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에 부름 받은 일꾼처럼'
[ 땅끝에서온편지 ] <1>선교사의 꿈을 이루다 몽골 안광표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5월 13일(목) 10:41
필자가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꾼 것은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진학한 이후 처음 교회에 출석하면서 부터였다. 샤머니즘에 젖어 살아온 우리 가정에 놀라운 역사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소위 말하는 안(安)씨의 종가였다. 샤머니즘과 유교적인 전통을 지닌 환경에서 자란 필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우연히 행당동 언덕 위에 있던 무학교회의 수요예배에서 당시 이춘섭전도사님의 "예수와 함께 죽으러가자"는 첫 설교를 듣고 광(?)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말씀이 현실이 되어 어머님은 무학교회의 권사로, 형님 안인표장로는 무학교회 시무장로로, 누님은 성남 영화감리교회의 권사로, 매형 류유산장로에 이르기까지 사돈의 팔촌 이상까지도 장로로 목사로 섬기게 되었다. 필자의 두 아들 역시 목사가 되어 큰 아들은 필자와 함께 몽골선교사(총회파송)로 파송 받아 대를 잇는 선교사가 되었고 둘째 아들은 부목사로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어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경을 읽는 중에 늘 마음에 강하게 던져주신 도전의 말씀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는 구절이었다. 늘 함께 신앙의 멘토가 되어주었던 음동성목사(동교동교회)를 비롯한 무학교회의 여러 친구들을 통하여 믿음의 진보와 함께 선교적 도전을 받게 되었고, 당시 무학교회 담임목사님이셨던 김계용목사님께서 브라질 선교사로 나가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언젠가 선교사로 복음의 불모지에 가리라는 꿈을 꾸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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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역자이자 후원자인 가족들과 함께. |
선교에 대한 비전은 언제나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하였고 군에 입대하여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는 동안에도 이 말씀에 이끌려 군인교회에서 군종사병으로 섬기면서 각 부대 신우회원들을 중심으로 가을에 싸리비자루를 만들어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 주차장에 트럭 20대 분량을 옮겨와 서울과 경기 지방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여 싸리비자루를 판매하며 군인교회를 건축하였고 민통선 마을에 어린이들에게 교회학교를 개설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공보 전무로 계셨던 정봉덕장로님의 격려와 취재기자이던 이경천기자(현 염천교회 장로)가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기사화해 주셔서 성공적으로 모금도 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장로님이 운영하시던 대한모방에서 자금을 담당하는 일을 하면서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강권하여 부르심을 느끼고 선지동산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2년 동안 국내에서 목회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선교에 대한 관심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페루선교회를 섬기며 페루에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는 일에 동참하여 서기로 부회장으로 회장으로 선교사들을 뒷바라지하며 선교현장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아가면서 마음은 한국의 목회현장 보다는 땅 끝, 복음의 불모지인 선교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1999년, 우연한 기회에 한양선교회 회장이던 원광기목사님을 통하여 "몽골선교사로 가지 않겠느냐?"라는 제안이 계기가 되어 몽골 정탐을 하고 돌아와 아내 최춘원선교사와 함께 그토록 꿈꾸던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 총회선교사 인선을 받고 한양선교회의 후원으로 2000년 2월 25일 그동안 잊혀졌던 동토, 칭기스칸의 땅 몽골에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일꾼의 심정으로' 선교사로 입국하게 되었다.
연합의 모범을 보이는 곳
[ 땅끝에서온편지 ] <2> 아름다운 동역 - 몽골 안광표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6월 01일(화) 12:26
새 천년이 시작된 2000년 2월 25일 몽골행 비행기에 올랐다. 늦은 밤 12시가 되어 몽골의 보앙트 오하 국제공항에 내린 우리는 마중 나와 준 윤순재선교사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온통 흰눈 덮인 은빛 세계를 연출하고 있었으나 도로변은 외등 하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울퉁불퉁 불규칙한 도로면은 우리나라의 60년대 시골길을 연상할만큼 열악했고 차창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나는 1백년전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조선땅을 처음 밟고 느낀 바를 미국 본국에 보내셨던 편지 내용이 생각이 났다. "온 세상이 깜깜하고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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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라마불교에 젖어 있던 노인이 모든 우상을 버리고 돌아와 감격하며 세례를 받았다. |
10년전 몽골 입국 당시의 상황은 마치 언더우드선교사님이 조선 땅을 처음 밟고 느꼈던 것처럼 바로 그런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70년 넘게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생활하다 1990년 구 소련권의 붕괴와 함께 개혁개방이 시작된 몽골은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 먹고살기조차 힘든 상황이 마치 우리나라의 1950년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필자는 1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하여 몽골에서 첫밤을 아내와 함께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함으로 맞이했다.
"부족한 종들을 이땅에 불러주셨으니 저희들을 통하여 우리와 얼굴이 같은 동인종 몽골민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선교의 열매로 드릴수 있도록 당신의 거룩한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몽골에 입국하여 2월 27일 첫주일을 오전 11시에 울란바타르 한인교회(당시 안교성목사 시무)에서 눈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는데, 선교지에서 처음 만난 한인교우들의 따뜻한 환영이 큰 위로가 되었다. 당시 몽골에 파송받은 선교사님들은 대부분 젊은 30, 40대가 대부분이었는데 한국에서 22년간 목회하다 뒤늦게 선교지에 들어온 필자의 마음은 조급하면서도 먼저 선교지에서 수고한 선임선교사들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매사에 조심하며 정착훈련에 들어갔다.
당시 몽골은 개혁개방을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모든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었기에 선교사들의 생활도 생존의 문제가 가장 급한 것이었다. 시장은 열렸지만 시장에 상품이 없었다. 당시에는 습관처럼 외출할 때 배낭을 메고 다녔다. 혹 필요한 물건을 찾으면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입국한 안교성, 윤순재선교사 가정의 이야기를 들으면 1992년 초기에는 모든 것을 배급에 의존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고 하니 생필품을 구하는 기대감은 때로는 즐거움이 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색다른 생필품이 생기면 선교사들이 함께 나누고 작은 것에도 크게 감동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되었지만 그때의 감동을 찾을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하겠다.
몽골은 새로운 선교지로 한국교회의 각광을 받고 있었으며 총회에서도 몽골을 선교 정책지역으로 선정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은 연합의 모범을 보이는 선교지이다. 선교사로 입국하기전 여러 선교지를 방문했을 때 느낌은 선교사들간의 긴장관계가 많았고 같은 교단 선교사들끼리 혹은 같은 교회 파송을 받고 함께 사역하면서도 갈등관계로 불편해 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몽골에서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는 모습이 칭송들을만한 선교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 새롭게 선교의 문이 열린 몽골의 선교사로 입국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되었다. 연합하고 동역하는 아름다운 선교, 동인종 근거리의 선교, 이것이 몽골 선교의 매력이라 할 것이다.
'박~샤, 다라올지야!', 나의 두번째 고향
[ 땅끝에서온편지 ] <3> 선교사의 꿈을 이루다 몽골 안광표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6월 10일(목) 09:58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하나님의 선교는 동역선교이다. 함께하는 선교가 얼마나 귀한가를 몽골에서 보고 느끼게 되었는데, 1992년부터 시작된 우리 교단의 몽골선교는 처음부터 안교성선교사와 윤순재선교사의 동역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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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차이, 문화의 다름에서 겪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몽골은 어느새 가장 편안한 고향과 같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울란바타르에 위치한 교회에서 현지 교인들과 함께. |
필자는 주일 오전에는 안교성선교사가 담임으로 사역하는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주일 오후에는 우리 교단이 세운 몽골의 어머니 교회인 아멘교회(당시 안교성, 윤순재 선교사가 동역)의 몽골인 예배에 참석하면서 선교사들의 연합과 협력선교, 그리고 몽골 현지 지도자들과의 동역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간의 동역은 새내기 선교사들에게 마음 든든한 선교사역의 모습이었다. 선임 선교사들은 개척하고 신임 선교사들은 정착 훈련 등을 거쳐 선임 선교사들이 개척한 교회와 기관사역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우리 교단에서 두 번째로 개척한 교회는 아멘교회의 인적 협력과 한인교회의 재정적 협력으로 세운 올리아스테교회(오효강선교사가 개척 시작)이다. 오늘의 올리아스테교회는 올리아스테지역의 복음화를 책임지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 이후 세르겔트교회 등 수많은 교회들이 연합과 협력을 통한 열매로 세워졌다.
오후에는 아멘교회에서 몽골인들과 교제했는데 대학생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다. 윤순재선교사가 설립한 울란바타르대학의 학생들이 아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스승과 제자사이의 자연스러운 교제가 이루어졌다.
당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학생들이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와 "박~샤! 다라올지야!"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때 그 소리에 당황해서 학생들을 향해 한국말로 야단을 쳤던 기억이 있다. "너희들 선생님에게 그런 욕을 하면 되느냐?"고 꾸짖었다. 몽골어가 서툴렀던 내 귀에는 한국말로 "이 자식! 따라 올까~!"로 들렸던 것이다. 선생님을 배웅하며 "선생님! 다음에 만나요!"라는 말을 욕하는 소리로 오해했던 것이다. 그 이후 학생들은 나에게 인사를 할 때면 한동안 말을 하지 않고 눈으로만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있다.
선교지에서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현지인들과 오해가 생기게 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과 한국인이 같은 몽골리안 계통이다 보니 외모로 쉽게 구별이 가지 않아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질 때가 많았다.
당시 한국 대사와 국립대학 학술회에서 만났을 때의 일이다. "대사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깜짝 놀라면서 신기하다는 눈으로 필자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어디서 그렇게 한국말을 유창하게 배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 한국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직 몽골말은 배우는 중입니다"라고 했더니 계면쩍어 하시면서 한국인과 몽골인 구분이 안 되어서 몽골분이신줄 알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도 대사님을 만날 때면 정말 한국인과 몽골인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몽골인들의 초청을 받고 아내 최춘원선교사와 함께 동행하면 아내를 몽골인으로 알고 "당신은 몽골인 아내를 얻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겪으며 생활하는 가운데 몽골은 어느새 내게 가장 편안한 고향과 같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감사하지 못했던 이유
[ 땅끝에서온편지 ] < 4 > 주님의 선교는 섬김의 모델 몽골 안광표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6월 17일(목)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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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선교회 동역자들과 함께. |
선교지에서 언어가 통(通)하지 않는 것은 비단 현지인들과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인 선교사들끼리도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겪는 마음고생은 선교외적으로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선교가 자랑거리 있는 선교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다.
몽골 선교는 1991년 2월 홍콩에서 열렸던 제1회 몽골 선교 컨퍼런스에 함께 참석한 서양 선교사들과 한인 선교사들의 결의 가운데 서로 연합하고 협력한다는 중요한 결의를 한 바 있다. 선교학자들의 선교 현장에 대한 비판 가운데 쟁점은 고비용 저효율의 투자이다. 많은 비용을 투자하지만 늘 연합과 협력이 잘 되지 않아 중복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경쟁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문제점을 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소중한 선교비의 낭비와 이로 인한 갈등 관계가 가장 큰 약점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몽골 선교는 그런 면에서 일찍이 문제를 간파하고 연합과 협력을 실천하고 있었다.
몽골 선교가 교단과 교파를 뛰어 넘어 동ㆍ서양 선교사들이 서로 연합하여 아름다운 선교를 펼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지금도 몽골연합신학대학은 동ㆍ서양 선교사들과 몽골교회 지도자간의 아름다운 동역을 실천하고 있다.
필자는 2001년부터 교수와 대외협력을 담당하며 열심히 도왔고 몽골연합신학대학의 이사와 부이사장, 이사장으로 6년 동안 몽골연합신학대학을 섬겼다. 선교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사랑의 섬김으로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의 선교 방식을 따르려고 나름대로 섬김을 실천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인가 베풀었으니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던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당시 학생들의 복장이 초라하기에 교회에서 사역할 때 양복이 곧 사역을 위한 작업복이라 생각하고 한국교회에 부탁하여 남학생들 양복과 여학생들 양장을 가져왔다. 학생들에게 자기 몸에 맞는 옷을 한 벌씩 고르라고 했더니 자기 나름대로의 취향에 따라 옷을 골라 입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 고맙다고 하는 학생들이 없었다. 수업시간과 채플 설교를 통하여 너희들 양복과 양장을 당연한 것으로 받는 것 같다고, 너희들을 위하여 보내주신 분들에게 적어도 감사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학생들 반응이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들의 감사하지 않은 이유는, 본인들은 없어서 받았고 선생님은 있어서 주었는데 그것이 어찌 감사할 일이냐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수없이 나누었다.
졸업생들 가운데 그 당시 학생들이 목회하다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찾아와서 그 때를 회고하며 우리들은 사회주의 시절에 늘 정부가 주는 것을 배급으로 받고 살아서, 있으면 당연히 주는 것으로 알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감사하지 못하던 때였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주님의 선교가 섬김의 모델이었듯이 보다 겸손함으로 섬김을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몽골 지도자들과 아름다운 동역을 할 수 있도록 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다. 몽골선교가 끊임없이 아름다운 연합과 협력 선교를 이루도록, 그리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는 몽골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 연합과 협력을 통한 아름다운 동역 선교를 이루며 오직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선교가 되도록 끊임없는 기도를 부탁드린다.
각자의 달란트로 이뤄가는 하모니
[ 땅끝에서온편지 ] <5> 오케스트라와 같은 협력 선교 몽골 안광표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6월 24일(목) 10:09
10년 전, 필자가 입국할 당시 몽골에서 사역하던 우리 교단 선교사는 안교성 윤순재 선교사를 비롯해 5가정이었다. 다른 지역 선교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게 된다.
당시 매주일 월요일이면 함께 만나 식탁 교제를 나누고 선교현장의 경험과 보다 효과적인 사역을 위한 방안을 찾고 이를 위해 기도했다. 매월 첫째 주 월요일에는 헌신을 다짐하는 성찬식을 가지고 선교비의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공동사역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였다.
사실 선교현장에서 선교를 위해 헌신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선교사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영적인 게으름에 빠지는 안타까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문제점을 염두에 두고 말로만의 헌신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먼저 솔선수범하는 헌신을 통해 현지 지도자들에게 헌신의 모범을 삶으로 보이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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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는 오케스트라와도 같다.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을 나누고 조율을 통해 동역선교를 이뤄나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성찬식을 집례하는 안광표선교사. |
심리학자 하워드 크라이벨은 교회를 가리켜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했다. 사실 오케스트라는 여러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현악과 관악, 타악기 등이 총동원된다. 수많은 악기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두 다 한 악보에 충실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총지휘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혹 개별적으로 관악이나 타악, 현악에 세계적인 연주자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함께 참여한다고 할 때 자신의 실력만 믿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르지 않고 자기만의 소리를 내면 그 연주자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는 필요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선교야말로 정말 오케스트라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선교사들이 저마다 가진 달란트가 다르다. 자기만이 자랑하는 달란트가 있다. 그러나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을 나누고 조율을 통해 함께하는 아름다운 동역선교가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선율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몽골이 자랑할만한 선교지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운 동역선교를 위한 노력에 있다. 그러나 어찌 몽골의 선교현장이라고 해서 군대조직처럼 일사분란하게만 움직여 왔겠는가?
현재는 총회 파송 선교사가 24가정의 대가족이다보니 매주일 모이지는 못하지만 매월 첫째주 월요일에는 헌신을 다짐하는 성찬식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며, 셋째주 월요일에는 현장의 선교정보와 문제점들을 의논하고 끊임없이 협력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다양한 선교사역 속에서 서로 격려하며 기도하고 협력하는 아름다운 동역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연합과 협력을 통한 동역 선교에 있어서 아름답고 가슴 뿌듯했던 일은 매월 함께 드린 헌금을 몽골선교 연합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몽골연합신학대학의 리모델링을 위해 사용했을 때였다. 사실 우리 교단이 연합신학대학의 설립에서부터 크게 기여해 왔지만 지금은 서양선교사들에 비해 재정적으로나 인적으로 기여하고 있지 못하는 아쉬움이 많다.
몽골선교에 있어서 지도자를 양성하는 사역만큼 중요한 일이 없지만 파송 교회나 기관의 인식부족으로 전임사역을 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후원 교회나 기관의 인식 전환을 통해 신학교 전임사역을 크게 늘리고 지원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몽골 선교의 마르지 않는 샘과 같고 연합의 중심이 되는 몽골연합신학대학을 위하여 한국교회의 깊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