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로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김병호 선교사1
▲ 선교사로 파송받아 개척하였던 우라와교회. |
가깝고도 먼 나라로
김병호
총회 파송 일본 선교사
처음부터 일본선교사를 지망하여 간 것은 아니다. 목사가 된 후에도 좀 더 배워야겠다는 계획으로 가까운 나라 일본행 항공기에 몸을 실은 것이 어학연수와 동경신학대학 신학 연구과정의 3년, 선교사로서의 25년을 합하여 2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유학생활이 끝나가면서 진로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곳 일본에는 70만명의 재일동포가 살고 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있고, 일본어와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목사가 필요한 상황과 함께 모국의 고향 부산에서 모범적으로 선교사를 지원하고 있는 부산국제선교회를 통하여 본인을 일본선교사로 파송하고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그 당시 모국 교회는 목회자가 많이 배출되고 었었지만, 일본에서 민족적 처벌과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재일동포를 위한 선교에는 목회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재일동포교회를 섬기기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이것도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 여겨 일본선교사로 지원하고 총회 전도부를 통하여 파송받게 되었으며, 부산국제선교회를 통하여 부산동노회 덕천교회가 모든 선교비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89년 당시 한국교회는 선교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를 때 였지만 개교회가 그것도 서울의 대형교회가 아닌 지방 도시의 300명 규모의 덕천교회가 전임 선교사를 후원한다는 것은 재정적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기쁘게 본 선교사를 후원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은혜인 것이다.
그 어려운 시절 선교적 사명을 잘 감당하였던 덕천교회는 지금 부산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 한국교회가 오늘의 발전되고 성장한 교회가 된 것은 과거 1908년, 1909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시절에 제주도에 이기풍목사를, 한석진목사를 일본 동경으로 파송한 선교적 열정과 사명 때문이라 믿어진다. 선교는 교회가 크다든지 재정이 많다든지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규모의 교회라도 하나님께서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에 복주시고 그 지경을 넓혀 주신다는 것을 과거 역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이러한 선교적 열정과 사명에 의해 일본 선교사로 파송 받았지만 한편으로 일본선교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반대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몇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일본은 잘 사는 나라인데도 선교하느냐?, 또 하나는 일본은 과거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여 많은 고통을 주었던 원수같은 나라인데 무엇 때문에 선교하는가? 그리고 일본 엔화의 강세로 물가가 비싸기 때문에 많은 선교비를 부담해야 하고 또한 수자적 눈에 보이는 성장이 더디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본선교사의 주력 선교대상은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이기 때문에 원주민(일본인) 선교도 아니고 동포선교는 어떤 선교적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사도바울이 이방나라 선교사로 파송받아 갔을 때 물론 시골이나 소외된 곳에도 갔었겠지만, 사도행전과 그의 서신을 보면 대부분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활동 하였고 이방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게 먼저 전도했으며 이러한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사도 사울의 이방선교를 위한 전진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니느웨는 원수였지만 그곳을 행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가기싫어 했던 요나를 큰 물고기 뱃속에 집어 넣으시면서 까지 니느웨로 향하게 하였다. 일본 땅에서 100년이 넘은 재일동포 디아스포라 교회인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일본언어에 능통하며 일본문화를 잘 알기 때문에 일본선교를 향한 전진 기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일본과 우리나라와는 옛날부터 원수같은 나라이고 잘 되는 것이 싫은 나라일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일본을 향한 구원의 계획은 우리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겸손한 자세로 순종하며 따라갈 뿐이다. 우리보다 먼저 가 계시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섬길 뿐이다.
이러한 일본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것이 원인인지 덕천교회는 담임목사가 은퇴를 하고 새로운 담임목사가 부임하면서 3년 만에 선교비 후원이 끊어졌으며 그 재정적 부담을 부산국제선교회가 안고 지금까지 20여 년을 한결같이 후원해 온 것은 감사한 일이다. 선교회나 교회가 한 선교사를 20년 이상 계속 후원하는 일은 잘 없다.
한국에서 일본은 항공기로 지역에 따라 1시간 혹은 2시간내에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묘한 감정 때문에 멀고 먼 나라가 되어버렸지만,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자 아레오바고 언덕에 모였던 아테네 군중과 같은 일본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뜻이 있어 보내셨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조심스러운 발거름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일본선교가 어려운 이유
[ 땅끝에서온편지 ] 일본 김병호선교사 편/2.문화와 복음의 차이
▲ 별장 휴양지 카루이자와의 결혼식 전용 우치무라간조 기념교회당 |
일본선교는 왜 어렵다 하는가?
일본선교사 김병호
일본선교사이지만 직접 일본인 선교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본인 선교가 어렵다든지, 일본은 미신이 많아서 등의 이유가 아니라 본 선교사의 일본에서의 선교적 사명은 일본에 살고 있는 70만명 이상의 재일동포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면을 통해 일본 기독교회에 대해서 좀 언급하는 것이 일본선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다.
일본은 과거 16세기 중반에 가톨릭 교회 선교사들이 와서 선교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일본 남부지역 성주들이 선교사가 승선해 있는 포르투칼 상선으로 부터 무기(총기류)를 구입하기 위한 정치적인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집단적 개종을 한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우리나라에 왔던 병사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신자였으며, 종군신부가 따라왔던 기록도 있다.
그러다가 몇 십년 지나 금교령이 내려져서 수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가 있다. 어떤 기록에 보니까 약 4만명이 믿음의 순결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했다 한다. 그 이후 200여 년 동안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표면적으로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1859년, 지금부터 155년 전에 문호를 개방하여 미국에서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들어왔고, 1867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기독교 선교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그 당시 최상류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무사계급의 한 부류는 일본 주류 세력에 포함되어 일본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되고, 비주류 세력에 있던 상류층 무사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이 기독교를 접하게 되면서 일본 기독교는 일본의 5%를 차지하는 지식층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먼저 전파된 것이다.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초창기 한국교회와는 달리 처음 부터 일본기독교는 평민들이 좀처럼 접하기 힘든 고급종교로서, 지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일본 사회에 좋은 이미지는 주고 있지만, 역동적이지 못하고 영혼 구원에 대한 갈급함이 희박하며, 사도행전적인 성령의 역사하심 보다는 배움과 묵상을 통한 조용한 변화를 추구한다고 말을 듣는다. 일본에는 기독교문화는 전파되었지만 기독교의 복음은 전파되지 아니했다는 말이다. 상당한 서구 기독교 문화는 정착이 되어 있지만, 실상 속죄와 구원과 같은 복음의 핵심적 요소에 대한 호소력은 상당히 약하다고 볼 수 있다. 그 비근한 예로 일본 젊은이들이 기독교 교리와 신앙적 고백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결혼식을 기독교식으로 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으며 그것이 50%를 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규모있는 호텔에는 그러한 결혼식을 유치하기 위한 상업적 목적으로 호텔경내에 작은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 호텔 경영자가 기독교인이며, 여행자에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착각할 때가 많다. 실제로 기독교회가 운영하는 미션스쿨이나 유치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기 위하여 줄을 서기도 한다. 유치원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참여한 부모들이 찬송가도 잘 따라 부른다. 그래서 잘못 알면 여기에 모인 부모들이 모두 교인인가 하고 오해를 하지만, 그 중에 교회 나가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면 한 두명 정도밖에 없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서구 문명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은 문명과 기술을 받아들이되, 일본(和)의 혼(魂)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서양(洋) 기술(才)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초를, 그 단단한 일본의 혼을 파내지 않으려는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는 너무 힘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다 할 때에 뿌리는 씨앗은 같다 하더라도 토질에 따라서 그 농사 짓는 방법이 다를 것이다. 물을 많이 주어야 할 곳, 물을 적게 주어야 할 곳, 비료나 거름의 성분도 다를 것이다. 일본이라고 하는 토양은 분명 우리나라 하고 다른 것 같다. 복음의 씨앗은 같다 하더라도 전도와 선교의 방법은 다를 것이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선교적 열정이 강한 우리 한국교회가 일본 선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냥 십자가 군병대를 조직하여 우리 식으로 복음으로 점령을 해 버릴까? 1995년 일본의 수도 동경에서 빌리 그래함목사 전도대회를 한 적이 있다. 교회들이 상당한 기간동안 준비하고 홍보를 하여 큰 실내 야구장에서 개최했다. 얼마나 결신자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생각을 깊이 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며 시간적 여유를 가져야 하는 일본인인데 당장 그 자리에서 결신을 하라고 하면 엄청 망설이는 것이 일본인의 정서이다. 참고로 일본의 기독교 복음화는 신/구교 를 합하여 총 신도 수가 100만명 정도로 총인구의 0.9%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반찬 없이 밥을 맛있게 먹는 일본인
[ 땅끝에서온편지 ] 일본 김병호 선교사편/3. 조금의 먹거리가 있는 교회
▲ 이웃 일본 이나기교회와의 합동예배. 전CCA총무 박상증목사가 설교했다. |
일본인들의 식사에는 반찬이 많이 없다. 일본은 한국과 같이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보다 반찬이 적다. 과거 우리 한국도 어려운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리밥을 물에 말아 먹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치 않다.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반찬이다. 그러나 일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반찬이 적다. 물론 옛날엔 가난하여 반찬이 없어서 그러했지만 생활이 윤택한 지금도 일본인의 식탁에는 반찬이 적다. 온천 여관 혹은 연회에는 많은 요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연회를 위한 술안주이지 식사를 위한 반찬이 아니다. 술안주 요리를 먹은 뒤 식사를 할 때에는 밥과 간단한 된장(미소)국, 그리고 단무지 두쪽 정도가 반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본인들은 반찬이 없어도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 좋은 쌀로 밥을 짓는다. 한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압력밥솥의 밥 보다는 그 유명한 코끼리 전기 밥솥으로 지은 반지르하게 윤이 나는 흰쌀밥을 좋아 한다. 아무리 저렴한 식당이라도 쌀밥만은 좋은 것을 제공한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우동이나 라면을 먹을 때도 다른 반찬이 없다. 그냥 우동과 라면의 본질적인 맛을 즐기며 식사를 한다. 생선회의 경우도 그렇다. 초고추장에 상치 등을 곁들여 먹어야 제대로 먹는다 하고, 불고기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인 우리 한국인과는 달리 생선회를 와사비 간장에 살짝 찍어 먹고 불고기의 경우도 양념을 많이 쓰지 않는다. 반찬 없으면 밥맛이 시원찮고, 우동과 라면에도 김치가 없으면 무슨 맛으로 먹느냐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인은 반찬 없이 식사를 잘 하는 민족이다. 즉 사물의 본질적인 면에 비중을 많이 둔다고 보면 된다.
일본이 1867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미국보다는 유럽쪽으로 인재들을 보내서 배워오게 하였다. 특히 영국, 독일, 프랑스에 많은 젊은 인재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서 영국과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중에서도 교육에 관한 것은 독일의 영향을 받았으며 기독교의 젊은 신학도들이 독일로 유학을 가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미국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교회와는 달리 일본교회는 독일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조직신학, 성서신학, 실천신학 할 것 없이 독일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수 십년 전에 칼 바르트의 교의학이 완역되어 출판된 곳이 일본교회다.
지금도 대표적 신학교인 동경신학대학의 조직신학 강의가 칼 바르트의 신학이며, 강해설교학 교수로 유명한 루돌프 보렌의 설교학이다. 일본교회 목사들의 설교는 강해설교가 주류이다. 아주 짧은 성경 본문을 길게 강해한다. 보통 예배에서 40분 정도의 강해설교를 하며 설교에는 예화가 없다. 주제설교 혹은 제목설교에 길들여진 우리 한국 교인들이 예화도 없는 강해설교를 40분 동안 듣는 것은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찬이 없어도 밥을 맛있게 잘 먹는 일본인들은 예화없는 본문 강해설교를 잘 듣는다. 즉 성서의 본문 말씀이 전해주는 깊은 뜻을 목사는 주해하여 설교하며 교인들은 그 말씀을 깊이 경청한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주일 오후에는 오늘 목사의 설교를 평가하며 토론하는 학습회를 가지기도 한다.
한국교회 찬송가는 미국의 복음 찬송이 많은 반면 일본교회는 독일(유럽)교회의 예배 찬송가가 많다. 한국교회에서 많이 불려지고 있는 복음성가를 부르는 교회는 찾기 힘들다. 예배 반주를 피아노로 하는 교회는 없고 리드오르간(풍금)이 대부분이고 좀 규모가 있는 교회는 소형 파이프 오르간으로 예배 반주를 한다. 성가대가 있는 교회는 찾기 어렵다. 성가대가 없어서인지 예배 반주는 한 사람이 담당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예배의 모든 찬송가는 기립하여 부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힘있게 그리고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반면 일본교회는 가급적 내 목소리가 옆 사람 찬송하는데 방해가 안될 정도의 크기로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교회 찬송가는 한국교회 찬송가 보다 악보의 음정이 반음 혹은 한음을 낮추어져 있어서 부르기가 쉽다.
통성으로 하는 기도는 없으며 대표기도는 간결하며 중언부언이나 의미없는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 신앙고백도 또박또박하게 문장과 단락을 끊으며 잘 맞추어 한다. 일본교회와 재일대한기독교회와 합동예배를 드릴때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면 속도가 맞지 않아서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한다. 일본교인들이 절반 쯤 하고 있으면 우리 한국교인들은 이미 끝나서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한국교회가 뭐든지 빠른것 같다. 요즈음 조국 방문하여 예배 참석하여 주기도를 하면 무척 빨라서 따라가기가 힘들다.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은 암송하여 하는 것 보다, 인쇄된 것을 주의깊게 읽는 것이 훨씬 마음에 와닿는다.
한국교회가 교회성장에 힘을 기울이면서 복음의 본질에서 자꾸만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장과 전도를 위한 모임과 프로그램이 너무 많다. 밥상에 너무 반찬이 많아서 다 먹다가, 또한 편식하다가는 소화불량으로 병이 들고 만다. 그러한 교회가 오래가지 못한다. 그에 비하면 일본교회는 너무 반찬이 없는, 본질에만 매여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일본교회가 조금은 시대적 변화에 응답하면서 젊은이들이 많이 출입할 수 있는, 조금은 역동적이며 영혼 구령사업을 위한 조금의 먹거리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조국을 떠난 실향민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일본 김병호 선교사편4
▲ 2008년10월13일 재일대한기독교회 100주년 기념행사 후에 임원단 일동. |
조국을 떠난 실향민
김병호 선교사
구한말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암울한 현실 앞에 배움을 통하여 조국을 건져 보겠다는 포부를 품고 현해탄을 건넌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1906년 서울YMCA가 총무를 동경으로 파송하여 재일본 조선YMCA을 설립하여 성경공부를 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08년에 동경교회가 탄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1908년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이기풍목사를 제주도에 파송했고, 동경교회의 요청을 받아1909년, 105년 전에 한석진목사님을 일본 동경에 파송하게 됨으로 동경교회는 조직교회로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그 동경교회를 모교회로 하여 지금 우리 동포들이 사는 일본 곳곳에 재일대한기독교회가 홋카이도에서 오끼나와 까지 일본전역에 100여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 그 외에도 근년에 한국의 여행 자율화의 영향으로 일본의 대도시에 많이 와있는 우리 동포들을 위한 교회가 대도시에 많이 설립되어 있다.
미주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태평양을 건넜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나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은 좀 다르다. 재일동포의 일본 이주는 타지역 한인 이민의 역사와는 달리, 일제의 강제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온 이들과 조국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일본 땅에 유입된 실향민들이 자유를 늑탈 당하고 나라없는 설움과 모멸찬 차별 대우를 부등켜 안고 고난의 가시밭 길을 걸어온 역사이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귀국선을 타지 못한 수 십만의 동포들이, 조국의 분단과 함께 이념을 달리하는 민단 과 조총련으로 분립되어 오늘에 이르런 가운데 온갖 차별의 아픔과 상흔이 아직도 도처에 남아있다. 일본으로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는 없다. 그래서 일본에서의 '이민교회'라는 말은 아주 생소하게 들린다.
이러한 재일동포에게 지난 100여 년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고난의 역사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밝은 미래의 꿈을 심어온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바로 '재일대한기독교회'이다 소수자로서 차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지난 2008년에 선교 100주년을 맞이 했다.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선교 100주년을 정리하면서 그 주제를 '감사의 100년, 희망의 100년'으로 정하고 구약성경 창세기 45장 5절에서 그 의미를 찾게 되엇던 것이다.
형들에게 버림 받고, 타국에 팔려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모진 고난을 받아 왔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으며,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을 구하러 왔던 그의 형제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요셉을 알아본 그 형제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신앙적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재일동포들이 과거에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지고 적국 일본땅에 와서 수많은 고난과 차별속에서 살아왔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먼저 일본 땅에 보내주셨다는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재일동포를 향하여 등불을 밝게, 높게 들고 재일동포들의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백성에게도 선교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희망을 가지고 출발 한 것이 앞으로의 100년의 선교적 과제로 삼은 것이다.
일본 땅에서 특이한 마이너리티 교회로서의 특성을 가진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재일동포 선교와 일본 선교를 위해 본국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세계교회와 연대하며, 일본교회와도 연대하는 에큐메니칼적인 특성과 또한 오랜 역사 속에서 동포 3세, 4세, 5세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제 젊은이들이 일본인과 자연스럽게 혼인을 하고 있으며, 이제 교회 안에는 재일동포, 일본인, 그리고 그들에게서 태어난 혼혈아, 최근에 입국한 신1세, 일본어만 하는 세대, 한국어만 하는 세대, 양쪽 다 잘 하는 세대 등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또 하나의 특성은 다양성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하나님께서 재일대한기독교회에게 주신 복으로 알고 감사의 고백과 함께 이러한 복을 함께 나누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교회이다.
현재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총회 파송 선교사는 20가정 정도다. 그 중에 다섯 가정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지만, 그 외의 일본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을 섬기는 선교사라기 보다는, 일본에 살고있는 100만 우리 재일동포들을 섬기며 선교하고 있는 재일대한기독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행진에 동참하여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일본 김병호 선교사편(5)
▲ 지난 6월 제네바 보세이에서 만난 조그련 대표들과 함께. 오른쪽 세번째가 필자. 그 오른쪽이 강명철 위원장. |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행진에 동참하여
1986년 일본에 첫 발을 디뎠을 때에 조국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서적이 두 권 있었다. 두 권 다 미국 한인사회에서 발행한 것으로 기억한다. 한 권은 제대로 보도되지 아니한 광주사태에 대한 사실을 독일 기자들이 알려 온 것을 편집한 서적이고, 또 한 권의 책은 북한에 고향을 둔 재미동포들이 북한을 방문한 후에 기록한 여행담을 모아 편집한 서적이었다. 이러한 서적을 조국땅에서 읽다가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북녁땅 소식을 그곳에 다녀온 이들을 통하여 접하면서 평양에 기독교 예배당이 있다는 사실과 많은 지하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믿혀지지가 않았다.
북한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과 함께 국제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세계기독교회협의회(WCC)가 주관하여 1984년 10월29~11월2일에 일본 동경에서 100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YMCA 수양관 '도잔소(東山莊)' 회의에서 출발한다. 애석하게도 북한교회 대표들은 참석치 못했지만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및 해외교회가 본격적으로 협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 남북한 교회의 첫 만남은 1986년 9월2~5일 스위스 글리온에서 였으며, 일본에서의 첫 만남은 1989년에 일본NCC의 초청으로 시작되었으며, 그와 때를 같이하여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 북한에 방문단을 보내게 됨으로 왕래가 활발해 졌다.
그 당시 남북한의 왕래가 어려운 상황에 재일대한기독교회는 남북한 교회를 이곳 일본 동경에서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남과 북, 그리고 해외교회 기독자들이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교적 사명이라 고백하고 1990년 7월에 동경한국YMCA를 장소로 하여 처음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기독자 동경회의'를 주관하여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북한에서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서기장 고기준목사를 비롯하여 5명의 대표가 참석하였고, 한국에서는 NCC를 비롯하여 재일대한기독교회와 협약관계에 있는 각 교단, 미국 카나다 독일 등지의 한인 디아스포라교회 지도자들이, 그야말로 북한교회가 정말 실존하는가, 북한에도 목사가 있는가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 앞을 다투어 동경으로 모여왔다. 이 모임은 2002년 까지 8회에 걸쳐 일본 동경을 중심으로 계속되었으며 남북한 교회의 왕래가 수월해질 때까지 계속하였다.
일본에는 북한을 국적으로 하고 있는 조총련이 있기 때문에 재일대한기독교회가 북한교회 대표들을 초청하기가 수월했는데, 조국의 이념적 틈바구니에서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중요한 가교의 역할을 한 것은 지금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동역자이며 선임 선교사인 정연원목사와 필자는 여덟 번에 걸쳐 가진 이 회의의 준비와 진행을 돕는 실무자로서 참여했으며 조금이나마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움직임에 도움이 된 것과 조국교회와 해외교회에 많은 인맥 관계를 쌓게 된 것을 감사하고 있다.
지난 2014년 6월17~19일 스위스 제네바의 보세이에서 북한교회와의 만남이 WCC주관으로 이루어졌다. 지난 2012년 1월 작고한 故 강엽섭 前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위원장 이후 그 아들로서 현재 위원장을 맡고 있는 강명철목사를 공식적으로 처음 만난 자리여서 한국교회뿐 아니라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강명철 위원장과 리정로 부위원장 등 4명이 참석하고, NCCK와 15개국에서 50 여명이 참석했다. 필자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로서 대표로 참석했다.
이번 모임은 전술한 도잔소 회의의 30주년을 기념하여 모였는데 세계교회가 매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정할 것을 제안하는 선언문이 채택됐다. 필자는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 그동안 매년 8월 둘째 주일에 실시한 평화통일주일헌금 1만달러를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 전달하였다.
공식 회의가 끝나고 '우리끼리', '우리말'로 가진 비공식 자리에서는 최근 굳어져 있는 북한과 일본의 정치적 관계가 풀리는 조짐이 있어, 그렇다면 해방 및 분단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 삼일절을 전후로 동경에서 남북교회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다시금 재일대한기독교회가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의견들을 나누었으며 오는 9월말에 가지는 본국 선교협약 7교단 협의회에서 협의하자고 했다.
재일대한기독교회와 선교협약 관계를 가지고 긴밀한 교류를 하고 있는 조국교회는 본교단을 비롯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장 합동, 예장 대신, 예장 백석 등 7개 교단이다. 통일관계 등의 문제는 대체적으로 NCC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적 성향의 교단들이 참여하고 있지만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주관하여 초청하게 되면 선교협약 관계에 있는 보수적 성향의 교회도 참여하게 되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재일대한기독교회는 분열된 조국교회를 만나게 하는 참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서는 교회인 것이다. 해방 및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에 북한교회와 남한교회가 이곳 동경에서 반가운 모습으로 대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