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팔라우 이홍원선교사 (1~5회)

최고관리자 0 1,571 2020.06.21 19:59

주님 말씀따라 남태평양 섬나라에 오다

[ 땅끝에서온편지 ] < 1 > 미지의 세계로 부르신 주님 팔라우 이홍원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8월 12일(목) 10:19
팔라우에 오게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인도하심이다. 본래 중국선교를 희망하고 대만에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며 언어습득 및 문화적응을 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중국인 목사님과 3년 동안 개척교회 협력사역을 하고 있을 때, 대북한인교회 김달훈목사님으로부터 "총회에서 영어와 중국어가 가능한 선교사를 찾는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당시 섬기던 교회를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동역하던 대만 목사님도 만류하셨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확실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장소는 팔라우,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 아내 김숙자선교사, 두 자녀와 함께한 이홍원선교사.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해 보니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해 위치를 겨우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어엿한 국가로서 지도에 표기돼 있다.  총회 파송선교사로 훈련을 받고 종암교회의 후원으로 팔라우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던 때는 1993년 11월 추수감사절 직전으로 기억한다.  후원교회 장로님, 집사님들과 함께 괌을 거쳐 팔라우에 들어오게 되었다. 팔라우에 가까이 왔다는 기내 방송을 듣고 창밖을 내려다보니 오색찬란한 아름다운 바다와 푸른 초장 같은 육지의 전경이 펼쳐졌다. 내 입에서는 시편 23편 말씀이 흘러나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것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양떼들이 마냥 뛰어다니는 모습이 그려졌다. 순간 또 다른 장면이 스치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목자 없이 유리방황하는 양떼들의 모습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때 성령께서 감동으로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을 먹이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셨다.

한국외항선교회 소속으로 필리핀에서 약 1년 반, 대만에서 3년 동안 선교 사역을 하다가 총회 파송으로 팔라우에 온지 약 18년이 되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팔라우는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에 속한 작은 섬나라로서 면적은 우리나라 거제도만하며, 3백여 개의 작은 섬 중, 유인도는 8곳으로, 전화국 경찰서 소방서 우체국 병원 등이 단 한 곳씩만 있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을 연상하게 되는 이 곳은 열대성 기후이며 무풍지대여서 비록 남태평양 바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나라인데도 호수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고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방파제가 팔라우를 둘러싸고 있어서 파도가 오다가 방파제에서 부딪쳐 정작 팔라우는 파도도 바람도 없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오염되지 않은 지상 낙원이라 부른다. 

이곳은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다가 1994년에 독립해 유엔의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우리나라와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  과거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징용으로, 위안부로 끌려와 모진 고생을 한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모계사회였지만 지금은 점차 부권중심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추장제도가 있어 나라의 제반사는 추장의 동의를 얻어 행사하고 있다. 정치제도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대통령제, 상하 양의원제, 16개 주에 주지사가 있다.

낙천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생활고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으며 조금은 게으른 편이다. 예전에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살아오다가, 독립한 이후 미국의 원조가 끊어지고 자체적으로 관광 상품을 개발해 관광객들을 유치해 살아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숫자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

공산품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물가는 우리나라보다 약 2~3배가 비싸다. 그러나 비록 작은 섬나라 일지라도 선교전략적인 측면으로 보면 매우 중요한 곳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중국대륙에서 들어온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교사는 대륙에 들어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없지만 여기서는 신분을 감출 필요도, 이사를 자주 다닐 필요도 없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어떠한 역사를 이루고 계신지 나누기를 원한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만이 우리의 중심을 아시고…"

[ 땅끝에서온편지 ] <2>다툼을 화해로 만드신 주님 팔라우 이홍원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8월 19일(목) 14:52
팔라우에 도착해 처음에는 한인교회를 섬기다가 두 달 뒤인 1994년 1월 첫 주부터는 중국인 교회를 개척했다. 팔라우 한인교회는 오래전부터 몇 사람이 모여 기도하면서 시작되었고, 내가 오기 전까지 여러 명의 목회자들이 거쳐 가셨다고 한다.

  
▲ 팔라우에 도착한 후 1년 동안 사택에서 예배를 드렸다.팔라우를 방문한 임택진목사님과 교인들이 함께했다.
주로 합동측에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목회자를 파송했지만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서 몇 명 안되는 성도들은 오랫동안 목자없는 양떼처럼 목회자를 무척 갈망하여 왔다고 한다.  나는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했기에 주님이 부르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겠다는 철저한 고백을 해왔다. 그래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미지의 땅에 가족을 이끌고 오면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새로운 사역지에 대한 기대와 최선을 다해서 선교사역을 하겠다는 각오로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와서 보니 상황이 달랐다. 어느 성도는 "이 곳에서는 묻지마 선교를 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차츰 알게 된 일이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한국에 돌아갈 수 없는 해외 도피자이거나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도 다른 이성과 함께 와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역적으로도 좁다보니 성도들도 서로 간에 많은 상처들을 주고받고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한인이라야 불과 20여 명 남짓한 이 곳에 한인교회가 본교단과 합동측 소속의 교회 두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미묘한 상황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대만에서 이 곳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라는 말씀으로 감동을 주셨기에 '아! 다음 사역지는 섬기는 훈련을 하시려나보다'라고 굳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한인들을 섬기는데, 교인 한 명 한 명을 비롯해 목회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섬김의 훈련을 시키셨다.

두 교회 교인들간에는 종종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고, 우리 교회에서도 나를 욕하며 몇 가정이 다른 교회로 가기도 했다. 이에 우리 부부는 어디를 가든지 은혜받고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축복해 주었다. 심지어 어떤 교인은 한국인 사역은 내려놓고 중국인 사역만 하라고 권면 아닌 권면을 해오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받을 때도 많았다. 그래서 너무 힘들 때는 우리 부부가 교회당 안에서 부둥켜안고 엉엉 울면서 "하나님 아시지요? 아버지 아시지요?"라며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변명을 하고 설명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이 아시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는 태도로 교우들을 섬겼다. 그 후 팔라우에 전화선을 가설하는 한국회사가 들어오게 되고, 조선족들도 한국회사에 들어와서 일하면서 30여 명이 예배를 드리게 됐다.

그런 와중에 우리교회는 중국인 교회를 개척하느라 늘 분주했다. 한인교회 성도들도 중국인 선교를 열심히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교라는 것을 늘 인식시켰고, 얼마 안되는 성도들도 기쁜 마음으로 중국인들을 섬겨주었다. 순진한 양처럼 선교에 관심 갖고 도와주신 한인 성도들을 잊을 수가 없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합동측 목사님이 갑자기 팔라우를 떠나셨다. 그리고 진통과 우여곡절 속에 모든 한인들이 이제는 하나가 될 때라는 연합에 대한 간절함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어느 날 교회를 떠났던 성도들이 찾아와서 두 교회를 연합해 달라고 간청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부작용도 없고 평안하고 순조롭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하시게 하면 은혜롭고 덕스럽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연합하여 더 열심히 선교를 하게 되었고, 한인사회도 평안해지고 교회도 부흥하기 시작했다.

집회때마다 중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한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역에 열중하느라 우리 부부는 각각 다른 시간에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가는 위험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당시 총회 세계선교부 총무인 임순삼목사님이 팔라우를 방문한 뒤 우리 상황을 보시고 "선교사가 쉬지 않으면 죽는다. 1년간 다른 사람을 보낼테니 안식년을 가지라"고 권하셔서, 팔라우에 온 지 6년 만인 1998년에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







대륙을 향한 '복음의 못자리'

[ 땅끝에서온편지 ] <3>중국인선교의 터를 넓혀가며 팔라우 이홍원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8월 26일(목) 10:58
팔라우에서 중국인선교는 1994년 1월 첫 주(팔라우에 부임한지 1달 후)부터  5명(어른 3명, 아이 2명)으로 시작했다. 이들은 중국에서는 전혀 복음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 당시 팔라우에는 중국인 봉제 공장 2곳과, 어선회사 2곳, 농장들이 있어서 꽤 많은 중국인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관계를 형성하면서 차근차근 복음을 심어나갔다. 처음에는 길거리나 시장 어디서든지 중국인 목소리만 들리면 달려가 정겹게 인사를 나누며 집을 알아 두었다가 찾아가 점차 사귀어 갔다. 아내는 그 비싼 '금치'(김치)를 많이 만들어 찾아가는 곳마다 조금씩 가지고 갔다. 소위 '김치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그 후에 중국인들이 "김치 얻어먹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해 한바탕 웃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낯선 이국땅에서 중국어도 서투른 외국인이 집요하게 접근해오니 수상하기도 한지라 의심을 많이 했다. 그래도 주님의 심정으로 중국인들을 하나하나 찾아 다녔다.

  
▲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역을 시작한 후 첫번째 세례를 베풀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다고 고백했던 이들은 사역의 가장 든든한 동역자가 되었다.
어떤 중국인 자매는 상해 대학 영문과 출신인데 "나는 오직 내 자신만 의지한다"고 했다. 그럴지라도 농장에서 일하고 있던 자매를 위해 밤중에 비포장도로를 한시간을 달려 예배에 데리고 다녔다. 나중에는 철저히 예수님을 믿고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게 됐고, 이 곳 복음 방송국에서 오랫동안 섬기다가, 교회서 신실한 형제와 결혼해 지금은 미국에서 자녀를 낳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중국인 선교 1차 년도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주제를 갖고 매 집회시 주제가를 부르며 예배를 진행하였다. 이 주제를 정한 것은 중국에서 개인의 인권은 '오직 당을 위해 충성'해야 하는 것으로 배워왔기에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것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말씀을 들은 중국인들이 은혜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해 말 40명 이상이 모였다.
우리가 살고있는 사택 거실에서 주일 오전과 오후에는 한인예배를, 밤에는 중국인예배를 드렸는데 장소 문제로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1년 만에 넓은 장소를 마련해주셨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있던 건물을 저렴한 가격에 임대해 개축했고, 이를 통해 중국인 선교를 활발히 이뤄갈 수 있었다.

2차 년도에는 '우리는 한가족'이라는 주제로 중국인들을 섬겼다. 이때도 주제가를 부르며 집회를 했는데 이런 주제를 정한 이유는, 중국 동서남북 각 곳에서 모여든 이들이 수억의 인구 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개인주의 사상이었다. 남을 배려하거나 양보하지 않는 개인주의의 특성은 식사할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 뒤에 있는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많은 음식을 가져와 음식이 부족하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그렇게 많이 가져온 음식은 먹지도 못하고 버려지는데 말이다. 그래서 음식을 담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먼저 갖다주는 훈련을 실시했고, 이는 상대방을 섬기는 훈련도 되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는 말씀처럼 2차 년도에는 중국인들의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파송교회인 종암교회에서 후원해 주신 버스를 늘 몇번 씩 운행해야 했다.

3차 년도에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주제로 "이제는 이 귀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자"고 외쳤다. 이때부터는 팔라우에 오는 중국인들은 누구나 다 교회를 자기 집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집회없는 날도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섬기기를 좋아하는 아내, 김숙자선교사는 영적, 육적으로 늘 그들의 엄마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냈다.

이렇게 믿은 사람들은 보통 2년에서 3년 사이에 모두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러기에 팔라우는 '복음의 못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믿고 돌아가는 이들은 중국 전역으로 흩어져서 그들 가족(안 믿는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 및 부모), 친척, 친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생생한 간증들을 많이 전해오곤 한다. 부족한 우리 부부를 이렇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중국인들의 변화되는 모습에서 언제나 위로를 받고 큰 기쁨으로 지난 18년을 팔라우에서 섬길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을 이뤄오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복음의 소중함을 깊이 체험하며

[ 땅끝에서온편지 ] <4>제자양육 사역 팔라우 이홍원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9월 02일(목) 13:22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

팔라우의 중국인들은 단기 기간(2년 혹은 3년)으로 들어온 취업 노무자들이라 늘 이동이 많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늘 새로온 신자들이 많다. 그래서 사역을 할 때는 힘이 몇 배로 든다. 양육해왔던 제자들이 업무기간이 만료되어 떠나가고, 새로 들어온 중국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영접시키고 결신해서 늘 제자양육을 새로 해야한다.

  
▲ 팔라우에 정박해있는 배를 넘나들며 전도사역을 하는 모습. 배를 넘어 다니다가 바닷물에 빠진 일도 있지만 영혼구원 사역은 늘 감사가 넘친다.
선교사역이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새로 밭을 일구어 복음의 씨를 뿌리고 가꾸어 열매맺게 하는 것이니만큼, 힘든 것은 어느 선교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처럼 이동이 많은 곳에서 쉴 새 없이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는 오래된 신자들이 돌아가고 교회는 비어갈 테니, 이런 조건들이 우리부부를 늘 전도 현장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고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한다.

오랫동안 믿어온 제자들에게 전도훈련을 시켜 매주 전도 사역에 투입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섬길 때는 교회학교 교사로, 교육전도사로 있을 때부터 노방 전도나 가가호호 방문 전도 또는 길거리 공연 전도 등을 통해 전도훈련이 잘 되어있지만, 이 곳에서 전도 사역을 하는 날은 늘 기도로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돌발적인 사고가 있을 수 있고 핍박을 받아 울고 돌아오는 교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를 마치고 평가회를 통해 서로가 받은 은혜를 나눌 때 복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영혼 구원에 대한 더 많은 책임감을 갖는 좋은 동기가 되었다.
우리가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식당을 운영하는 한국 집사님들께서 일행에게 식사 대접을 해주시기도 했다.

전도 대상자들은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 식당, 건설회사, 또는 농장, 가라오케, 안마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다. 전도를 하다 겪은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한번은 부두에 정박해있는 수십 척의 배를 이 배에서 저 배로 아슬아슬하게 건너다니면서 전도하다가 바닷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선원들이 건져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물속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우리는 선원들에게 재미있는 구경꺼리가 되기도 했다. 때로는 어려움에 처한 배들도 만났다. 13척의 배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몇가지 문제 때문에 여러달 동안 팔라우 정부에서 묶어둔 적이 있다. 돈과 식량도 떨어지고 세금도 못내서 오갈수도 없는 상황에서 여러 날을 굶어야 했던 딱한 처지를 보고 교회에서 도와준 경우도 있었다.

전도하다가 특이한 어선을 만나기도 했다. 배 꼭대기에 빨간 십자가가 높이 달려있어 가보니 선장을 비롯한 모든 선원들이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이름하여 이 배는 '기독교배'라고 했다. 그 후 그들은 이곳에 교회가 있는 것을 알고 무척 기뻐했으며 항구에 정박할 때는 모든 선원들이 교회에 나왔다. 또한 이들을 통해 더 많은 선원들과 간부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안마원, 가라오케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들은 대부분 고국에서 사기를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이 곳까지 와서 울며 겨자먹기로 일을 한다. 그 중에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변화되어서 죄악된 삶을 버리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꽤 있었다.

이렇게 전도의 열매는 하나 둘 영글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제가 생겼다. 팔라우의 두개의 큰 섬을 연결하는 'K-B' 다리가 1996년 9월 26일 끊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팔라우는 혼란에 빠졌다. 이 다리를 통해 저수지가 있는 아이라이에서 대부분의 인구가 살고 있는 코롤로 공급되는 식수가 끊어지니 팔라우는 단수와 단전으로 암흑같은 생활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전기는 15일 만에 복구가 됐지만 식수는 괌에서 계속 배로 실어다 공급했으니 상점마다 물과 초 건전지 비상식량 등이 동이 났다. 더운 날씨에 전기와 물이 없으니 매우 힘들었다. 그렇게 다리가 끊어지는 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하는 사건이 있었다.







'믿지 않았던 한 가정이 변화되었다'

[ 땅끝에서온편지 ] < 5 > 전도를 통해 부어주시는 은혜 팔라우 이홍원선교사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9월 06일(월) 19:11
팔라우의 젖줄 역할을 하고 있는 'K-B'다리가 무너지던 날, 그날도 목요 성경공부를 위해 코롤에서 사람들을 태우고 교회가 있는 아이라이로 향해오고 있었다. 거의 다리에 가까이 왔을 때 굉장히 큰 폭음과 함께 다리가 무너졌다. 갑자기 앞에 가던 차들이 정차 하더니 조금 후엔 경찰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러 대의 차들이 추락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30초 정도만 더 일찍왔으면 버스에 가득 타고있던 우리 교우들과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온 몸이 오싹해지는 기억이다. 그 날이 마침 40번째 내 생일이라 더없는 감사와 감격이 느껴졌다. 하나님이 잊을 수 없는 생일 선물을 우리교회와 나에게 주신 것이다.

다리가 붕괴되어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러 가는 일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새 다리가 놓여질 때까지 수년 동안 시내에 있는 원주민 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려야했고, 매번 예배용 장비와 도시락을 준비해 날라야했다. 그러나 교회는 더 부흥이 되고 어려움 가운데 받은 은혜가 더 많았다. 전도에 대한 부분을 더 나누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용기를 내 전도하면 정말 준비된 영혼을 붙여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천 루시자매 가족의 모습.
한번은 아내가 호텔에서 일하고 있는 여종업원들에게 전도를 하고 있는데, 옷차림이 종업원 같지 않은 한 자매가 와서 경청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따로 호텔 식당에서 그 자매만 데리고 단독으로 복음을 더 나누었다. 그 자매는 복음을 들으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아내는 그 가련한 자매를 얼싸안고 기도를 해주었다. 그 후 자매는 열심히 교회를 나와 받은 은혜를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알고보니 아이라이뷰 호텔의 사장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대만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호텔을 맡아 경영하는 중 원주민과 법적인 소송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한다. 부모님들의 오랫동안 별거생활로 인해 따뜻한 가정도 없고 인생의 회의를 느끼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수년 동안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이 생겼는데, 늘 가슴을 단도로 찌르는 통증때문에 고생해 왔다고 얘기했다.

아내와 함께 기도할 때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기도를 마친 후 눈물을 닦기 위해 가는 몇 초 동안에 통증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자매는 이 곳에서 수년 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이 자랐고, 후에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동생에게 호텔을 맡긴 후 일본에 유학을 가 치매 환자들을 돌보며 식사 봉사 등을 하며 섬김을 실천했고 이러한 일을 우리와 서신으로 교환했다.  섬기면서 얼마나 보람있어 하며 기뻐하는지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자란 그녀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에 몸이 안 좋아 대만에서 진찰을 하니 말기 자궁암으로 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았을때 대만으로 병문안을 가기도 했다. 더 중요한 것은 자매의 부모에게 "회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전도하고, 그들이 사는 4층 집에 가득 차있던 우상들을 다 치우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그 고집스러운 부모들은 딸이 낳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어렵게 오십여 년을 섬기던 그 우상들을 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그런 후 기적같이 딸이 낳았다. 자매는 나중에 우리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기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재발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성전건축이 한창인 어느 날 호텔 직원이 자매가 유언을 했다며, 비행기 표 두 장을 가지고 와서 장례식에 꼭 참석해달라고 전했다. 장례식에 도착하니 그 부모와 친척들이 둘러싸고 우리부부를 원망했다.  그녀 엄마가 "자기 딸을 예수 믿게 하고 목사 선생이 하라는대로 오랫동안 섬기던 우상들을 다 처리해서 자기가 믿던 신이 화가 나 딸을 데려갔다"고 우리를 죽일듯이 대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의 전적인 큰 사랑의 위로와 간섭하심으로 지금은 온가족이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 되었고 부모도 화해를 했다. 그리고 일가친척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고 아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한다며 자매의 부모들이 간증을 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를 욕했던 것에 대한 사과도 잊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 그래서 언제든지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식지 않기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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