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6~10회)

최고관리자 0 1,440 2020.06.21 20:22

1년 6개월만에 맡은 학장

[ 땅끝에서온편지 ] <6> 모든민족신학교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1월 07일(금) 14:22

  
▲ 김종우선교사와 현지인 신학생들.

내가 섬기는 모든민족신학교(All Nations Theological College & Seminary)는 수도 캄팔라에서 1시간 떨어진 빅토리아 호숫가에 위치하고 있는 경관이 매우 빼어난 곳이다. 언덕 뒤로는 초등학교와 유치원도 함께 있다.
 
이 신학교는 1993년에 대한예수교장로교 합동측 선교사에 의해 초교파로 시작됐으며, 처음에는 2년제로 10여 명의 학생들만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필자와 아내는 통합측 선교사로서 함께 동역을 하게 됐다.
 
당시 일부 합통측 선교사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학장을 맡았던 선교사가 케만선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게 됐다. 솔직이 필자도 그때는 신학교 사역에 동참한 것을 매우 후회했다. 그러나 기도하는 동안 주님이 인내하게 하셨고, 그 자리가 있어야 할 곳임을 깨닫게 됐다.
 
학장이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우간다에 온지 1년 6개월만에 신학교 학장직을 맡게 됐다. 언어는 미숙하고, 선교지나 학생들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큰 직분을 맡으니 잠이 오지않았다. 학생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자동으로 금식하게 되며 탄식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매일 매순간이 살얼음 위를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내인 이두심선교사가 한국에서 간호사와 교사 생활했고, 필자보다는 언어도 능숙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학교가 숲속에 위치하고 있어 몇 년간 전기와 수도도 없이 우물물과 빗물을 받아 정수해서 살았다. 그래도 아내는 묵묵히 견뎌냈다.
 
상의하며 함께 기도할 가정이 없고 우리만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때가 많았다. 가끔씩  외로움과 그리움이 밀려올때면 빅토리아호수를 바라보며 아내와 함께 두손을 모아본다.
 
학생들을 훈련시키려면 새벽기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주변에서 말라리아 모기들 때문에 안된다고 말한다. 혼자서 몇개월을 방에서 기도하다가 새벽기도를 강행했다. 새벽마다 종을 들고 학생기숙사 앞에서 종을 쳤다. 아프리카 교회는 새벽기도회가 거의 없다. 겨우 따라 나오는 학생들의 입도 삐쭉나와 있었다.

"주여, 모기에 물리지 않게 하시고 말라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약 6개월 동안은 먼저 이기도를 간절히 드렸다. 감사하게도 새벽기도로 인해 말라리아에 걸렸다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처음에는 새벽기도가 어려워서 불평이던 학생들도 익숙해지면서 감사의 기도가 터져나왔다. 지금은 이들이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하며 우간다에 새벽기도를 드리는 교회들이 생기고 있다.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전쟁 중에도 말씀에 목마른 교인들

[ 땅끝에서온편지 ] <7> 분쟁지역에서의 선교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1월 18일(화) 11:18

  
▲ 위험을 무릎쓰고 달려간 교회의 지붕은 지푸라기와 막대기로 만든 초라한 몰골이었다.

우간다와 이웃나라인 콩고 국경에서 분쟁이 있었다. 이때 모든민족신학교 1회 졸업생 한 명이  찾아와서 자기가 개척한 교회를 방문해달라고 요청했다.
 
지역은 우간다 북쪽 분디부조와 콩고 안쪽이란다. 선교사의 사명감과 호기심이 모두 발동되어 두명의 신입 선교사와 함께 현장으로 떠났다.
 
가기 전부터 위험하니 조심하라며 염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를 새벽부터 몰아 북쪽으로 하루길을 갔다. 길은 굽이 굽이 휘어지고, 먼지가 수북하여 앞이 안 보인다. 1930년대부터 영국인과 인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넓은 차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도 지나갔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고 우간다에서 제일 높은 만년설이 있는 르왠조리산맥이 눈 앞에 우뚝 서 있더니 이내 우리를 품에 안는다. 산 옆으로 수 천미터 낭떠러지를 통과하고 산허리를 여러개 돌아 늦게서야 분디부조에 이르렀다. 곳곳에 전쟁으로 주민들이 피난해 있고 군인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마침 산 속에서 사냥만 하는 피미그족들에게 설탕을 가지고 들어가 추장을 만나며 복음을 전했다.
 
다음날에는 콩고로 들어가야 하는대, 군인들이 써준 국경 통행증을 받아 졸업생과 차를 몰았다.  끝없이 정글이 펼쳐진다. 이 곳은 아프리카의 허파와 같다.
 
조금 가는데 국경 부근에 작은 강이 흐른다. 다리는 없고 차로 건너는데 그만 물속에 빠져 꼼짝도 안한다. 사람들이 몰려와 손으로 차를 들어주어 겨우 강을 빠져 나왔다.
 
콩고에 들어가 숲속을 제법 달려가니, 군인들이 놀라면서 맞이한다. 그리고 오후가 되서 교회에 도착했다. 교회 2곳은 전쟁에 불타고 두 군데만 남았다고 한다. 한 곳에 2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늦어서 기다리다가 제직들만 남았단다. 지붕은 얼기설기 지푸라기로 덮여 있고, 막대기로 기둥과 몇개의 통나무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눈빛들이 역력하다. 예배를 드리는데 교회 밖에서 동서남북으로 군인들이 총을 들고 군견처럼 엎드려서 지키고 있다. 그 곳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 전쟁지역이란다.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쳤다. 그런데 한 노인이 강낭콩이 들어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두 손으로 주신다. 그리고 "이곳은 전쟁터라 드릴 것이 이것뿐입니다"라며 간절히 기도를 부탁하셨다.
 
또한 일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와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당부도 하셨다. 가슴을 파고드는 말씀에 함께한 선교사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을 뒤로하고 돌아오는데 그 노인의 말씀이 계속 귀와 가슴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가슴을 꽉 누르고 있지만 서로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서도 말씀에 목말라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간청을 생각하면 목이 메어온다. 주님은 아프리카에 왜 우리를 선교사로 부르셨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미래를 위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

[ 땅끝에서온편지 ] <8>타국에서 만난 선교의 동역자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1월 27일(목) 10:45

  
▲ 에녹목사는 회개의 역사가 난민들 중에 일어나면서 8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했다. 지금도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의 모습에 감동을 얻고 찬양을 올리게 된다.

10여 명으로 시작한 신학교가 지금은 1백여 명 규모로 확장되었다.
 
우간다 인근 나라들의 정세가 전쟁 때문에 불안해지자 학생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수단에서 21년간의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발생하면서 그 중에 우리 신학교에 훈련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수업료가 없고 특히 노동 장학금을 받을 수 있기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지난 1994년에는 르완다에서 1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되면서, 이때 도망쳐 나온 사람들 중 여러 명이 우리 신학교에 등록을 했다.
 
그외에도 콩고와 부룬디에서 유학오는 학생들도 있다. 치안이 불안하고 양질의 교육을 받기가 극히 어려워 우간다로 넘어오는 것이다.
 
그 중에 지금까지 필자와 동역하며 큰 힘이 되어준 르완다 난민 에녹목사를 잊을 수 없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르완다 대학살 때 일주일 동안 금식하며 숨어 있었는데 폭도들에게 발각돼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됐다. 그러나 폭도들 중에 에녹목사의 교인들이 있어 도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탄자니아로 넘어와서 교회를 개척했고 회개의 역사가 난민들 중에 일어나면서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약 8천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후에 우간다로 건너와 난민촌에 살았다. 집은 선사시대의 움막처럼 생겼다. 거기서 세 교회를 개척했고 지금은 우리 신학교에 오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숙해졌으며, 그 외에도 5~6개 언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는 신학교 졸업 후에 필자의 권유로 직원으로 몇년 간 일하다가 무슬림 복음화를 목표로 남부 수단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
 
에녹목사는 가는 곳마다 교회개척을 위해 힘썼고, 방학이 되면 각국으로 흩어진 학생들을 방문하며 전도 집회, 예수 영화 상영, 세미나 등을 가졌다. 맡은 일에 성실한 기도의 사람이며 물질에 정직하고 다른 현지인들과는 달리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을 잘 돌보고 자녀의 신앙교육에 철저하며 주변 사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더욱이 필자에게 항시 진심어린 충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필자에게 현지인 에녹목사를 만난 것은 매우 큰 축복이었다. 그를 통해서 선교사역이 활성화됐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열심히 교회를 개척하며 목회자를 훈련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필자는 신학교 졸업생들이 영적 지도자로서 교회를 섬기며, 학교를 세우고, 후배들을 양성하는 모습에서 항상 큰 감동을 얻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의 찬양을 올리게 된다.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감동적인 사역 펼치는 졸업생들

[ 땅끝에서온편지 ] <9> 신학교 졸업생들 이야기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1월 28일(금) 14:25

 
# 부룬디 왕족 출신 디아몬디
 
부룬디의 왕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영어가 안 되어 조용하기만 했던 디아몬디는 후에 학생회장으로 선출됐고, 점심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에 힘쓰곤했다.
 
졸업 후 일년이 지나서 나에게 교회 헌당식 초청장이 도착했다. 새벽 4시에 차를 몰고 르완다를 지나 부룬디에 도착하니 저녁 9시가 넘었고, 다음날에야 겨우 교회에 당도했다. 부룬디는 굽이 굽이 산을 돌아서 넓게 펼쳐지는 평지에 도시가 세워져 있고 옆에는 큰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나라다.
 
3백 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당에서 헌당식을 위해 설교하는 데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몰려온다.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한 후 조금씩 헌금을 모아서 교회 건물을 헌당하게 된 것이다.
 
# 르완다 유학생 마이클
 
신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마이클이 자신의 제자라며 2명을 내게 소개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3년간 우간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르완다로 돌아갔는데, 이웃 지역의 전도사들이 와서 "당신이 유학을 하고 왔으니 우리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학교가 시작됐고 이들이 자신의 학생이란다. 학교 이름은 희망성경신학교(Hope Bible Collage)로 2년제인데, 지금까지 5회째 매년 20여 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졸업식에 초청받아 설교할 때마다 큰 감격을 느낀다.
 
# 이슬람 지역에 교회를 개척한 피스
 
미혼 여학생으로서 학교를 졸업하고 우간다 수도 변두리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 곳은 이슬람지역이라 여러 전도사들이 목회에 실패하고 현장을 떠났다고 한다.
 
이 여학생은 40일 금식기도를 하며 개척을 했다. 땅 주인이 감동되어서 교회 개척을 허락했고, 나무와 천막지붕으로 예배당을 지은 후 모임을 갖고 있었다. 초청받아 설교를 하고 있는데 마침 비가 많이 내렸고, 강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옷이 흠뻑 젖었던 잊지못할 기억이 있다.
 
# 금식하며 열심으로 사역하는 카시리브
 
지난해 졸업해서 지방도시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1백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곳에 방문해 전도집회와 세미나 강사로 도와주었다. 비록 교회당 지붕의 절반이 없어 하늘이 보이지만, 금식하며 열심으로 헌신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교단은 달라도 선교 위해 한마음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3월 03일(목) 14:34

 

  
▲ 필자가 사역하는 모든민족신학교 졸업생들의 모습. 모든민족신학교는 신학교 정식인가를 받고 대학원까지 발족시키기 위해 힘쓰고 있다.
우간다는 현재 경제적으로 매년 5~7%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우간다의 정치적 안정과 함께 이웃나라인 부룬디, 르완다, 콩고, 수단의 안정과 발전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도로가 포장되고 온 나라의 경제활동이 왕성해지며, 곳곳마다 새로운 건물이 건축되고 있다. 우간다는 모든 면에서 매우 빠르게 발달하며 변모하고 있다. 또한 교육열도 높아져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고 있다.
 
필자가 사역하는 모든민족신학교는 현재 본교단 여러 선교사들을 비롯해 합동측 사역자들도 함께 일하고 있다. 교단이 다른데 협력이 가능한가를 묻는 사람들이 일부 있지만, 다같이 한 마음으로 신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고 대학원까지 발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15회의 졸업생들에 지방 목회자 훈련생들까지 합하면 수백명에 이른다. 이들은 여러 나라에서 교회, 학교, 고아원 사역을 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 기독교 기관에서도 중요한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한국 선교사들을 초청해 강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이슬람교는 더욱 왕성하게 아프리카 포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기독교도 유럽 지역 등에서 선교사 파송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아프리카 선교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고 믿어 진다.
 
지금까지 주님의 은혜로 부족한 종이 다양한 경험과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사랑과 후원으로 여기까지 오게 됐음을 고백한다. 앞으로도 더욱 아프리카 선교를 위한 기도를 부탁드리며, 사도 바울의 고백을 나누며 지금까지 함께 해 오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3:13~14)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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