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최고관리자 0 1,438 2020.06.19 20:45

우리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계획

[ 땅끝에서온편지 ] (1) 선교사역의 시작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8월 19일(수) 14:36
  
▲ 알마아타에 세워져 있는 시온교회의 모습. 현 사역의 중심지이다.

요즘 들어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지 가뜩이나 자신을 드러내는 부분에 대하여 조심하게 되고,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을 드러낸 부분에 대하여 많은 회개를 하고 있던 차 원고 청탁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 이것이 또 하나의 나를 드러내는 것 같아 마음에 많은 부담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로 결정한 것은 그동안 한국교회 특히 우리 교단의 선교정책 가운데 늘 마음에 불만을 품고 있던 것이 있어 그것을 내 스스로 고쳐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것은 시니어 선교사들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경험과 실수와 시행착오들을 겪어 온 시니어들의 경험은 교육을 통하여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한 지역 안에서의 경험은 그 지역 안에 있는 사람만이 안다. 그 경험은 다음에 선교사로 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좀 더 효과적인 선교를 위하여 이러한 경험은 반드시 나눠야 하는 것이고 또 자료화해야 한다. 그러기에 나의 조그마한 경험을 나누려 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준비되지 못한 선교사였다. 신학교 시절 한 번도 선교사 파송 연구회에 참석한 적도 없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기도한 적도 없고 헌신한 적도 없다. 그러던 내게 1991년 2월 어느 날, 만난 적도 없고 교제한 적도 없는 미국 워싱톤의 한 이민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선교사 제의를 받았다. 그 교회는 메릴랜드에 있는 시온교회로 이순각목사께서 시무하시는 교회다. 그 목사님은 당시 칠레에 선교사로 있던 나의 친구로부터 소개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미 교회 파송선교사로 정하였으니 마음을 정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이민교회였지만 선교사 파송을 위해 3년을 기도했다고 했다. 그러기에 나를 만나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3년 만에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너무나 급작스런 제의였지만 그 목사님의 믿음이 너무나 감동적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러겠다"고 응답하였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한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선교사로 가기로 하였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 후 몇 번 연락을 하면서 선교지가 중미의 도미니카라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서 가깝고 그 교회가 자주 왕래하며 함께 선교를 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도미니카를 선교지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결정을 하고 난 후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그때부터 스페인어를 공부하며 준비하다가 그 해 5월, 답사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미국에 가서 처음으로 이 순각 목사님을 만났고 첫인상은 마치 시골 이웃집 아저씨 같았지만 대화하는 내내 그 분은 선교에 거의 미쳐있는 분이었다. 선교에 대하여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너무나 배울 것이 많은 분이었고 사실 내가 나갈 것이 아니라 그분이 선교사로 나가면 아주 효과적으로 선교를 이룰 것 같은 준비된 선교사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다. 답사를 위해 미국에 도착하였을 때 목사님은 이미 도미니카를 다녀오셨고 목사님의 마음에는 선교지를 바꾸기로 정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구소련이 페레스트로이카를 하여 미국에 있는 많은 이민교회 목사님들이 소련을 다녀왔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목사님은 소련을 다녀오신 몇몇 목사님을 만나게 하였고 그 목사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선교사로 나가려면 황금어장인 소련으로 가라고 하셨다.
 
선교지가 소련이라는 데에는 더 많은 망설임이 있었지만 이미 나가기로 결정한 바에야 어디를 가든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91년 6월 다시 미국의 뉴욕을 거쳐 모스크바로 들어갔다.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정신이 아찔하였다. 이것이 진정 공산주의 종주국의 수도인가를 의심하게 되었다. 공항검색대는 너무나 삼엄했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은 마치 전쟁터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화장실은 벽도, 문도 없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가는 내내 마치 죽음의 도시를 지나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은 웃음이 없이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평안함을 느낄 수 없었고 모든 가게는 텅텅비어 있었다. 크렘린 궁 옆에 있는 러시아 호텔에 여정을 풀고 붉은광장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며 사람들과 어설픈 영어로 몇 마디를 나누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전혀 말하지 못하였다. 황혼이 기우는 가운데 박물관으로 변해버린 바실리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홀로 눈물을 흘렸다. '복음을 잃어버린 교회, 예배를 잃어버린 교회'를 보며 지금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도 들었다. 며칠 머무는 동안 먹을 것도, 먹을 곳도 없었다. 결국 우리 일행은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수도)로 가기로 하고 비행기 표를 구해 오라고 고려인에게 부탁했더니, 온 종일이 걸려 온 이 고려인은 타슈켄트 가는 비행기 표가 없어 알마아타(현 알마티)로 가는 비행기 표를 구해왔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러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의 강력하신 인도하심으로 이끄셨다.
 
우리 일행은 5시간의 비행 끝에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 도착했다. 한 여름에 눈 덮인 천산산맥은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그 천산 기슭에 자리 잡은 녹색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진 알마아타는 온통 나무숲으로 덮여 있었다. 도시는 조용하고 녹색의 나무로 덮여 있으며 하얗게 눈 덮인 천산이 병풍처럼 펼쳐 있는 모습이 너무나 황홀하게 보였다. 그러나 도시의 내부는 모스크바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처음 도시를 접하는 순간 하나님은 내 마음에 강력하게 이곳이 내가 일해야 할 곳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 순각목사님은 교단에서 처음으로 파송 받는 소련 지역의 선교사이니 만큼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중요하니 모스크바에 머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지만 나는 결국 알마아타를 선택하였다. 아니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곳으로 이끄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나의 선교는 시작되었다.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아시아의 중심지, 선교적 재조명 필요

[ 땅끝에서온편지 ] < 2 > 나의 선교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8월 26일(수) 16:00
  
▲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의 교회학교 어린이들.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15개의 독립된 나라로 나뉘어졌다. 그 나라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누어지는데 슬라브 계통과 중앙아시아라는 나라들로 구분된다.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로 중앙아시아 다섯 개 나라(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가운데 가장 큰 나라이다. 전통적으로 유목민이며 기마민족이고 자유를 사랑하는 몽골 계통의 사람들이 전통적인 카자흐 족이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한 민족 분산 정책에 따라 많은 민족들이 이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고 지금은 1백20여 종족이 모여 사는 다민족 사회를 이루고 있다. 요즘은 카자흐스탄에 대한 일반적 정보는 인터넷을 통하여 다 알 수 있다. 다만 선교적인 차원에서의 카자흐스탄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선교지가 중요하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만은 카자흐스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실크로드에 대한 새로운 관심들을 가지고 있다. 이제 세계는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나라들이 경제 강국을 지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중앙아시아는 새로운 개척지이며 엄청난 지하자원과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보물창고로 관심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카자흐스탄은 세계의 3대 힘이라고 하는 에너지와 식량과 핵의 힘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물론 지금은 핵을 처리함으로 비핵보유국이 되었지만 엄청난 양의 원유와 밀 생산은 앞으로 카자흐스탄이 강대국이 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주 시대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인공위성 발사대가 카자흐스탄에 있어 이것을 이용하려는 많은 나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아홉 번째가 되는 넓은 영토와 1천6백만 명의 인구, 1백20여 종족, 그리고 에너지와 식량 등 경제대국으로 가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나라이다.
 
선교적으로 볼 때 카자흐스탄은 제3세계가 아니다. 다양하면서도 높은 문화 수준을 가지고 있고, 경제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어느 나라와도 우호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지금은 선교지이지만 멀지 않아 선교의 주체국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카자흐 종족들은 모슬렘을 따르지만 정책상 소수민족들이 가진 문화와 종교를 최대한으로 인정하며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나라이다. 현재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이러한 정책을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2년마다 세계 각 종교 대표자들이 모이는 종교포럼을 개최하여 종교 화합을 통한 세계 평화를 모색하고 있다.
 
선교적으로 볼 때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스탄에서의 선교적 관점은 점령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접근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경교가 번성하던 곳이었으며 공산주의 이전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많은 영향을 미쳤던 곳이었다. 수십 년 동안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함으로 러시아어 속에 담긴 기독교적인 영향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은 나라이다.
 
카자흐스탄은 복음이 서진을 하는 중요한 길목을 차지하고 있으며 대륙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그동안 선교의 불모지였던 중앙아시아를 통한 실크로드 선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 땅에 복음이 한국 선교를 통하여 꿈틀거리고 있다. 한국 선교가 카자흐스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 것은 역시 고려인이라는 중간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1937년 원동에 살던 이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여 이곳으로 옮겨졌고 그해 겨울을 나기 위하여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살았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그 해 겨울에 이주한 사람의 반이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우쉬또베에는 그 때의 땅굴과 무덤들이 남아있다. 비참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선교의 동력으로 사용하셨다. 이들이 그 어려움 가운데도 자손들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문화를 전수함으로 한국 선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아론과 같이 선교사들의 입이 되어 준 것이다.
 
초대 기독교가 유대 디아스포라들에 의하여 급속하게 퍼질 수 있었다면 구소련의 선교는 고려인이라는 디아스포라들이 있어 한국 선교를 힘있게 한 것이다.
 
이것이 어느 나라 선교사도 할 수 없는 선교의 동력이 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21세기 한국 교회에 주신 최대의 선교지는 바로 중앙아시아이고 그 중앙아시아의 중심은 카자흐스탄이다. 이제 카자흐스탄은 한국교회에 선교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영적 자녀가 또 다른 자녀를 낳도록

[ 땅끝에서온편지 ] < 3 > 교회개척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9월 02일(수) 17:19
  
▲ 영적 아들과 같은 현지 지도자 보리스목사를 세워 지난 2002년 분립한 안디옥교회의 예배 모습.

우리 교단의 선교전략의 중심은 교회 개척이다.
 
선교의 가장 기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고 현지 지도자를 세워 교회를 그들에게 이양하는 것이다. 물론 선교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가지는 분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런데 많은 선교사들이 교회를 경쟁적으로 개척하고, 또 숫자 경쟁하듯 교회를 세워 사후 관리가 되지 않아 세워진 교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세워 놓은 현지 사역자들은 사역지를 떠나거나 아니면 이단으로 흘러들어가는 경향을 참으로 많이 본다.
 
단시간에 훈련시키고, 단시간에 목사 안수를 주어 교회를 맡기지만 그들은 사실 밑바탕부터 준비된 사람들이 아니다. 많은 교회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그들을 계속 교육시킬 제도를 만드는 것도 아주 중요한 선교의 전략이다.
 
필자는 1991년 7월 카자흐스탄을 처음 방문한 이후 1992년 1월 18일 온 가족이 모스크바를 거쳐 19일 알마아타로 들어왔다. 그날이 주일이었다. 새벽에 도착하여 짐을 아파트에 던져 놓고 먼저 들어온 선교사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다음주 1월 26일 아파트에서 우리 집 식구 4명과 우리를 가이드하였던 고려인 가족 세 사람(그 후 통역 겸 전도사가 되어 지금까지 섬김)이 모여 모두 7명이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알마티 시온교회의 태동이다.
 
그 다음 주는 아이들 러시아어 가정교사(지금 전도사가 되어 교회를 섬김)가 예배에 참여를 하였고 점점 사람들이 늘어 3개월이 지났을 때는 아파트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당시에 대체로 큰 건물들에는 공산당 회의를 위하여 강당들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빌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몇 번을 쫓겨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차에 모든 앰프 시설이며 악기들을 싣고 다니며 예배를 드렸다.
 
이곳의 사람들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잘하지만 학교에서는 음악 시간이 없어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성가대를 세워보니 모두가 청음으로 찬송을 따라하기 때문에 4부로 부른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또 지휘를 할 사람이 없어 강대상에 있던 내가 성가대 지휘도 하고 또 다시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였다.
 
개척한 후 1년이 지난 후 헌금을 하게 되었고 다시 1년이 지난 후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 연말 결산을 하고 다음 해의 예산을 세울 때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지만 함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매해 넘치게 채우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교인들의 신앙이 깊어져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헌금을 목사가 다 챙겨 가져가는 것으로 생각을 하여 분기마다 공동의회를 열어 헌금을 모두 공개를 하였다.
 
그런 후 십일조에 참여하는 교인이 점차 늘게 되었고, 교회가 재정적으로는 개척 후 5년 만에 자립을 하게 되었다.
 
알마티에 교회를 개척한 후 1년 만에 알마티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카스켈렌이라는 곳에 다시 교회를 개척하였다.
 
2년을 섬긴 후 마침 새롭게 들어온 타 교단 선교사가 사역지를 찾고 있어 그 교회를 이양을 하였다. 지금도 그 교회는 은혜 가운데 현지 지도자를 세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고 10년을 데리고 있으며 키웠던 내게는 영적 아들과 같은 보리스 목사를 현지 지도자로 세워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는 안디옥 교회를 2002년 분립하였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미 그 교회도 자립을 하여 활발하게 사역을 전개하고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안디옥 교회에서 개척 후 3년 만에 다시 아르나 교회(비치슬라브 목사)를 개척하여 그 교회도 자립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가 얼마나 많은 교회를 세우는가도 중요하지만 세워진 현지 지도자들을 통하여 다시 교회가 세워지도록 만드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고난 뒤에 오는 축복

[ 땅끝에서온편지 ] (4 ) 비자와 자녀문제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9월 10일(목) 15:07
  
▲ 선교사들에게는 비자와 자녀문제를 비롯해 많은 어려운 문제가 닥쳐오지만 하나님은 항상 더 큰 복으로 갚아주신다. 사진은 카자흐스탄인들의 예배 모습.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본연의 사역 외에 느끼는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는 '비자'와 '자녀 교육'이다.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 두 가지 문제로 고민하고 마음 졸이며 심각하게 기도한다. 그래서 어떤 선교사는 비자를 마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선 거주가 안정되어야 다른 일들을 추진할 수 있을 터인데 비자가 안정되지 못하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1991년 처음 소련으로 입국을 하였을 때는 나라들이 독립되기 전이라 러시아 비자 하나를 받으면 구소련 지역 어디든지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1991년 12월 15개의 나라들이 독립을 하면서 각 나라들은 개별적으로 우리나라와 수교를 맺었고 비자도 각 나라별로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호의를 가지고 1년짜리 비자를 주기도 했지만 2~3년이 지난 후부터는 비자 발급으로 선교 활동을 서서히 죄기 시작하였다.
 
당시 비자를 받기 위하여 서류를 갖추는 데만 한 달이 걸릴 정도였다. 가슴 졸이며 한 달을 준비하여 오빌(비자관청)에 가져가면 비자 기한을 석 달을 주기도 하고 6개월을 주기도 하였다. 늘 불안한 마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3년이 지났을 때 비자를 연장하러 오빌에 들어갔더니만 "당신은 3년이 지나 이제 비자를 줄 수 없으니 이 나라를 떠나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급기야는 준비한 서류를 사무실 바닥에 팽개치는 것이었다. 흩어진 서류들을 다시 주섬주섬 주우며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면서 하나님께 항의하는 기도를 하였다. 내가 언제 선교사 된다고 하였느냐고, 왜 나를 이곳으로 보내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하느냐고 어리석게 보이지만 심각한 항의 기도를 하였다. 그 다음날 똑같은 서류를 가지고 다시 오빌에 가니 어제 일이 미안했는지 그 사람이 웃으며 비자를 찍어 주었다. 기쁜 마음으로 나와 비자를 보니 한달을 찍어 준 것이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고 오기가 생겼다. 그 당시 처음으로 '준 영주권'(여권 기한까지만 거주를 허락하는 주민등록증)제도가 생겨 그것을 신청하였다. 24가지의 서류를 준비하여 한달만에 신청을 하고 6개월을 기다렸더니만 '준 영주권'을 내어 주었다. 지금도 그 덕을 보고 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느끼는 가장 큰 행복 중 하나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처음 선교사로 떠날 때 가장 고민되는 문제는 아들이었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들의 속을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다. 먹으면 토하고, 설사하고, 밥을 한번 먹이려면 밥그릇을 들고 두 시간을 따라 다니며 먹여야만 하였다. 돌때 선물로 들어온 옷을 세 살이 될 때까지 입혔다. 그 아이가 선교지로 떠날 때 9살이었다. 그 때까지도 사람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아이를 데리고 선교지로 간다는 것이 무리였다. 더군다나 당시 선교지의 의료 환경이 우리나라 보건소만도 못하였다. 그렇지만 가족이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아내의 강력한 주장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가기로 하고 3년을 먹일 수 있는 장약을 준비하였다. 약만 한 가방이었다.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것이 너무나 긴장되었다. 말도 모르고, 길도, 문화도, 사람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매 순간이 긴장되고 초조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며칠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을 느끼었는데 아이는 그동안 아무 이상이 없었다. 신기할 정도였다. 매일 같이 약을 먹어야 하는 아이가 며칠을 약을 먹지 아니하고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아이는 점점 건강해지고 준비했던 장약은 한 알도 먹지 않고 모두 버렸다.
 
그 아이는 선교지에 있는 동안 병원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딸도 아들도 말 한마디 못했지만 현지 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모두 끝냈다. 딸 아이는 피아노를, 아들은 국내의 대학을 마치고 모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잘하고 있다. 러시아어를 잘 구사한다는 것이 그에게 특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교지에서 겪는 고난을 그냥 흘리는 법이 없다. 반드시 은혜로 갚으시고 고통의 크기만큼 복의 크기도 달리 주시는 것을 선교지에서는 너무나 많이 느낀다. 할렐루야!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선교지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

[ 땅끝에서온편지 ] < 5 > 교회 건축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9월 16일(수) 15:20

  
▲ 부천 참된교회의 재정지원으로 알마아타에 건축한 현지 교회. 설계대로라면 5년이 걸릴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9개월만에 공사를 마쳐 IMF를 피할 수 있었다.
선교지에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선교 정책상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문제는 지역의 사정에 따라 다르리라고 본다.
 
구소련에서의 선교는 사실 제3세계의 선교와는 다르다. 이미 러시아 정교회와 이슬람교라는 전통 종교가 자리잡고 있고,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들과 웅장한 사원들이 현지인들의 관념 속에 박혀 있는 곳에서 홀을 빌리거나, 아파트나, 가게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이들에게는 이단같이 보일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는 실망을 하고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교회란 보이는 것이 다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 하여도 이들의 오랜 전통과 깊이 박힌 관념을 깨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사실 내게는 교회 건축이 선교정책을 떠나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1993년 1월 부천 참된교회의 박창하목사님이 선교지를 방문했다. 파송 받은지 일 년이 되던 때이다. 그 당시는 직항로가 없던 때라 모스크바를 거쳐 알마아타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다섯 시간이 소요된다. 모스크바로 마중을 나가 목사님을 만나 알마아타로 들어왔는데 오신 이유가 무명으로 어떤 분이 알마아타 교회 건축 헌금을 하시어 그것을 갖다 주러 오셨다는 것이었다.
 
사실 들어온 지 일 년밖에 안되었기에 교회 건축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터라 교회 건축을 위해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어떤 권사님이 기도 가운데 건축 헌금을 하셨다는 것이다.
 
당시는 이곳은은행 시스템이 잘 돼 있지 않아 돈을 송금하기가 어려웠다. 그 헌금을 일단 받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시작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95년 12월 내게는 아주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생겼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아파트 문을 여는 순간 밖에 기다리고 있던 강도 네 명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권총과 칼을 들고 들어와 온 식구들을 묶고 돈을 요구하였다. 목에 칼을 겨누고 손을 뒤로 묶고 입에 벗어 놓은 양말을 틀어넣었다. 소파의 외피를 벗겨 머리에 씌웠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돈을 찾아내고는 식구들을 묶어 놓은 채로 집을 나갔다. 다행히 식구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은 후 모든 것이 싫었다.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응답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일 년이 지나갈 때 기도하기를 만약에 이곳에 남아야 한다면 남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그 때 하나님은 내 마음에 교회 건축을 하게 하시었다. 1997년 0시 예배를 드리며 교인들과 교회 건축을 놓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2월에 한 달의 여유를 가지고 모금을 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였다. 제일 먼저 찾아간 교회가 부천 참된교회이다. 교회 건축을 요청하기도 전에 교회 건축 헌금을 보낸 교회이다. 목사님께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린 후 주일 낮 예배 설교를 맡아 설교를 하였지만 목사님의 요청에 의하여 헌금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낮 예배 후 임시 당회에서 설계도를 놓고 설명을 하고 오후 예배를 다른 곳에서 인도하기 위해 교회를 나왔다. 그 날 저녁 박창하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당시 건축 예산이 32만 달러였는 데 그 당시로는 내가 감당하기엔 큰 돈 이었다. 그런데 저녁예배 후 임시 재직회가 모여 그 돈을 모두 그 교회가 담당해 주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곧 바로 알마아타로 들어와 3월 첫 주일에 우중 가운데 교인들과 함께 기공예배를 드리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설계대로는 5년이 걸린다는 건축을 9개월 만에 끝을 내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내게 서두르게 하시었는지 공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인 1997년 11월,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시는 하나님! 지난 호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고난 뒤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워진 교회는 모슬렘의 사원이 멀지 않은 곳에 십자가를 높이 달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공식적인 교회로 등록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내게는 이 교회 건축이 교회를 건축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의 현장이었다.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6)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 땅끝에서온편지 ] < 6 > 선교지에서의 실수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9월 22일(화) 10:08
  
▲ 천진난만한 모습의 주일학교 학생들 모습.

선교사가 선교지에 도착하게 되면 수없이 많은 낯선 상황들을 접하게 된다. 그 상황들이 때로는 선교사들을 무척이나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많은 실수와 실패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도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었다. 그렇다고 나의 실수와 실패가 선교의 실수나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나의 실수와 실패들을 통하여 더 효과적인 선교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구소련 선교는 타 지역의 선교들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려인이라는 디아스포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1~2년 사이에 수많은 한국 선교사들이 한꺼번에 물밀듯이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고려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어설프지만 한국어로 선교사들의 입을 대신하였다. 타 지역에서는 2~3년간 필히 언어 연수를 하게 되어 있지만 구소련의 선교 초창기는 그러한 언어 연수의 기회도 없이 사역이 바로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매일매일 새로운 상황들이 전개됨으로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할 수가 없었다. 사역을 하면서 언어를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다가 고려인들이 통역의 역할을 함으로 언어 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고려인 통역을 쓰게 되고 그것은 선교사들의 언어 훈련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이 언어 공부를 하기보다는 통역들을 먼저 훈련시키고 그들을 통하여 전도가 되게 한 것이다. 물론 장단점이 있다. 결국 통역들이 사역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고 또 사역들이 빠르게 전개 되었다는 것이다. 또 통역들을 통한 관계 전도가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언어를 공부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교인들도 어설픈 선교사들의 말보다는 오히려 시원스러운 통역들의 말을 듣는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앞으로 계속될 수는 없다. 선교사들이 통역에 의존하는 시대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 그리고 구소련 선교도 선교사들이 교회를 개척하는 시대도 지나갔다. 현재까지도 수없이 많은 현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이 교회를 개척하며 그들이 직접적으로 전도를 하고 있다. 이제 선교사들은 이들을 재훈련하고 후원함으로 사역을 물려  주어야 할 때가 이르렀다.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러시아어가 늘 마음에 부담으로 남는 것이 내게는 실수이다.
 
또 하나 마음에 부담으로 남아 있는 것은 현지 교회를 이양하는 문제였다. 10년을 정신없이 사역에 임하였고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다. 안식년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교회를 건축하였고 어느 정도 교회는 자리를 잡고 자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그만 후원하는 교회와 관계가 정리되게 되었다. 다른 후원교회를 구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나가게 되었고 쉽지 않은 가운데 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십년을 선교지에 있다 보면 국내 목회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되는데 후원도 정리된데다가 기존 교회로부터의 청빙은 물리치기 어려운 시험이었다. 결국 10년의 사역을 정리하기로 하고 한 달 만에 사역 지를 후임에게 넘기고 선교사 를사임하고 국내 목회를 하게 되었다. 내게는 너무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현지 교회가 전혀 준비되지 못한 가운데 이양은 너무 많은 문제를 안게 되었다. 교인들과 신임 선교사와의 갈등이 있게 되었고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일 년 만에 다시 선교지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지친 가운데 내려진 나의 커다란 실수였다. 물론 후임 선교사는 그 후 타 지역으로 가서 사역을 아름답게 열었다. 한 곳을 떠났다가 다시 그곳으로 간다는 것이 커다란 오점으로 생각되어 심적으로도 힘들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로 인하여 교회를 더 넓게 분포되도록 하시었다. 후임 선교사에게는 새로운 도전을, 내게는 선교에 대한 마음의 확정을, 교인들에게는 새로운 교회 개척을 하게 하시었다. 사실 선교사에게 있어서 안식년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 사역들을 위한 필수 사항이며 선교사역을 바르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위의 두 가지 실수는 분명히 선교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나의 실수도 사용하시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었다.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바른 영적 지도자 배출

[ 땅끝에서온편지 ] < 7 > 신학교 사역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9월 30일(수) 10:54
  
▲ 현재 진행중인 신학교 건축현장. 예배실과 강의실, 식당, 기숙사 등을 겸비한 약 3백 평 규모의 건물이 될 예정이다.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선교에 있어 교회 개척과 아울러 가장 중요한 사역중 하나가 신학교 사역이다. 현지 지도자들을 바르게 양성하여 그들로 복음을 전하게 하고 교회를 개척하게 하며 선교사가 담당하던 사역지를 훈련된 현지 지도자들에게 이양하는 것은 선교의 토대를 반석위에 세워 현지를 복음화하는 일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신학교 사역이 실제적으로 선교지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선교지라는 이유로 인하여 신학교 난립과 신학의 부제가 심각하며 속성과정으로 인한 목회자 양성, 경건이 뒷받침 되지 아니한 지식 습득, 그리고 장학금 명목으로 주어지는 생활비 등이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신학교 사역이 대외 과시용이 되어 본질을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인도 선교 초창기 큰 꿈을 그리며 교단이 다른 몇몇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연합 신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연합이라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한 우를 범하였다. '무엇이든 하나가 되어야만 연합'이라는 생각을 그 신학교가 일년 반 만에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시 배웠다. 연합이란 하나가 되는 것도 있지만 여럿이 서로를 인정하고 하나의 뜻을 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1995년 장로교 선교사들로만 구성된 '카자흐스탄 장로회 신학교'를 열었다.

물론 장로교 학생들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선교사든 의탁을 하면 받아 주었고 교육을 시켰다. 3년의 과정으로 처음 학생들은 대부분 각 교회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들을 먼저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그들이 대부분 교회의 지도자들로 목회자가 되어 섬기고 있다. 신학교는 법인으로 등록을 마쳤고 교육은 계획했던 대로 잘 진행되었다. 문제는 신학교의 후원 이사들이 신학교가 자리를 잡아 가면서 재단 이사의 역할을 하려는데 있었다. 선교는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원 이사들이 선교사들을 믿지 못하고 현지의 일을 잘 알지 못하면서 모든 일에 간섭을 하고 결국에는 선교사들을 몰아내고 이사들이 직접 그 신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현지 지도자들을 개별적으로 지원하면서 목사 안수 문제까지 선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후원 이사들이 개입을 하면서 선교사들 간의 불화와 학교 운영을 파행으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신학교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는데 선교사들과 동떨어진 신학교는 생명이 길 수 없다. 결국 본인은 신학교의 사역을 넘겨주게 되었고 그 후 카자흐스탄 장로회 신학교는 당국으로부터 사역 정지 명령을 받았다. 다행히도 그동안 졸업한 학생들이 곳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들을 담당하고 있지만 졸업생 가운데 많은 학생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신학교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학교를 졸업한 현지 지도자들이 속성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들을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 교만이 늘고, 계속 교육이 없기에 그들은 세미나만 있으면 쫓아다니며 결국 이단으로 흐르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2006년 새롭게 부천노회를 중심으로 후원 이사들을 구성하여 2007년 알마띠 신학대학원을 개교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현재 사역하고 있는 현지 목회자들과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만 받아들이는 목회자 계속 교육 과정으로 개설하였다. 모두가 사역을 하고 있는 현지 지도자들이기에 매일 수업을 할 수 없고 한 달에 일주일간 하는 집중 강의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며 2년의 과정과 논문이나 16주 교안을 작성하게 하고 있다. 사실 현지 지도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 요원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언제 자리를 떠나야 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교수 요원을 기르는 것은 목회자를 기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강의는 주로 객원교수들로 충당하며 실천신학 쪽으로 많은 강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신학교를 운영함에 있어서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선교사가 자신을 통하여 모든 일을 이루겠다는 생각만 가지지 않는다면 차분히 바른 교육을 통하여 바른 영적 지도자들을 배출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후원 이사회의 도움으로 신학교 건물을 건축하고 있다. 예배실과 강의실, 식당과 기숙사를 겸비한 약 3백평 건물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 섬김ㆍ봉사의 본 보여

[ 땅끝에서온편지 ] < 8 > 선교의 접촉점, 경로대학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0월 21일(수) 11:42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선교지에서 겪는 많은 문화적 차이 가운데 가정적 구조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이혼도 많고 나이가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어머니와 딸이 한 아파트에 살면서도 식사를 따로 하며, 한 냉장고를 쓰면서도 칸을 나누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자녀가 어릴 때는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다가도 18세가 되면 더 이상 돌보지를 않으려 하는 것이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것을 많이 느낀다. 그래서 젊은이들도 빨리 독립을 하지만 노인들도 대부분이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1998년 교회를 건축한 후 주중에 남아 있는 공간을 이용하여 무슨 사역을 할까 생각하다가 노인들을 위한 경로대학을 열기로 하였다.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갖가지 프로그램과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다. 주변에 그러한 사역을 하는 사람이 없어 염려가 되면서도 무료하게 보내고 있는 노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경로대학을 열었다. 나이가 들면서 누구도 초대해 주지 않으며 갈 곳조차 잃어버리고 사는 그들에게 경로대학은 참으로 흥미롭고 아주 신선한 프로그램이었다. 젊은 시절 곱게 차려 입었던 드레스를 꺼내 입으며 마음껏 멋을 내고 교회로 나오는 노인들을 보며 진정 이들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경로대학의 '춤 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분장한 지역 노인들.


교회를 나오기 까지는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파 절뚝거리며 나오는 사람들이 춤추는 시간만 되면 마치 젊은이들처럼 춤을 멈추지 아니한다. 너무나 즐거워하며 얼마나 열정적으로 참여를 하는지 방학을 갖는 것을 싫어하는 대학이 경로대학이다. 한 가지 문제는 경비였다. 한 학기를 보낼 때마다 많은 경비가 소요되어 그것이 좀 염려스러웠지만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은 모슬렘이라고 말하며 교회는 나오지 않지만 이 프로그램을 너무나 좋게 본 카자흐의 한 젊은 사업가가 8년 동안 매 학기마다 전액 후원해 주었다.

지난 세계의 경제 위기로 인하여 더 이상 후원이 힘들게 되었지만 그 후 또 다른 사람이 이것을 후원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며 이 프로그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프로그램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9년을 이어왔다. 그동안 소문이 나서 국영 TV에 두 번이나 방영이 되었으며 구청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좋게 여겨 권장 사업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노인들 자신들도 이제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들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체적으로 잘 준비하여 위문 공연도 다니며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를 하는 것이다. 사실 공산주의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며 섬기고 봉사한다는 것은 별로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모든 복지 시스템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봉사한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곳의 노인들은 공부도 많이 하고 달란트가 많은 노인들이지만 사회적 구조로 말미암아 그것을 발산할 기회가 없었는데 경로대학은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삶의 탈출구이다. 연극을 하던, 시 낭송을 하던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경로대학을 나오면서 그들의 삶이 달라지게 되었다. 활기가 넘치고 섬김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경로대학은 노인들에게 교회가 그들의 삶에 가까이 있음을 알게 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재미로 느끼게 하였다. 믿음이 없던 노인들 이었지만 이제 교회 청소를 하는 것이나 교회 모든 화분을 관리하는 것은 모두가 노인들의 몫이다. 심지어 주일 예배 후 식당에서 설거지 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노인들이 섬김과 봉사의 본을 보임으로 다른 젊은 교인들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는 어느 나라이든 노령화 사회가 되고 있다. 이곳 카자흐스탄도 예외는 아니다. 노인의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이 카자흐에서도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여기에 많은 교회들이 경로대학을 열어 사회적 봉사를 하는 것은 선교적으로 아주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경쟁심 버리고, 성령님 의지해야

[ 땅끝에서온편지 ] < 9 > 연합의 장, 선교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0월 29일(목) 10:09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그때는 언어가 아직 준비되지 못한 때라 통역을 대동하여 상담을 하겠다고 하였더니만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우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니 어떻게 상담이 되겠느냐고 하였더니 자기가 아주 쉽게 이야기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혼자서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다. 그런데 정말 가장 쉬운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고만 가는 것이다. 울면서 몇 마디 하였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도 울고 나도 울고 그리고는 끝에 내가 한국말로 기도하고 상담을 끝냈다. 그 사람은 내가 무슨 기도를 하였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교회 집사가 되어 잘 섬기고 있다. 이런 것이 선교인가 보다 생각을 하였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이다.

  
▲ 서로 선교 현장의 이야기를 나누며, 카자흐스탄을 향한 선교 열정을 더욱 고취시키기 위해 지난 달 30일 열렸던 한인선교사협의회 컨퍼런스.

선교지는 가장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곳이다. 그런데 가장 성령님을 의지하여야 하는 선교사들이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을 잘 지키지 못한다. 물론 파송 단체가 다르고 후원하는 교회가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사역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는 되지만 한국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지도 국내에서 개척교회하는 양으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후원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선교사는 교인 수로 자기의 능력을 인정받으려 하고 그러기에 선교보고도 과장하여 할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또 후원교회도 시간이 지나면 이제 자립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하며 선교비를 중단하는 사례도 있다. 선교사는 사실 현지로부터 어떤 것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다. 선교사가 그곳으로부터 사례를 받는다면 그는 더 이상 선교사가 아니라 그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교사는 어디까지나 선교사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선교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세운 교회들이 자립의 길을 가야하지만 그 자립이 선교사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목회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선교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교인 때문에 선교사끼리 관계가 불편해지고, 다른 선교사와 비교의식에 시달리고, 불필요한 경쟁심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 선교 현장의 이야기이다. 선교사가 올바른 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1991년 카자흐스탄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들어오며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는 사실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나라들이 독립하기 전이라 모든 것이 어수선 할 때였다. 처음 들어온 선교사들이 마음을 모아 한인 선교사 협의회(한선협)를 만들었다. 매월 첫주 월요일 돌아가면서 식사를 대접하며 모임을 가졌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아름답게 전해지고 있다. 교단과 선교단체를 초월하여 매달 모임을 가지며 친교하며 식사하고 연합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교회학교 교사 강습회와 선교 전략 세미나, 전체 선교사들을 위한 영성집회, 그리고 각 교회 찬양 페스티벌을 열어 현지 교인들과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축구나 테니스 등 운동을 통하여 선교사들끼리 동료 의식을 고취하며 또 현지인들도 함께 어울리는 시간을 가지며, 선교지에서 누릴 수 있는 취미 활동을 함께하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선교사는 혼자 있을 때 외롭기도 하지만 사탄의 노리개감이 될 때가 많은 것을 보았다. 선교사가 건전하기 위하여 선교사는 혼자 있으면 안 된다. 자주 연합의 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선교사와 허물없이 어울려야 하며 우리 안에서 경쟁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통하여 성령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교사들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그것을 연합하여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행복한 선교사들이라고 생각한다.







자원 뿐 아니라 영적 전쟁도 치열

[ 땅끝에서온편지 ] < 完 > 실크로드에 피어나는 한국 선교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11월 06일(금) 09:53

  
▲ 실크로드에 있는 10개 나라의 시니어 선교사들이 참가하는 포럼이 올해로 2회째 열렸다. 사진은 지난 5월 홍콩서 열린 포럼에 참가한 선교사들.
카자흐스탄 김상길선교사

고대사회 속에서 아시아와 유럽, 중동을 연결시켰던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세계 경제의 중심 길이었다. 그 후 근대에 들어 공산주의라는 철벽 속에 갇혀 그 구실을 하지 못하다가 1991년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북방실크로드는 새로운 활기를 띠고 있다. 그동안 숨겨졌던 엄청난 자원이 쏟아져 나오며 세계 강대국들의 자원전쟁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강대국들은 특히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는 중앙아시아 나라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실정이다. 지하자원 뿐 아니라 앞으로 세계의 식량 대국을 꿈꾸며 목초지를 개간하여 밀밭을 만들고 농업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자원 뿐만 아니라 영적 전쟁도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천산을 넘어 복음이 서진을 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고, 반면 모슬렘은 그들이 가진 아랍의 오일 파워를 중앙아시아를 흡수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려하고 있다. 공산주의 기간 동안에는 기독교만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모슬렘도 마찬가지로 억압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민주주의 법이 들어서면서 종교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함으로 모슬렘은 전통종교에서 점점 국가종교로 발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1991년보다 2009년 지금 현재의 모슬렘 사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1백개가 안되던 모슬렘 사원이 이제는 1천개를 훨씬 넘어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알마아타에 갔을 때만 해도 모슬렘 사원을 찾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그러나 지금은 매주 금요일마다 사원 앞에는 주차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모슬렘은 정교회와 결탁하여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독교를 이단으로 취급하며 종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의 선교를 방해하고 있다.


천산을 모슬렘들에게 넘겨줄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가 복음을 왕성하게 전하여 실크로드 곳곳에 교회를 세우든지 그것은 한국교회에 달려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서양선교는 이미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선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실크로드 중앙의 나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교회가 가진 몇 가지 유리한 것이 있다. 같은 아시아권의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고려인이라는 아론과 같은 매개체가 있어 언어적 접근성과 관계 전도를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크로드는 21세기에 한국교회에 주신 특별한 선교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실크로드를 복음화하기 위한 많은 선교전략적 포럼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정확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실크로드는 상거래만 이루어진 길이 아니다. 그 길을 통하여 동서 문화가 교류되고 아울러 신앙이 전달되기도 하였다. 기독교도 벌써 4~5세기에 경교가 이 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가고 심지어 몽골까지 전파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 곳곳에 경교의 흔적이 있으며 그들의 삶속에 그러한 영향들이 묻어 있다. 이들의 생각 속에 모슬렘이 자기들의 전통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 깨우쳐 줘야 하는 것이다. 전통종교는 바로 기독교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먼저 개발하고 회복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

2007년 키르기스스탄의 모 장소에서 실크로드 선상에 있는 10개 나라의 시니어 선교사들이 모여 선교포럼을 가졌다. 현장에 몸담고 있는 경험 있는 선교사들 1백여 명이 모여 진지하게 우리의 사역을 돌아보며 한국선교를 생각하였다. '싱크 탱크'를 운영하기로 하고 현장에 선교훈련 센터를 두는 것으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것은 선교 현장과 동떨어진 훈련을 받고 온 선교사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줄이자는 것이다. 그리고 각 지역마다 음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학교들을 네트워크화하여 현지 지도자들을 바로 길러 내자고 하였다. 사실 중앙아시아의 사역자들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누구도 '나는 괜찮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사역을 더욱 네트워크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 자신이 이단을 가려내어 우리 가운데서 몰아내고 건전한 사역을 이루기로 하였다. 그리고 함께 중보하기로 하였다.

이 모임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2년마다 모이기로 하고 2009년 5월에 홍콩에서 2차 모임을 가졌다. 좀 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선교를 위하여 서양 선교의 전략이 아닌 한국적 선교를 깊이 있게 논의하였다. 우리가 몸담고 사역하고 있는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다양한 인종과 문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선교사 혼자의 힘으로 선교를 할 수 있는 곳이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영적 집단이며 정치적 종교라는 것을 상기할 때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선교사들이 협력하며 연합을 이루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믿는 것은 실크로드 특히 중앙아시아는 한국교회를 통하여 반드시 복음화의 길을 걸을 것이며 한국교회는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반드시 그 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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