡아서 하였다. 아직 노회의 재정이 여의치 않아 아이들을 수용하여 운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한국교회의 후원을 통하여 빨리 시작하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처음 약속대로 상호협력으로 이 일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으로 일이 더디어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에 있어서도 후원하는 교회의 이해와 인내가 필요하다. 빨리 눈에 보이는 결과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협력사역의 원칙을 깨는 것은 상호존중과 지속가능한 개발의 미래를 짓밟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력사역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비록 외국에서 온 선교사이지만 노회의 회원들과는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되었고 노회에서 정식으로 나를 총회 총대로 뽑아주어 노회대표로 총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처절하고 비참한 사회현실 속에서 전인적인 선교사역과 지역사회 개발은 절박한 요구이다. 동역하는 교회와의 상호존중과 복종을 통해 그들의 자부심을 키워주고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돕되 선교동역자인 우리들 자신은 완전히 뒤로 감출 때 그 사역은 지속되어 질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확장되어 간다고 나는 믿는다.
[땅끝에서온편지 5 ] 여전히 험난한 아프리카 선교사의 삶
[ 땅끝에서온편지 ]
강도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박삼일 선교사를 방문한 세계선교부 총무 신방현목사. | ||
지난 5월 아내 진은현 선교사와 함께 한인교회 교사로 봉사하던 OOO자매의 장례식을 치르고 오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매는 모 선교단체의 단기선교사로 일년을 약정하고 케냐에 와서 오지를 다니며 어린이 사역의 장기선교를 꿈꾸고 있던 귀한 청년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서 불신자였던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왔었다. 자매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새벽 2시까지 식당 설거지 일을 하며 딸을 대학교육까지 시켰는데 어이없게도 자동차 전복사고로 이 땅에서 딸을 잃었다. 그녀와 함께 동승했던 단기선교 방문 팀의 고3학생은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봉사의 마음을 갖기 위해 왔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 자동차가 조금만 더 튼튼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들의 고귀한 죽음의 의미는 어떤 식으로든 폄하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들을 당하면서 우리는 아직도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너무 서둘러 해외선교지로 젊은이들을 내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2005년 9월 우리가 사는 집에도 20여 명의 떼강도가 들어왔다. 총기와 정글도(刀), 쇠망치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집을 때려부수고 들어와서는 숨어 있던 어린 딸들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며 돈을 요구하고 정글도로 나의 머리를 내리쳤던 그 끔찍한 밤의 기억은 아직도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진흙 발에 무참히 짓밟힌 성경책을 보며 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던 아내와 아이들의 신앙의 용기에 감사하기는 했지만 3년이 다 된 지금도 우리 가족은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먼저 살던 리무르의 사택 대문 앞에서 행인 두 명이 지나가다 밤에 강도의 칼에 맞아 죽은 것을 보았고 우리가 이사한 후에 그 집 마당에서 강도 두 명이 사살된 사건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케냐에서 12년 동안 8번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중 두 번은 차가 전복되었거나 추돌사고로 폐차 처리되었고 한 대는 반파된 큰 사고들이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우리 신학교의 수위 아저씨도 강도에게 피살되었고, 교수 중에 많은 사람이 칼에 맞고 강도를 당했다. 우리 교단의 박삼일선교사는 얼굴에 총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서숙자선교사는 강도들에게 집 앞에서 납치되어 차에 태워져 끌려 다니기도 했고 김옥실, 고은임선교사는 차 안에 앉아 있다가 총을 들이미는 강도에게 모든 것을 털린 일도 있었다. 바로 우리 주변의 선교사 중 여러 명이 지난 몇 년간 이 땅에서 총에 맞고 강도를 당하고 다치거나 죽어갔다. 아프간이나 이라크에서조차도 선교사들이 이보다 더 많은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회교 국가들이 신변의 안전으로 볼 때는 훨씬 더 안전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선교사들은 이런 환경에서 어린 자녀들을 키워야 한다. 그냥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국 부모의 가정에서 살고 미국 사람들의 선교사 자녀 학교에서 미국 교과과정으로 교육받고 아프리카 문화의 토양 속에서 자라난 우리들의 자녀들은 거쳐야 하는 정체성의 갈등과 불확실한 미래를 다독거리며 살아간다. 또 함께 사역하는 현지인 사역자들의 필요를 돌봐야 하며 고통당하는 이 땅의 교인들이나 이웃 사람들의 애환을 때로는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기도 하고 때로는 견제를 해야만 하는 정신적 부담 또한 만만치가 않다. 그래서인지 오랜 경험을 가진 서양의 선교부들은 이런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안식년 기간엔 반드시 정신과나 상담과의 심리치료를 받게 한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선교하는 선교사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리와 통제만이 아니라 적절한 돌봄과 위기상황에 대한 대책과 보호, 제대로 된 장비와 합리적이고 유연한 재정적 후원 체계일 것이다. 나의 경우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도움의 손길들이 답지해 위기의 상황들을 수습하고 그때그때 재적응 할 수 있었지만 이런 일들은 보다 제도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는 '선교사 파송 세계 2위 국가' 혹은 '선교사 10만 명 파송의 비전'과 같은 숫자나 순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수의 선교사를 보내더라도 전문성과 소양을 갖추고 사역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적확한 절차에 따라 보내고 필요한 장비와 안전 장치, 검증과 계속교육, 사후 관리와 복지를 고려한 선교사 파송 정책과 전략이 교단적 차원에서 이뤄져야만 한다.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춰진 상황에서도 사고는 일어나고 중도탈락자가 나오는데 이런 시스템조차 준비 안 된 상황에서 일단 파송하고 보는 식의 선교는 정말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땅끝에서온편지-完] 아프리카 선교 '아름다운 동역'을 꿈꾼다
[ 땅끝에서온편지 ]
케냐 이원재선교사
2007년 8월 본교단 총회장과 PCEA 총회장이 협약식을 갖는 장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