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최고관리자 0 1,419 2020.06.19 19:52

[땅끝에서온편지] 선교사의 길1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10월 01일(수) 00:00

 

  
 
김종성선교사와 부인 장은경선교사, 딸 주연양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늘 간구하면서 선교사역에 헌신한 지 어언 14년 째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가정은 20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갈아타는 시간, 육로 교통시간 등을 합쳐 무려 36시간 만에 한국을 출발하여 지금 사역하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 시골의 조그마한 도시에 도착했다. 이러한 긴 여정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은, 가족과 함께 선교지로 떠나는 것과 일반적인 여행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때 느꼈던 기분은 단기 선교를 갔을 때, 선교 팀을 이끌고 갔을 때, 그리고 총회 세계선교부에서 일하는 동안 여러 선교지들을 방문했을 때마다 느꼈던 감정과는 전혀 달랐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큰 열정과 소명감뿐 아니라 새로운 문화에 대한 적응, 함께 따라 나선 가족에 대한 책임감 등 여러 감정이 뒤섞여 선교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조선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서구 선교사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도미니카공화국은 1492년 12월 5일,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발견되었고, 그때 이름을 붙인 이스빠뇰라(Hispaniola)라는 섬에 위치해 있다. 콜럼버스는 이 신대륙을 발견함과 동시에 평화롭게 살아가던 인디오들을 향하여 잔인한 살육을 감행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많은 인디오들이 살해되었다. 이 섬에 살던 인디오들의 관점에서 보면,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영웅이 아니라 자신들이 사는 섬에 침입해 온 불법 침략자였던 것이다. 이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이며 아메리카 대륙의 첫 번째 도시인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에는 유적지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수도로부터 떨어진 내가 사역하고 있는 지역은 전기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 이 곳 사람들은 도둑 전기를 많이 쓴다. 한 동네에 전기선이 수없이 얽혀 있는 대신 정식으로 계량기를 달고 사는 집은 많지 않다. 이들은 이사할 때 불법으로 연결한 선을 거둬서 이사할 곳으로 가지고 간다. 전기 요금을 정당하게 내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런 모습이 악순환이 되어 지금까지 전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매일 전기가 나간다. 물 사정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물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불규칙적으로 나온다.

사역 초기에 있었던 일이다. 샤워를 하는 중에 비누칠을 했는데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아서 고생한 적이 자주 있었다. 그 후부터는 우스운 얘기 같지만 샤워를 마치는 시간까지 물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는 버릇이 생겼다. 옷장 속에 들어있는 왕거미, 옷을 뚫고 무는 모기떼와 독한 벌레들, 잠자는 동안 아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습격한 불개미 떼, 해마다 10여 차례 지나가는 허리케인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풍토병, 우리 가족 세 사람이 여러 번 말라리아에 걸렸던 일 등, 우리 가정은 새로운 문화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렸다. 그 순간, 나는 신학교 졸업 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고 다짐하며 담대하게 찬양했던 때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고백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으니'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전도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한국은 하루에 전기가 몇 시간씩 나가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복음을 나눌 선교지 사람들의 입장과 관점에 서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이 느낌을 가지고 그들의 삶의 자리에 깊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복음의 접촉점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주님도 우리에게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 우리의 모습으로 오셨다.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낮고 천한 마굿간에서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신 주님,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오는 문화 충격의 경계를 넘으신 주님의 모습을 매일 아침 깊이 묵상하며 사역에 임하고 있다.

조지 뮬러가 사역이 늘어나면 늘어나는 시간에 비례해서 기도의 시간을 늘렸던 것처럼,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는 길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교사의 소명을 이 곳, 이 땅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땅끝에서온편지] 2동역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09월 23일(화) 00:00

  
 
선교 협정을 마치고 양교단 관계자들이 함께 했다.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선교 사역을 해 오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이다.
'선교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선교지에 가 계신다.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선교에 도구로 쓰임 받는 한 존재이다. 그리고 나는 총회 선교사로서, 총회의 선교신학과 정책, 그리고 총회 세계선교부의 선교사 규정을 지키고, 선교사가 지켜야 할 의무를 지키도록 애를 쓴다.' 오늘도 이 거룩한 하나님의 선교에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게 됨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21세기 선교 현장에서 가장 소중한 선교 방법은 협력 선교이다. 선교사들과의 협력, 선교 단체와의 협력, 현지 교회와의 협력, 교단 선교부와의 협력, 후원 교회와의 협력, 현지 사역자들과의 협력 등이다. 선교는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장소에서 선교사, 현지 교회, 현지 동역자, 총회 세계선교부, 후원 교회 등이 한 마음이 되어 함께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애쓰는 것이 바로 선교이다. 이러한 협력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균형이 깨어지고 부정적인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 예를 들면, 선교사 왕국 건설, 선교지의 재산 사유화, 선교 사역의 비효율성, 선교지의 중복 투자, 선교 재정의 불투명성, 검증되지 않은 선교사 파송, 선교 사역에 대한 재평가의 어려움 등이다. 선교사가 잘못된 관점으로 현지인들을 대하게 되면 선교사와 현지인 간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는 사역 기간 내내 선교사를 괴롭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른 선교를 펼치기 위해서 선교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감사하게도 이제는 서구 선교사들이나 한국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 초기의 시행 착오를 딛고 차차 현지 교단과 협력하면서 그들을 돕는 사역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

21세기 선교는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선교를 지향해 가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함께 사역할 동역 교단을 찾았다. 그런 중에 미국장로교회(PCUSA)에서 발행하는 'Year Book'에서 동역 교단을 위한 기도 제목으로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Igelsia Evangelica Dominicana)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에서 떨어진 자그마한 이곳 사역지에 묻혀서 사역하고 있는 내가 그 교단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늘 좋으신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수도에 나갔을 때 우연히 길에서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의 교인을 만나게 하셨고 그 날 교단 사무실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12년째 이 현지 교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교단 총회 신학교에서 교수 사역 및 부총장을 역임하면서 함께 섬기고,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면서, 지금까지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은 미국장로교회, 연합감리교회, 형제교단이 연합하여 1922년에 세워진 현지교단이다. 개혁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가고 있는 이 현지교단은 1932년 1세기 먼저 도미니카공화국에 와서 교회를 세운 웨슬리안 감리교회와 연합을 하였다. 그 후 20세기 초부터 선교 사역을 한 모라비안 교회와 1960년에 연합하였다. 현재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은 WCC 산하의 CCC 회원교단이며, WARC 회원교단, AIPRAL(라틴아메리카개혁교회협의회)회원이기도 하다.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은 한국교회의 초기 모습처럼 자치, 자립정신이 강하다. 이전에 서구 선교사들이 제국주의 선교사역을 펼쳤을 때, 이들은 모라토리움에 참여해서 그런 선교사들과 동역하지 않았다.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우리 가정이 현지 교단으로부터 선대함을 받게 하시고, 협력하며, 복음을 나누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셨다. 또한 협력해서 사역하는 동안 네비우스 선교정책 가운데 이들에게 부족했던 자전정신을 우리 가정을 통해서 배우게 하셔서, 이제는 '자치, 자립, 자전'의 균형을 이루어 가는 건강한 현지 교단이 되게 하셨다. 그 결과 교단에 속한 교인 수도 배가하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있다.

그리하여 협력 선교의 결과로 2006년 제 91회 총회에서 양 교단의 총회장들이 만남을 가졌고, 2007년 2월 안영로 증경총회장과 김경인 기획국장이 이 곳 선교지를 방문해서 선교 협정을 맺는 아름다운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선교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다.

나의 사역 일정은 항상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의 사역 일정과 함께 움직여진다. 교단 총회, 부활주일 예배, 전도 집회, 추수감사절 예배, 교단에 속한 목회자 수련회, 교회 개척, 신학생 발굴, 교수 사역 등, 교단에 속한 모든 일정을 함께 한다. 뿐만 아니라 미자립교회와 신학생들이 담임하는 교회들을 함께 돌보며, 한국교회처럼 이곳 자립교회들이 기도하는 교회,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교회, 사회를 향한 책임, 복음전파 등에 역점을 두고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그리하여 도미니카공화국 복음화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오늘도 주어진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땅끝에서 온 편지] 3.전도사역

[ 땅끝에서온편지 ] 약할 때 강함 주시는 이를 믿고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10월 01일(수) 00:00

비행기 바퀴가 도미니카공화국 활주로에 닿는 순간, '하나님, 이 땅을 축복하소서. 이 땅에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해 주소서. 부족한 종의 가정을 주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해 주소서. 일주일에 이틀은 전도를 위해 힘쓰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는 사역한 지 14년 가까이 된 지금도 늘 드리고 있다.

그러나 나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같은 문화권 안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려운데, 언어, 문화, 종교적 심성이 다른 이곳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는 훨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고 힘 있게 복음을 전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영적, 육적으로 지치고 슬럼프에 빠져서 복음 전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이곳 도미니카공화국은 제 3세계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사회 계층의 모습처럼, 소수의 상류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인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류층 사람들은 상당히 수용적이어서, 비록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씻을 물이 없어도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손님을 초대한다. 그런 까닭에 전도하러 가면 사람들은 나를 그들의 집으로 불러들인다. 대화를 시작하면서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복음을 제시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함께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다.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이들이지만,막상 복음을 전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기도 한다. 초기에는 거절 못하는 이들의 특성상 이번 주일에 교회에 나자가고 하면 늘 웃으면서 "네" 라는 대답을 듣고 신이 났었다.

그러나 힘 있는 대답과는 달리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방문했다. 그러면 거절은 못하고, 집 뒤에 숨어서 아이들에게 "삼촌이 죽어서 못 간다",  "할아버지가 죽어서 못 간다" 등등의 핑계를 대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한 번 죽을 어머니가 여러 번 죽기도 했다. 예수님을 영접하려고만 하면 어머니가 늘 죽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전도하면서 모인 이들이 제자 훈련을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갔다. 

대다수의 하류층과 달리 소수의 상류층은 전도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동양인을 무시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과거 중국 사람들이 이곳에 이주해 와서는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지 않고 모으기만 하는 수전노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인들을 중국 사람들과 동일시한다.  

특히 상류층들은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들이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물질적으로도 그들보다 못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현실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어서 복음에 목말라 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가진 권력과 부를 마음대로 누리기 때문에 하나님을 애써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나는 하나님께 부족한 나를 전심으로 맡기며, 부담되고 긴장되는 이들과의 만남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드리면서 조금씩 다가갔다.  

이들보다 언어가 미숙한 가운데 영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복음을 전했을 때, 마침내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일 예배와 성경 공부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이들이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지역 봉사에도 열심이다.

이들은 도미니카공화국 사회의 지도층이고 지식인들이라 이들이 복음을 받았을 때 매우 큰 힘을 발휘함을 보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나는 만화영화 '톰과 제리'에 나오는 톰처럼 해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톰은 제리를 쫓는 동안 많은 장벽과 어려움에 부딪히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제리를 쫓아다닌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끝까지 잘 감당해 갈 수 있도록 톰 같은 열정이 식지 않기를 소원한다.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땅끝에서 온 편지] 제자 양성, 그 행복한 고생

[ 땅끝에서온편지 ] 4 신학교 사역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10월 08일(수) 00:00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 총회 신학교 교수 임원회의 모습. 필자는 1997년부터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현재 세계선교를 위해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중복 투자'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데, 이것은 선교 사역의 한 분야인 신학교 사역에도 나타난다.

선교 현지에는 무분별하게 선교의 열정만 가지고 온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그들 대부분은 소속 단체가 없거나 개 교회, 군소 선교 단체에 속해 있다.  

그들은 총회 세계선교부나 국제선교단체에 소속되어 본부와 긴밀한 협조 가운데 사역하는 선교사들과 달리,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된 사항을 집행함으로써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사역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몇 명의 현지인들을 모아 신학교를 세워서, 교수가 되기도 하고 총장도 된다. 그리고 신학교 건물을 짓는다. 그러다 보니 같은 도시에 한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여러 신학교들이 있는 경우도 보게 된다. 신학교 사역은 신학교를 무조건 세우기보다는 현지에 있는 기존의 신학교를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자신이 동역하는 교단에 소속된 총회 신학교가 있는 경우에 그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매우 의미가 있다.  

1997년부터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 총회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니 벌써 햇수로 십 년이 넘었다. 지난 2007년에는 교수회의와 총회를 통해 부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처음에 이곳의 언어인 스페인어로 매번 3~4 시간의 강의를 진행하는 것은 나에게는 대단한 모험이었다. 더구나 학생들이 질문하는 복잡하고 난해한 신학 교리를 제대로 알아듣고 정확하게 답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혜의 근원이신 성령 하나님께 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늘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다.

지난 학기 종강 시간에 한 신학생이 수줍은 듯이 다가와 나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다.

존경하는 목사님,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이 글을 씁니다. 후안 보쉬 (Juan Bosch:시인이자 교수였고, 1963년 도미니카공화국 대통령 역임)는, "교수와 스승은 다릅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과목을 가르치는 자이고, 스승은 과목뿐 아니라 인간이 되도록 가르치고, 혼과 정신을 다해 자신의 학생들을 돌보는 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희와 언어가 다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혼과 정신을 다해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저희에게 전해주시려고 애쓰시는 진정한 스승이십니다. 뜨거운 여름철의 시원한 물 한 잔처럼, 저희가 배워야 할 것들을 시원하게 가르쳐 주시고,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심에 진정 감사드립니다.
 
이곳 교회 청년들은 목회자로 헌신하면 재정적으로 많은 곤란을 겪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여자들도 목회자와 결혼하기를 꺼려한다.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 총회 신학교도 열악한 환경과 재정 부족, 현지인들의 목회자에 대한 편견 등으로 어렵게 운영되고 있다. 또한 학업과 연구를 위해 필요한 신학 서적의 부족 등으로 전문 목회자를 양성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 사역에 헌신하고 있는 12년 동안 세 번의 졸업식 밖에 갖지 못했다. 수업 기간은 4년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다음 기의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해 신학교는 각 교회의 청년들에게 계속 신학교를 홍보한다. 그리고 학생들은 졸업 후 2년간 풀타임 사역자로 훈련을 받고 드디어 목회자로 안수를 받게 된다. 

이 어려운 과정을 통과한 신학생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이들은 도미니카공화국 복음화의 기초이다. 영적, 질적 수준이 향상된, 잘 양육된 현지 목회자 한 사람이 미치는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은 현지교단 사역을 돕는 일뿐만 아니라 선교 사역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가져오게 된다. 나는 신학교 사역을 하면서 늘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신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기도를 드리면서, 나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기대한다. 아울러 이들을 위한 중보적 기도를 부탁드린다.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땅 끝에서 온 편지] 선교사의 자녀

[ 연재 ]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5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10월 29일(수) 00:00
  
 
도미니카 복음교단의 신학교 개강 예배. 주연양이 반주를 맡아 예배를 도왔다.
 
내가 사역하고 있는 지역에는 가톨릭 사립학교와 정부에서 운영하는 현지 학교가 있다. 현지 학교는 정부에서 교사들에게 월급을 주지 않으면 교사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학교가 문을 닫아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날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두 돌 때 데리고 간 아이가 앞으로 다닐 학교 여건이 마땅치 않았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밤, 나갔던 전기가 들어오면 어느 새 집 안으로 들어온 왕거미와 도마뱀들이 아이를 놀라게 했다. 한국인 가정이 없는 우리가 사는 이 곳 농촌 사람들은 우리 가정을 언제나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전도하러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싸고는 아이의 얼굴을 만져 보고 손가락으로 눌러 보곤 했다. 우리 부부는 사역을 위해 그들에게 다가가지만, 아이는 금세 자기의 얼굴을 만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울면서 피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아이가 늘 아내의 옷을 놓지 않고 졸졸 쫓아다녔다.

일 년에 적어도 십여 차례 지나가는 허리케인으로 곳곳이 폐허가 되고 수해로 인한 전염병이 돌 때 아이는 여지없이 그들과 함께 전염병에 걸렸고, 열대성 전염병인 '뎅기'(dengue)에 걸려 사지가 뒤틀어질 정도로 고열에 몸을 가누지 못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갖가지 전염병, 풍토병을 앓으면서, "왜 교회만 갔다 오면 아파요?"라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아내에게 던지기도 했다.

아이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지금까지 아내와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아내가 아이를 일 년에 서너 달 학교에 보내는 것이나 집에서 공부시키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수업 일수는 비슷하기 때문에 아이의 학업을 맡아서 돕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주된 사역은 수도에 있는 교단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과 교단에서 의뢰하는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게 되는데, 그때마다 아내와 아이는 교재를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아내가 하루 종일 사역을 해야 하는 날에는 아이를 가르칠 수 없기 때문에 사역 전날 밤에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지만, 막상 아이는 아내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교재들을 단지 몇 분 만에 끝내 버리고는 현지 아이들과 하루 종일 놀면서 보내기도 했다. 인터넷 학습은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선교지의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프로그램을 받아 내지 못해 포기하고 말았다. 수업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 가지 웃지못 할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아이가 자라 가면서 꾀가 늘기 시작할 무렵에는 아내와 수업하는 것이 지루해서 화장실에 자주 가서 늦게 나온 적도 많다.

아이는 현재 고2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아내가 도입한 교재는 미국 홈스쿨링 프로그램인데, 이 교재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각 단계별로 끝날 때마다 테스트를 하는데 테스트에 앞서서 반드시 기도를 하도록 되어 있다. 이 교재는 공부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아 가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아이의 수업을 돕는 아내도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아이는 자라가면서 3년 전부터 사역의 동반자로서 아내를 도와 교단 청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주일학교 교사 역할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다. 교회가 개척될 때마다 아이 때문에 마을 아이들이 교회에 제일 먼저 찾아온다. 또한 아내와 함께 총회에 소속한 각 교회의 청년들이 찬양 사역자로 헌신할 수 있도록 찬송가 반주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곳 총회에 속한 교회 목사님들과 성도들은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가족처럼 대해준다. 아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대학을 졸업한 후에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 총회의 교회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우리 부부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어릴 때는 이곳이 너무 힘들었지만, 자라면서 이곳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는 말한다. "아빠, 엄마는 선교사로 사역하시지만, 저는 이 곳 사람으로서 총회에 속한 교회들을 돕고 싶어요."





[땅끝에서온편지] 현지 문화 모른다면 '반쪽 선교사'

[ 땅끝에서온편지 ]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6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10월 29일(수) 00:00

  
 
산체스교회 추수감사절 예배후 성도들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모습.
 
단기간에 선교지를 방문할 경우에는 그 곳의 문화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선교 현장에서 선교사가 현지인들과 함께 삶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는 외로움의 고통을 감수하고, 현지 문화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웃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현지 문화를 알지 못하면 '절름발이 선교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대회가 열렸을 때 인도 교회를 대표해서 온 아자리아(V.S.Azariah)는, 인도에서는 선교사와 현지 인도 사역자들의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와 같다며 참석한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요청했고 친구들을 달라고 호소했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은 이곳은 전기가 자주 나가다 보니, 스페인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전기 나갔다"와 "전기 들어왔다"라는 말을 가장 먼저 배운다는 우스운 얘기가 있다. 나갔던 전기가 깜깜한 밤에 들어오면 곳곳에서 큰소리로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친다. 이곳 사람들이 자주 먹는 음식 가운데 '망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쁠라따노'(바나나 과에 속한 식물)를 삶아서 빻아 만든다. 처음에는 아무 맛을 느낄 수 없지만, 계속 먹다보면 구수한 맛에 반하게 된다. 한국 사람들이 김치 맛을 즐기고 매일 상에 올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요즘 물가가 너무 많이 뛰면서 이 쁠라따노 값도 많이 올라서, 서민들은 이것 하나 사먹기도 힘들어졌다. 이곳의 대표 음식으로 '라 반데라'가 있다. 이 나라 국기 색깔인 흰색, 파랑, 빨강을 비유해서 붙인 이름으로, 흰밥(안남미), 닭고기, 붉은 콩을 삶아서 죽처럼 만든 것을 한 그릇에 담은 것이다.

현지교단 교회들을 돕는 사역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전국의 교회들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집회 후에 목사님 댁에서 잠을 자게 된다. 현지 음식에 워낙 적응이 잘 된 우리는 식사 걱정은 전혀 하지 않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 화장실 사용과 씻지 못하고 잠을 자야 하는 것은 함께 간 아내와 아이에겐 어려움이었다. 이곳은 집집마다 화장실 물이 없어서 용변을 본 후에 계속해서 볼 일을 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산체스교회 집회 후, 루이스 포츄 목사님 부부가 쓰는 침대를 우리 가족을 위해 내어 주셨다. 두 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낡은 나무 침대에 내가 올라가니 아내와 아이가 모두 내 쪽으로 기울어졌다. 셋이 눕기에는 너무 좁아서 내 발 쪽으로 아내와 아이가 머리를 두었다. 목사님 부부와 우리가 자는 침대 사이의 칸막이를 비추는 희미한 전등 빛으로 바퀴 벌레, 도마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날따라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얼마나 크게 들리는지… 아침에 목사님이 잠을 잘 잤냐고 물어보셨을 때 아주 잘 잤다고 대답하는 아내와 아이로 인해 목사님 가족이 모두 기뻐했다.

알카리소스교회 집회 후에는 아마블레 목사님 부부가 자신들이 쓰는 낡은 침대를 나에게 기쁨으로 내어주었다. 그 날 밤,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서 집 뒤쪽 구석에 있는 화장실에 가려고 천으로 만든 문을 걷으니, 시멘트 바닥에 천을 깔고 목사님 내외가 누워있었다. 목사님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진흙바닥에 미끄러진다면서 패트 병을 주었다. 그 순간, 한국의 요강이 떠올랐다.

총회에 속한 교회들을 돌보면서 이루어지는 집회 때마다 목사님과 성도들은 크게 기뻐하며 언제나 우리 가정을 반갑게 맞이한다. 선교사님이 와서 설교를 해서라기보다는,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형제, 자매인 우리 가정이 좋아서라는 것이다. 그들은 도미니카공화국 복음화를 위해서 우리 가정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가정을 위해 늘 중보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도 그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오늘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게 하시고, 이들에게 이방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될 수 있도록 늘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채워 주소서.'





선교 원칙의 기본은 '하나님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7

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2008년 10월 29일(수) 00:00
  
 
라베가교회 창립 1주년 감사예배.
 
선교 원칙의 기본은 '하나님의 선교'이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이론 같지만, 선교 현장에서 이것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다양한 선교 영역에서 선교사가 사역에 임할 때, 선교사들 가운데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 선교사를 위한 사역을 펼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를 위한 선교는 선교사간의 갈등, 선교사와 후원교회, 선교사와 선교사를 보내는 총회세계선교부, 선교 본부 혹은 선교단체와의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윌리엄 캐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어 가기 위해 네 단계를 제시했다. 제1단계는 '개척(Pioneer)'으로 선교사 중심의 단계이다. 제2단계인 '양육(Parent)'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을 선교사가 돌보고 양육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까지 선교사가 중심이 된다. 제3단계는 '동역자(Partner)'이다. 양육된 자들이 선교사의 협력자로서 복음을 전하며, 이때부터 복음을 전하는 중심이 선교사로부터 현지인으로 옮겨가게 된다. 제4단계는 '참여자(Participant)'이다. 현지교회가 주도권을 갖고 선교사는 철저히 돕는 자, 참여자로서 서게 된다. 이러한 네 가지 선교 원칙을 토대로 사역을 펼쳤던 윌리엄 캐리가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가 되었듯이, 선교사가 이 네 번째 단계를 목표로 하고 사역에 임할 때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4단계 원칙을 중심으로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과 동역하면서 지금까지 교회들을 개척해 왔다. 그 원칙은 현지교단 총회 임원회를 거쳐 총회에 소속된 교회가 없는 지역에 우리 가정이 먼저 들어가 전도를 하며, 제자양육을 통해 그룹을 만들고, 그룹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해서, 교회가 성장할 때까지 총회에서 파송한 목회자와 함께 교회를 돌보다가, 일정한 수준으로 성장하면 그 목회자가 전적으로 교회를 맡아서 돌보고, 우리 가정은 총회와 의논하여 다시 새로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다.

한 교회, 한 교회가 개척될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사탄이 공격해 왔기 때문에 늘 목숨 거는 기도와 헌신이 필요했다. 산타 루이사라는 동네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이다. 전기가 나가는 밤마다 이곳 물건이 저곳으로 옮겨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삶이 어렵고, 강퍅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 지역에서 끊임없이 전도하며 집들을 방문한 결과, 한 가정을 중심으로 성경공부 모임이 형성되었고, 모임이 커지면서 마을 앞 공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마을 이장이 큰 칼과 도끼를 든 깡패들을 동원하여 예배를 방해하며 우리 가정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겁을 주곤 했다.

알카리소스지역 교회 개척 때는 납작하게 찌그러뜨린 깡통을, 설교하고 있는 나를 향해 던지는 바람에 바로 눈 밑을 스치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또한 1미터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강한 폭우를 뚫고 조심스럽게 운전하며 교회에 갈 때, 고인 물로 인해 깊게 파인 웅덩이가 보이지 않아서 그 위를 지나는 순간, 차의 바퀴가 틀어지고 미끄러지면서 빗길에 회전하기 시작했다. 차체가 거의 여섯 바퀴를 돌다가 도로를 이탈하더니 잡초들이 무성한 풀밭으로 50~60미터 정도를 뒤로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내닫게 되었다. 그 순간 브레이크와 핸들은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혀 말을 듣지 않았고,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주님, 주님, 차 좀 세워주세요.' 차에 함께 탔던 아이는 놀라서 울었고, 아내가 내 옆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도와주실지 봐요."하며 나에게 외쳤다. 그 순간 선교 차량이 덜컹덜컹하면서 시동이 꺼지고 멈추는 것이었다. 폭우는 계속 쏟아졌고, 주변에는 부락도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폭우가 계속 쏟아지는 상황이었지만 차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서 차에서 내렸다. 그 순간 나는 폭우를 맞으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선교 차량의 바퀴가 도랑 모퉁이에 걸쳐져 서 있었고, 차의 바퀴가 반 바퀴만 더 굴러도 깊은 도랑으로 전복될 상황 바로 앞에서 차가 섰던 것이다. 정말 기적이었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 가운데 개척된 교회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열매를 맺으며, 총회에 속한 교회들로 자라가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한국교회가 새벽마다 눈물로 쉬지 않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서 땀 흘리는 선교사들의 가정과 그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귀하게 응답되어지고 있다.




현지 찬송가 제작의 감격

[ 땅끝에서온편지 ] <8> 사역자로서의 아내 선교사 (下)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8년 11월 18일(화) 15:50

김종성선교사/도미니카공화국

로마 가톨릭 문화권 속에서 도미니카공화국의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과 다름을 강조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기 때문에 교회의 전통이나 올바른 신학교육, 예전 등이 거의 사라졌다. 장로교, 감리교, 모라비안교 등의 선교사들이 먼저 도착했지만, 오늘날 이곳 개신교회는 오순절 교회와 하나님의 성회가 가장 크게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전통적인 개신교회들에게 다가가 동역함으로써 힘을 실어 주는 것은 현지 교회에 큰 힘이 된다.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지고 세워진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은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한 이후 열악한 상황 가운데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1824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후, 1백80여 년 동안 총회에 속한 교회들은 찬송가 없이 독자적으로 예배를 드려 왔다. 그래서 2002년에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 총회 찬송가를 만들기 위해 총회에서 뽑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찬송가 제작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제작위원장이 된 아내 장 선교사를 중심으로  2년 동안 매주 한 차례씩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자료 수집과 분류 작업, 그리고 총회 교회에 필요한 곡들을 선정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제작 위원회로 말미암아 교회들이 사용하게 될 곡들을 빠뜨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여러 번 점검을 거듭했다. 그 때마다 위원들은 모임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열대 지역 특유의 느긋함 때문에 언제나 회의는 정해진 시간보다 한 두 시간 늦게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새벽부터 서둘러 수도 산토 도밍고에 도착한 장선교사는 늘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일을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 가운데 총회 은퇴 목사님인 아센시오 목사님은 유일하게 모임 때마다 한 번도 지각, 결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 선교사 옆에서 이 사역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봉사를 다해 주셨다. 목사님은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평생 동안 혼자 공부해서 50여 곡이 넘는 찬양을 작사, 작곡했다. 총회에서는 찬송가 제작에 맞추어 목사님이 지은 50여 곡을 모두 실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총회 교회들이 이미 많은 곡들을 외워서 예배 시간에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그 곡들을 받아들고 보니, 전문 음악인이 아닌 장선교사가 대충 훑어보아도 음표, 박자, 기호, 심지어는 가사 중에서도 단어뿐 아니라 알파벳을 고쳐야 할 부분들을 여러 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긴 노래였는데, 어떤 곡은 여섯 페이지를 넘는 곡들도 있었다. 기껏해야 두 페이지를 넘지 않는 한국 찬송가에 익숙한 터라 한 곡을 부르면서 악보를 두 장 이상 넘겨야 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도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지혜로움이 생기게 되었고, 결국 총회에서 가장 즐겨부르는 20곡을 선정해서 함께 싣게 되었다. 전문적인 음악 사역자가 거의 없는 총회의 상황 가운데서 총회 음악 역사의 산 증인인 아센시오 목사님을 이 사역을 위해 동역자로 묶어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드린다.

이 사역에 헌신하는 동안 장 선교사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아팠던 시간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연약한 우리들과 환경을 가장 적절하게 배치시켜서 동원하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2004년에 스페인어로 된 총회 찬송가가 제작 인쇄되었고, 현재 총회에 속한 교회들이 예배 때 마다 이 찬송가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열매는 많은 이들의 수고를 통해서 맺어지는 아름다운 조화의 결과라는 것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사역은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과 동역하면서 이루어진 역사적이고 귀한 열매로 평가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 총무인 알레한드로 피게로아 목사님은 찬송가 서문에서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단이 교회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구상의 모든 성도들에게 이 찬송가를 드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신앙의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의 결과로써 드디어 21세기 초기에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중략)..... 찬송가의 메아리가 라틴 아메리카 전 지역에 울려 퍼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 땅끝에서온편지 ] < 完 > 선교사의 길과 기도 도미니카 김종성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8년 12월 03일(수) 16:15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 사랑을 안고 조선 땅에 온 수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드린 것처럼, 오늘도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 온전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 가장 요구되는 필수 사항은 '기도'이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선교사만이 선교지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선교 현장에서는 선교사가 기도에 집중할 수 없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를 받는다. 선교지에서 모래바람처럼 불어오는 거센 사탄의 세력을 만나 선교사에게 위기가 닥치고 영적 고갈상태에 이르면, 고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함께 나눌 가족이나 동료와 떨어져 있다는 외로움, 두려움 등에 빠져 심리적ㆍ정신적으로 나약해지게 된다. 그래서 사역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어진다. 이와는 반대로, 선교 영역이 확장되고 사역의 지경이 넓어질 때, 오히려 그것을 유지하는 데만 온 정열을 쏟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한시 하다가 결국 선교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힘없이 무너지는 경우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나 자신도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고, 사역 현장에서 오는 과중한 일로 인해 힘들어서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선교지에 도착해서 마련한 기도상을 붙들고 기도해 오고 있다. 때로는 정신없이 사역하면서 형식적으로 기도상을 찾기도 했고, 많은 사역으로 인해 지쳐서 피곤할 때 그 앞에서 졸기만 한 적도 있다. 그러는 가운데 사역지에서 느끼는 외로움, 두려움,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어우러져서 흘린 눈물, 콧물, 땀으로 얼룩져 있는 기도상은 이곳 사역지에서의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사탄은 기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역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이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기도만이 선교 사역의 최선이며,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선교의 장벽을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매 순간마다 가르쳐 주신다.

선교 사역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나에게 더 많은 기도의 시간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을 잠잠히 바라보게 하셨고, 하나님보다 앞선 발걸음을 멈추고, 때로는 너무나 지쳐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을 때,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지혜를 주셨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 하이드 선교사는 "내가 사역을 위해 열심히 일했을 때보다 하나님께 기도로 사역을 부탁드렸을 때, 더 많은 열매를 허락하셨다"고 고백했다.

선교사 본인의 기도 못지않게 선교사 가정과 세계 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 또한 참으로 소중하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수해를 당한 교회들을 방문하며 돌보다가 우리 가족 모두 수해 지역에 도는 전염병에 걸리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크게 아팠을 때였다. 나의 맥박이 1분에 40여 번 밖에 뛰지 않았고, 찬송가 1절을 끝까지 부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을 때, 땅 끝에 위치한 이곳 사역지에 도달한 성도들의 간절한 중보 기도를 통해 영적인 충전을 받는 과정을 경험하면서, 중보 기도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중보 기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선교지에 도착한 후 나와 아내가 발견한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사역지의 달력에 맞춰 살아가는 이곳에서 어느 순간 전도가 평소보다 더 두렵고, 사역이 힘들게 느껴졌을 때, 한국에서 보내준 달력을 보니 여지없이 한국의 명절 때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명절 때가 되면 나와 아내는 평소보다 더 많이 기도하면서 사역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고 지금까지 그렇게 실천하고 있다.

물론 명절 때와 상관없이 기도의 끈을 늦추지 않고 한결 같이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를 방문하면, 해이해지기 쉬운 명절 때일수록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역하는 선교사들과 그 가정을 위해 계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기를 특별히 부탁드린다. 그 부탁을 받은 성도들이 명절에도 중보 기도실을 비우지 않고 기도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선교의 중심은 '기도'이다. 선교사 본인의 기도와 기도로 후원하는 선교 동역자들의 기도가 합해질 때 '하나님의 선교'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나의 생명 다하는 그 순간까지, 주님 사랑하며, 주의 사랑 전하며, 달려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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