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사람 어우러진 지상낙원
[ 땅끝에서온편지 ] <1> 아프리카의 진주...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1월 19일(금)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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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우, 이두심선교사 부부. |
'우간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악명높은 이디아민, 엔테베작전, 에이즈 천국, 에보라질병, 오랜 내전 등이다. 그러나 우간다에 도착하면 이 모든 이미지는 일 순간에 바뀌어진다. 적도가 머리 위에 지나가지만 1천1백m 이상의 고지에 있어, 기후가 초가을 날씨에 가깝다.
한국에서 가져온 코스모스씨를 뿌렸더니 계속 번식해서 학교 교정이 온통 코스모스 밭으로 변해 나중에는 코스모스를 전부 뽑아 버렸던 일이 있었다. 낮에 기온이 40도를 오르내리지만 건조해서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다. 또한 대부분 색깔이 일년내내 초록이다. 길가에 나무들이 우거지고, 곳곳에 숲과 정글이 있다. 그리고 습지가 많아서 땅이 기름지다.
남쪽으로는 빅토리아호수가 있는데, 세계에서 두번째로 넓고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호수이다. 넓이가 대한민국 남한의 90% 정도로 북쪽으로는 만년설 르웬조리산이 있으며, 이 호수에 나일강의 근원지가 있다. 호수에는 물고기가 풍부하다.
우간다는 1960년대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였다고 한다. 그러나 1971년에 권투선수였던 경호실장 이디아민이 대통령의 외유를 틈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후 9년간 영국식민지 시절에 동아프리카를 관통하는 철도공사때 건너온 이래 동아프리카의 상권을 쥐고 있던 인도인들을 강제로 축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많은 기독교인을 죽였으며, 성공회 대주교가 순교당하기도 했다. 이후 이슬람을 받아들인 우간다는 모스크를 세우고, 학교들을 세워 회교를 융성하게 했다. 지금까지 이슬람은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이슬람 종교일이 국경일이 되었다.
1979년 현 대통령인 무세브니에 의해서 이디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했고 몇 년 전에 죽었다. 1985년까지 정권다툼으로 내전이 이어졌으며 1990년에 와서야 비로소 안정을 찾아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영국 성공회가 약 1백30년 전에 먼저 들어왔고, 몇 개월 후에 천주교가 들어왔다. 그러나 왕이 두 종교 간에 다툼을 문제삼아 핍박하여 50여 명의 순교자들이 나왔고, 6월3일이 순교자기념일이다.
그러나 우간다는 아직도 전통종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끔씩 어린아이들이 사라지고, 무당의 희생제물로 이용되기도 한다. 국가적으로나 교회들이 강하게 반발하며 계몽하지만 부자가 되려는 자들이 무당의 지시에 따라 아이를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다. 교회를 다녀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무당을 찾아가 도움을 받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1960년대에 들어와 자생 독립교회들이 늘어나면서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그 후에 내란 등으로 주춤하다가 1990년대에 다시 영적부흥이 일어나 곳곳에 교회가 개척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지식이 부족하고 목회 훈련이 없어 교회가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또한 이단과 사이비가 번성하여 지역마다 이단 교회들이 자리잡고 있다.
우간다에는 한국인들이 20여 년 전 보따리 장사부터 시작해 지금은 건축, 철공소, 창고업, 천막 등의 사업을 하며 2백 여명이 살고 있는데 이중 절반이 넘는 수가 선교사와 가족들이다.
한국 선교사는 25년 전 독신 여성 선교사가 들어와 간호사역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현재는 약 40가정 정도가 교육, 제자훈련, 의료, 영성훈련, 교회 개척 등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주님이 원하시면 간다
[ 땅끝에서온편지 ] 2)아프리카 선교사로 부르심... 우간다 김종우 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2월 06일(월) 09:23
필자가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산리의 운산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때였다. 이 교회는 구름과 산이 어울어진 깊은 산골에 있었는데, 교인이 50명 정도로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그래도 전라북도에서는 3번째로 오래 된 교회이며, 로이스선교사가 논산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서 어느 청년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세운 교회가 운산교회이다.
당시 케냐에서 선교하시던 전준수선교사님이 뜻밖에 운산교회를 방문하셨다. 필자의 가정과는 계속 친분이 있어왔는데, 시골에 목회하러 온 이후로는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툭 던지시는 말이 "이곳에 왔으니 아프리카도 올 수 있겠구만"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농담을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몇개월 후에 정식 초청장이 도착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함께 사역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두번째 편지였다. 5년 전쯤에도 한 번 편지로 요청이 왔었다. 그러나 그때 필자는 '선교사란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특별한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대답조차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 두번째 초청장은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함께 고민하던 아내에게 "시골에 올때는 당신과 상의없이 내 결정으로 왔지만, 선교만큼은 당신이 먼저 결정하고 내 뜻을 정하겠소. 기도하며 당신의 응답을 기다리겠소"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 일을 위해 특별한 기도의 시간을 갖고자 했다. 한 달 반이 지날 무렵 아내는 점점 선교사로의 부르심에 확신을 갖고 있었고, 필자는 '어디든 주님이 원하시면 간다'고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로 파송되기까지는 아직 두 가지 높은 장애물이 놓여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홀로되신 어머님이 장남인 나에게 정신적인 부분을 포함해 여러면에서 의지하고 계셨기에 선교에 대해 감히 설득하거나,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시골교회로 올 때부터 크게 낙심하셨던 어머니셨다.
또 한 가지는 후원교회를 찾는 일이었다.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였던 필자는 다른 큰 교회들을 알지도 못했고 찾아 가서 어려운 부탁을 하기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주님은 두 산을 당신께서 직접 옮겨 놓으셨다. 어머님에게 기도중에 말씀과 환상으로 "그는 내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교회도 총회 세계선교부를 통해 연결해 주신 것이다.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변명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셨다.
믿음만 가지고 아프리카로
[ 땅끝에서온편지 ] <3>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12월 13일(월)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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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간다에서 버스 역할로 쓰이는 마타투라는 승합차. 12인승이지만 두 배가 넘는 사람을 태우기도 한다. |
아프리카를 향한 부르심을 확신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더욱 큰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프리카가 어떤 곳인가? 어떻게 선교 할 것인가? 막막하기만 했다.
필자 자신을 바라보니 특별한 재능이 없다. 선교에 유익할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가만히 고민하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선교도구로 태권도가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프리카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많다고 하니까.
시골 교회에 있으면서 몰래 읍에 있는 태권도 도장의 속성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늦게 배우는 태권도라 다리를 찢는데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주여, 도와 주소서' 절로 탄식이 나온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난 때 노회를 마치고 오다가 그만 졸음운전으로 차 사고가 나 5주 진단을 받았다.
'태권도는 아니구나' 그렇다면 어떻게 선교 할 수 있을까? 누워서 계속 고민했다.
총회에서 하는 8주간의 훈련에 들어갔다. 새벽마다 주님께 호소하며 탄식했다. "주여, 왜 하필 저 같은 무능하고 부족한 자를 선교사로, 더욱이 아프리카로 가라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다른 이를 보내 주소서!"
한달이 거의 다될 즈음 주님이 심령에 주시는 말씀이 떠올랐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일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기도 할때마다 주시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만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아프리카, 미지의 땅을 향해 아내와 4세, 2세의 두 아들과 함께 눈물짓는 어머님과 형제들을 뒤로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1997년 6월 5일 새벽 5시경에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 내렸다. 냄새가 쾌쾌하다. 전준수 선배 선교사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첫 인사가 "온다더니 드디어 왔군”이다.
인사가 좀 묘하다. 온다면서 안 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필자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몇일 간 시차로 정신이 멍하고 병든 닭 모양으로 졸립기만 하다.
생전 처음 만나는 흑인들 속에 끼어 함께 지낸다는 것이 매우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교회 예배부터가 너무 생소하며, 고문 자체이다. 3~4시간을 온 몸을 흔들며 예배드리는데, 의자 등받이도 없고 설교는 못알아 듣겠고 배는 고프고, 적응하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제 본 사람이 오늘 또 오고, 내일도 같은 사람인듯 하다. 도대체 얼굴이 구분이 안된다. 언어 학원가는 12인승 승합차에 올라 탔는데 가관이다. 매일 인원수가 늘어난다. 한번은 26명까지 탔다. 사람들이 외국인인 필자의 무릎 위로 올라탄다.
그래도 길거리에서 사먹는 군 옥수수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하루의 날씨에 사계절이 다 있다보니 옷들이 제각각이다. 참으로 모든 것이 다양하다, 옷도, 얼굴색도, 차량도, 언어도, 음식도…
우간다 김종우 선교사
여기선 만남과 손님이 중요해
[ 땅끝에서온편지 ] 아프리카 생활에 적응하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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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0일(월)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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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민족신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필자(뒷열 좌측). |
한인 동부아프리카 선교사대회가 몸바사 항구도시에서 열렸다. 마침 선교사들과 교제도 할겸, 나무등받이와 나무의자가 달린 고속버스를 타고 약 6시간 이상 군데 군데 구멍이 나고 비좁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약 2~3시간을 가고 있는데 버스기사가 별안간 아무 말 없이 차를 세운다. 혹시 정류장인가, 휴식장소인가 했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벌판이다. 기사는 길건너 마주오던 택시기사와 몇분간 얘기를 한다. 친구같다. 그리고 아무일 없었다는 듯 다시금 차를 몰기 시작한다. 버스 승객들은 아무도 불평없이 조용하다. 필자 혼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공공버스를 자기 개인의 차처럼 여기며 아무 곳에서나 서서 친구하고 환담한다?
아프리카인들은 시간 약속이나, 스케줄을 중시하기보다는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길가다 아는 이를 만나면 우선적으로 인사하며 담화를 즐긴다.
그리고 관공서의 일도 공무원과 친분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일이 수월해 지든지, 아니면 한없이 지연된다.
손님은 마치 천사를 영접하듯이 한다. 현지인 집을 방문하게 되면 정성껏 영접하며 대접하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들은 중단되어도 무방하다. 손님이 우선이다. 그리고 손님은 곧 축복을 안고 온다고 믿는다. 만일 비가 함께 오면 두배의 축복으로 여긴다.
언어를 익히며 아프리카에 적응과 선교 준비를 위해서 언어 훈련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는 동부 아프리카의 선교사들에게 스활리어를 가르친다. 전 가족이 함께 기숙하며 배우는 좋은 시설과 유능한 강사들로 유명하다. 여기서 5개월 지내며 영어와 스활힐리를 동시에 배우려고 노력했다.
독일인, 미국인, 영국인 등 다국적 선교사들과 손짓 발짓으로 교제하면서 다양성에 조금씩 익숙하게 되었다. 서로 다른 음식을 나누며, 다른 문화를 이야기 하며, 선교에 대해 나누는 짧지만 귀한 경험이었다.
한번은 집안일을 돕는 현지인 아주머니가 거의 삭발에 가까운 머리 스타일로 나타났다. 아내와 나는 많이 놀랐다. 아주머니가 머리를 만지면서 어제까지는 가발을 쓴 것이고 지금이 진짜 머리라고 한다.
아프리카 여인들은 돈이 생기면 가발을 구입해서 쓴다. 머리가 자라면서 거꾸로 구부러진다.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보자기로 모자를 만들어 쓴다. 그리고 흰색을 무척이나 좋아 한다. 피부색에 대한 컴플랙스가 큰 것같다.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신학교로 인도하신 하나님
[ 땅끝에서온편지 ] <5> 사역지를 확정하다... 우간다 김종우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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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31일(금)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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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만선교회 부지에 세워진 김종우선교사 사택. |
1997년 11월 말, 케냐는 대선을 앞두고 외국인들에 대해 경계를 높였고, 비자도 잘 내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친구 선교사는 탄자니아에서 선교하자고 권했다.
마침 우간다를 답사겸 며칠간 다녀오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말까지는 사역지를 확정하기로 하고 특별 작정기도에 들어갔다.
기도 후 아내와 함께 우간다로 가기로 뜻을 모았다. 우간다로 간다고 하니까 선배 선교사들이 우려하며 만류한다. 우간다에는 유명한 강도 무리가 많다, 자녀 교육이 어렵다, 물이 없다 등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실제로 우간다를 방문해 보니 도시는 음산하며 곳곳에 전쟁의 상흔들이 남아있었지만, 시골은 매우 친근하며 푸근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1998년 1월 초에 가족들과 함께 이삿짐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우간다 캄팔라 수도에 위치한 선배 선교사의 집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방 한칸을 빌려 네 명의 가족이 4개월 정도를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온 나라가 경제적 위기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교회들이 일제히 선교비를 절반으로 줄였다. 우간다에서도 집세가 비싸서 집을 얻기가 불가능했다. 아이들의 학업을 이어가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선교사를 사임하고 다시 한국교회로 돌아갈 수도 없다. 속은 타오르는데 아이는 "학교에 가고 싶다"며 운다.
우간다는 천주교와 성공회를 제외하고는 독립교회들이 부흥하고 있다. 그러나 독립교회 사역자들은 대부분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여서 신학적 기반을 둔 목회를 하기 힘들고, 따라서 이단들이 판을 치고 있다.
선배 선교사들은 신학 교육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고 목회자들을 모아 훈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마침 필자가 속한 케만(KEMAN)선교회도 넓은 대지에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아직은 학교 안에 거주하는 선교사 가정은 없었고, 모두 도시에서 오고가고 있었다.
어려운 경제형편 때문에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일년치 집세로 신학교 경내에 사택을 짓기로 한 것이다. 신학생 훈련에도 더욱 효과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3개월만에 작은 집을 짓고 이사를 들어갔다. 마침 한국에서 후원교회 목사님과 장로님이 방문을 하셨다. 숲속에 집을 짓는 것을 보시고 "담장을 세우고 우물을 파라"며 격려해 주셨다.
그리고 신발 없는 어린이와 말씀을 사모하는 신학생들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아 "여기가 땅끝이구만"하신다. 그리고 열심히 신학교 사역을 후원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