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피지 박영주선교사

최고관리자 0 1,404 2020.06.21 20:48

치마입고 시작한 선교사 생활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6월 03일(월) 13:31
  

선교지에 도착했던 1995년 6월, 필자의 두 아이는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초ㆍ중ㆍ고가 함께 있는 현지인 학교에 전학 수속을 하고 두 아들이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교복을 입고 나섰다. 둘 다 짧은 치마를 입고 샌들을 신었다. 어색해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아이들을 격려해서 보내고 뒤에서 우리 부부는 조용히 웃었다.
 
피지에서는 남자들이 정장으로 스커트형 치마인 '슬루'를 입는다. 본래 원주민들이 나뭇잎이나 줄기로 만들어 입던 앞가리개를 서양인들이 천을 들여와 남자들이 정장 또는 평상복으로 입게 된 옷이 '슬루'이다. 필자도 평상시 주로 '슬루'를 입는다. 처음에는 숙달이 안 되어 의자에 앉을 때 무의식중에 다리를 벌리거나 책상다리를 하다가 아내에게 주의를 받기가 일쑤였다. '슬루'를 입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바람이 불거나 뛰어 갈 때는 앞자락을 붙들고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일 년 내내 여름만 있는 피지에서 남자도 짧은 치마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은 내게는 큰 특권이었다.
 
서양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선교지 중국에 도착해서 중국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피부를 동양인처럼 바꿔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큰 키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필자는 피지인들처럼 피부색을 바꾸고 곱슬머리는 만들 수 없지만, 의복만은 그들의 풍습을 따르며 그들과 접촉점을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현지화 시도는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선교역사는 오히려 당시의 19세기 선교를 식민지주의 선교이며 패권주의 선교였다고 비판을 한다. 그래서 21세기 서구 선교는 토착화 및 상황화 선교를 말하며 현지 문화는 저급한 문화가 아니라 다만 다른 문화일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인 선교사가 가장 패권주의적 선교를 하고 있다고 비판을 받는다. 필자와 가장 가까운 현지인 동역자요 피지 기독교계 원로인 마이카(Maika) 장로는 한 인터뷰에서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현지 문화의 이해"라고 하면서 "돈과 학벌 등을 앞세워 현지 문화를 무시하는 선교사를 현지인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선교사가 생각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현지인이 바라는 선교사에 대한 겸손한 경청이 필요하다. 선교사가 본국에서 "저는 선교지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라고 하면 대단한 헌신과 결단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선교지는 선교지에 뼈를 묻는 선교사를 원하지 않는다. 현지인들의 입장에서는 현지인을 존중하지 않는 선교사는 나쁜 선교사이며, 병든 선교사는 불필요하고, 현지에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되면 (그들의 입장에서) 지체 없이 떠나주는 선교사가 좋은 선교사이다. 현지인들은 선교사에게 무조건 감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선교사의 생각은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필자가 선교사로 파송될 당시 총회 위탁 선교훈련을 맡았던 이광순 교수는 선교사 파송예배 때 선교사들에게 늘 "선교지에서 사역을 잘 하려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살아만 내라"고 당부 하셨다.
 
아프지도 말고, 어떤 이유로든 도중하차 하지 말고, 선교지에 살아남아 있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그 당시 큰 위로가 됐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특히 현지인들에게 나는 좋은 선교사로서 잘 살아내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본교단 파송 피지 박영주 선교사







하나님께 직접 배우는 현장 선교학교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6월 10일(월) 11:30

기쁨을 돕는 선교사

  
▲ 남태평양선교훈련학교 졸업식(1997년도) 직후 졸업생들과 스탭

필자가 선교사 초임 시절에 현지인 사역자들과 첫 번째 갈등을 경험했다. 필자의 초기 사역은 피지와 남태평양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지도자 훈련이었다. 3년제의 '남태평양선교훈련학교'는 전인교육을 강조하여 학생들을 전원 기숙사에 입사하게 했고, 지식 주입이나 학위 중심이 아니라 현장 중심의 실제적인 사역 훈련을 강조하며 2년 간의 합숙생활을 통해 집중교육(제자훈련과 전도, 신학과 선교학)과 1년 간의 인턴쉽 제도를 뒀다.
 
일과는 새벽 5시에 새벽기도를 시작으로 개인경건의 시간, 아침 청소 후 시작된 오전 수럽은 오후 1시까지 이어졌고, 오후에는 학내에서 잔디 깎기, 밭 일구기, 건물 수리 등의 노동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매일 기도회와 자율 학습을 하고 10시에 취침했다. 초창기 사역자는 네 가정의 전임 사역자와 선교사 중심의 외부 강사들로 구성됐었다. 사역자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에 모여 학교생활 전반에 걸친 크고 작은 문제들을 의논하는 회의를 했고 목요일 새벽에는 사역자 기도회를 별도로 가졌다.
 
현지인 교장은 대외적인 일의 책임을 맡고, 교감으로서 필자는 대내적인 총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하루 일과표가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 내내 더운 피지에서 그런대로 시원한 오전에 수업을 더 많이 해야 되는데 오전 10시에 식당에 모여 교제하며 티타임을 30분씩 갖고 있었고, 이야기 하다보면 정해진 30분을 초과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역자 회의에서 필자는 티타임을 없애고 10분간 휴식만 하자고 했더니 모두가 강력히 반대했다. 티타임은 현지 문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피지의 티타임은 고유의 관습이라기보다는 영국 지배 하에서 전이된 문화였다. 아무튼 그 당시 필자는 그 문제로 일주일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필자가 강경하게 밀어붙이면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에 혼자 고민을 했다.
 
당시 아침 QT 시간에 주님이 말씀(고후1:24)을 주셨다. "선교사인 너는 현지인을 주관하는 자로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왔다."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님께 항복했다. 현지인 복장을 한 필자는 외양은 겸손한 선교사였으나 내적 태도는 여전히 패권주의적 자세를 가진 교만한 선교사임을 주님은 일깨워 주셨다. 선교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나는 다만 그분의 조력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선교사역 과정에서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먼저 찾는 일은 쉽지 않다. 필자는 '하나님의 선교'를 현장에서 실수를 통해 몸으로 배워 나갔다. '하나님의 선교' 신학은 선교 활동의 의미가 인간(교회)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개념의 전환을 가져왔고,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선교를 두신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교를 수행하기 위한 단지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선교'는 후에 일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그 의미가 변화되어 선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장은 선교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되어 버렸고, 전도와 선교를 약화시켜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하나님 주도적인 사역이며 교회와 선교사는 다만 조력자로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놓칠 때 많은 문제들이 야기된다고 본다.

본교단 파송 피지 박영주 선교사










추수하는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6월 13일(목) 14:10

필자가 거둔 선교의 첫 열매요 우리 선교훈련학교 최초의 선교사인 나다 세루(Naca Seru)는 피지인으로서 솔로몬 제도로 파송된 우리 학교 졸업생이다. 졸업 후 1년 동안 솔로몬에서 인턴십을 하고 돌아와 공식 선교사로 파송되는 예배에서 했던 그의 고백을 잊을 수가 없다. "저는 여러 선교사 교수님들의 피땀 어린 수고의 열매입니다. 저도 선교사님들의 발자취를 따라 주의 복음을 위해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선교 사역이 얼마나 힘든 사역인지 지난 1년 간 맛보았기에 죽으면 죽으리라 고백하며 선교지로 갑니다. 그래서 저의 선교사 파송식이 마치 저의 장례식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큰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제가 너무 약하다는 것도 잘 알지만 하나님은 저를 통해 뭔가를 하시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때 필자는 선교사로서 열매를 보면서 선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실감하며 한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었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23세의 청년으로 남태평양선교훈련원 학생이었다. 학업 성적은 중간 정도였지만 오후 공동 작업할 때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동료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는 분위기 메이커였고 피지 민속 춤 솜씨가 뛰어나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 예배가 끝나고 짝을 지어 기도하는 시간에 나는 그를 지명해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기도하기 전에 잠깐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는 중에 내가 물었다. “이 학교에 들어온 동기가 무엇이며 졸업하고 너의 비전은 무엇이냐?" 그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마약 딜러로 목표 없이 방황하는 인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 교회학교 교사까지 하고 있는데 성경지식이 너무 부족함을 느끼던 중 마침 우리 학교 소개를 받아 입학했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 주님께 쓰임 받는 좋은 교회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 마치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나기 전 갈릴리만 알다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과 잃은 영혼들에 대한 열정으로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선교사가 되었고, 이제는 선교사 16년차로 솔로몬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중견 선교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사실 세루 선교사가 선교지로 파송되던 해인 1998년에 솔로몬에는 내전이 일어나 2003년까지 계속되었다. 폭력과 총성이 그치지 않은 그 나라에서 위험한 순간들을 여러 번 넘기면서도 중도 포기하지 않고 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반란군의 혐의를 받아 계엄군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반군은 말라이타 섬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세루가 신앙적으로 양육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 섬 출신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은혜로 조사 경찰관들 중에 세루를 선교사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고 했다. 세루는 초기 교통수단이 열악한 내륙 깊숙한 산간마을을 몇 달씩 걷고 걸으며 복음을 전했고, 불우 청소년 사역, 교도소 선교와 출소자들의 갱생을 돕는 사역을 하였고, 지금은 솔로몬 내전 후유증으로 인한 심각한 부족 갈등을 치유하는 중재와 화해 사역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축구(풋살) 국가대표팀을 맡아 스포츠 선교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세루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매년 솔로몬국에서 우리 남태평양 선교 훈련학교로 유학을 오는 청년들이 많다. 한 알의 밀알을 백배로 결실케 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

본교단 파송 피지 박영주 선교사








이웃집 이방인 선교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7월 01일(월) 13:23
피지는 토착민 외에 130여 년 전부터 사탕수수 노동자로 집단 이주해 온 인도-피지인들이 전 인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의 80% 정도는 힌두교도들이고 그 나머지는 이슬람교도들이며 소수의 시크교가 있다. 기독교인이 다수인 토착민들에게 함께 섞여 살고 있는 인도-피지인은 이웃집 이방인이다.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던 한 인도-피지인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이 18세 되었을 때 피지 청소년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꿈을 이루었다. 힌두교 사제의 아들이며 철저한 힌두교도였던 그는 어느 기독교인을 통해 병 치유의 경험을 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많은 핍박이 뒤따랐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고모는 사원에서 자살을 했으며 누이는 악한 영에 시달렸다. 그는 힌두교 신들에 대한 의분이 끓어올라 힌두교 사원에 불을 지르고, 방화범으로 붙잡혀 4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처음에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낸 죄밖에 없는데 왜 감옥에서 생전 해보지 않은 부역을 하며 고생하게 하십니까?" 그러면서 그는 점차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술과 파티를 즐기며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지난 날을 회개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힘들었던 농장 일에서 쉬운 식당 일로 바꿔 주시며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셨다. 출소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를 섬겼다.
 
어느 날 한 호주 선교사가 그에게 신학 공부를 권유하며 후원을 약속해 줘서 아내와 다섯 살 된 딸을 데리고 필자가 운영하는 남태평양선교훈련학교에 입학했고 부부가 함께 3년 과정을 잘 마쳤다. 그들이 바로 사웨니 희망교회 담당 전도사로 6년간 사역했던 비제이(Vijai) 부부이다. 그들이 졸업할 무렵 주님은 필자에게 인도-피지인 교회 개척에 대한 부담을 주셨다. 피지 토착민과 대부분의 남태평양 섬나라들은 명목상 기독교인이 많다. 그래서 제자훈련과 지도자 훈련 선교전략이 필요하지만, 인도-피지인은 미전도 종족으로 교회 개척 선교전략이 필요하다.
 
2005년 비제이 가정을 앞세우고 인도-피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피지 남섬 서부지역에 희망교회를 개척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동네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했다. 마침 견습 선교사로 온 한국인 신학생과 인턴쉽 학생들이 함께 기거하면서 노인들 영정 사진도 찍어주고, 청소년들에게 기타도 가르쳐 주며, 어린이 미술교실도 열었다.
 
1년쯤 지난 뒤 동네 이장 집 베란다를 빌려 창립예배를 드렸다. 얼마 후 주님은 한국의 한 교회를 통해 작지만 예쁜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게 해 주셨다. 필자는 초기에 선교훈련학교에서 4시간씩 차를 타고 가서 매주일 예배를 인도하였지만, 점차 한 달에 한 번, 분기에 한 번 그리고 세례식 등 특별 행사에만 참여하고 비제이 전도사에게 모든 사역을 위임했다. 그는 주님의 은혜로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갔고 3년이 채 안되어 힌두교에서 개종한 초신자 80여 명이 모여 주일예배를 드렸고 4년 만에 자립교회로 성장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2012년 교회의 몇몇 성도들과의 갈등으로 신임을 잃었고, 성도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나갔다. 필자는 비제이 전도사에게 안식년으로 남태평양선교훈련학교에서 1년간 학위과정을 공부하며 영적, 정서적인 재충전 기회를 갖게 했다. 피지 원주민 기독교인들은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르며 종족 갈등 등의 이유로 인도인 이웃들에게 전도하지 않는다. 인도-피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어렵고, 인도-피지인 목회자를 세우는 일은 더 많은 헌신과 희생이 요구되어, 인도-피지인 선교에 선교사의 역할이 크게 요청되고 있다.
 
본교단 파송 피지 선교사 박영주 목사







아론 같은 현지인 동역자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7월 04일(목) 11:29

  
▲ 마이카와 부인 안나, 박 선교사 부부가 마이카 은퇴식 때 찍은 사진

선교사가 사역을 중단 없이 계속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들라면 지속적인 후원과 건강, 그리고 현지 체류를 위한 비자 문제일 것이다. 어떤 지역 선교사들은 일 년에도 몇 번 씩 선교지를 떠나 가족과 함께 비자여행을 해야 하는 것 때문에 무척 힘들어 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재정과 건강, 언어, 각종 은사와 능력 등 모든 것이 잘 준비되었음에도 비자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다가 중도 포기하고 선교지를 바꾸거나 철수하는 사례도 종종 보고 듣는다. 비자 문제는 이슬람권이나 공산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피지의 경우는 공식적으로 선교사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정식 비자를 받으려면 매우 까다로운 조건과 절차가 필요하다. 사업 비자의 경우 상당한 투자금을 들여와야 하고 현지인 파트너가 꼭 있어야 하며, 선교사의 경우도 선교비의 확실한 후원 보증과 현지 기관(교단)이나 파트너의 초청장, 선교 사역 등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비자 문제는 결국 현지인 파트너 곧 현지인 동역자 관계와 직결되어 있다. 피지에서 감리교 교단 소속 선교사의 비자 문제는 어렵지 않지만 현지 교단의 배경이 없는 장로교의 경우는 쉽지 않다. 피지 기독교의 시작은 1830년대이며 당시 범 교단 선교 연합기구는 태평양 선교 구역을 교단별로 안배하는 '신사협정'을 맺고 피지는 감리교가 맡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피지 기독교인의 약 90%는 감리교도들이다. 필자의 현지인 비자 파트너이며 사역 동역자는 피지 형제교회 소속이며 교계 원로인 마이카(Maika) 장로였다. 본래 한 텀만 선교하고 돌아오려고 했던 필자가 장기 선교사로 지금까지 지내온 데는 현지 동역자 마이카 장로의 협력이 적지 않았다. 그는 피지 교도소 사역, 성서공회 사역 등을 하였으며, 호주에서 원주민 선교도 했다. 필자가 보는 그는 자기 백성을 깨우는 일에 열성적인 자존심 강한 애국자였고, 필자와 20여 년을 함께 동역하는 동안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인격자였다. 또 누구와 대화하든지 그 끝에는 격려하고 기도해 주었고, 피지 국내 이슈뿐 아니라 세계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홍수, 지진, 전쟁 등 사건 사고를 접하면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피지의 많은 파트너들은 기부나 후원 등을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하나 그는 늘 기도제목을 나누는 데 그쳤다. 그는 필자보다 15년쯤 연상이었지만 늘 친구처럼 교제하였고, 크고 작은 일들을 늘 의논하며 필자를 잘 섬겨 주었고, 때로는 영적인 멘토가 되어 주기도 하였다.
 
선물이든 후원이든 외국인 선교사는 늘 주는 입장이고 현지인 동역자는 늘 받는 것이 상례인데 그는 필자의 아내가 몸이 아플때 스프를 끓여 오고, 자기 자녀들 일로 해외에 나갔다 오면 선물을 사들고 오는 보기 드믄 현지인 동역자였다. 그는 지금 은퇴하였지만 필자는 아론 같은 좋은 현지인 동역자를 주신 주님께 늘 감사했다. 피지에 온 선교사 중에 현지인 파트너와 불화로 갑자기 강제 출국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들은 재정 후원이나 언어 등에 잘 준비된 선교사들이었는데 현지인 동역자와 인간관계 실패로 이민국에서 2주일 안에 출국하라는 통고를 받고 가재도구와 사용하던 자동차도 정리하지 못하고 다른 동료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떠날 수밖에 없었다. 초임 선교사들은 종종 비자 문제와 현지인 동역자 관계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것들은 계속적인 선교의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다.

본교단 파송 피지 박영주 선교사







현지인 선교와 한인 디아스포라 사역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7월 11일(목) 10:01

어느 날 한 교민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담임 목사님이 갑자기 공석이 되어 당분간 주일 설교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 교회는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피지 남섬 동부지역에서 자동차로 4시간쯤 떨어진 서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그 집사님은 조심스럽게 부탁하였다. 당시에 필자는 인도-피지인 교회를 개척하기 전, 남태평선교훈련학교에서 현지인 사역만 하고 있던 때였고 한두 달이나 길어도 석 달 정도만 도와주면 새로운 담임 목사님을 모실수 있다고 하여 그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난디 한인교회는 우리 교단 목사님이 개척하였는데, 당시 필자가 창립예배 설교를 했었고, 본교단 한인교회가 설립된 것이 너무 감사해서 음향기기 구입을 위한 헌금까지 어려운 중에 기쁜 마음으로 했었다. 몇 년 후 그 교회 목사님은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뉴질랜드로 떠났다. 필자는 총회에 보고하고 새로운 사역자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다하여 안타깝게도 다른 교단 목사가 와서 그 교회를 맡았으나 곧 바뀌어 몇 년 내 여러 교단 목사들이 거쳐 갔다.

그 당시만 해도 작은 미자립 교민교회에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필자가 설교목사로 그 교회를 3개월쯤 섬겼을 때 그 교회 청빙위원회는 필자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마땅한 목회자를 찾을 수 없으니 담임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임시 설교 목사와 담임은 다른 문제였기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필자의 사역이 동서로 나뉘는 문제, 매주 왕복 8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체력 문제, 아내 남성숙 선교사가 수도 수바에서 토요 한글학교 교장을 맡아 부모교육도 하며 재미있게 사역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사임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었다. 망설이는 우리에게 청빙위원들의 말이 큰 감동을 줬다. "목사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현지인 사역은 계속 하실수 있습니다. 주말에만 우리를 돌봐주시면 주중은 우리가 목사님을 선교사로 파송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돕겠습니다." 한글학교 사역을 중단해야 했던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마침 남태평야선교훈련학교는 호주 선교사 두 가정이 돕고 있어서 기도하고 의논한 뒤 청빙을 수락하였다.

3년 반을 매주 절반은 동쪽에서 현지인 선교를, 나머지 절반은 서쪽에서 디아스포라 사역을 했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심방하고 공휴일이나 학교 방학 때는 집중 성경공부나 목적이 이끄는 삶 등 각종 세미나를 열었다. 피지로 유학을 온 중ㆍ고등부 학생들로 어떤 때는 학생들만 20명 넘게 모이기도 하였다. 휴식은 동서로 오고 가는 차 안에서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뿐이었다. 1년이 지날 무렵 대한항공 직항노선이 생기면서 관광업이 활기를 띠었고 교회 건축 부지를 구입하면서 교회는 성장과 부흥을 경험하며 자립교회로 든든히 세워져 나갔다.
 

한편 현지인 선교 사역 부문도 인도-피지인 비제이 전도사 부부가 졸업하자 사웨니 교회를 개척하여 서울 동원교회 후원으로 교회 건축을 하고 헌당을 하였다. 세 분야 사역의 확장은 결국 한계점에 이르렀고 필자는 현지인 선교와 디아스포라 사역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아내와 필자는 현지인 선교하는 선교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디아스포라 사역을 내려놓았다. 디아스포라 사역을 하는 동안 육신적으로는 기진했지만 영적으로는 재충전의 축복을 누렸기에 주님께 감사하였다. 선교사가 현지인 선교와 디아스포라 선교 사역을 함께 조화를 이루어 나갈수만 있다면 선교의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디아스포라들로 하여금 현지인 선교에 관심을 갖고 적극 동참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선교 이슈가 되고 있다.

본교단 파송 피지 박영주 선교사








선교사의 위기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8월 05일(월) 09:53
선교사로 피지에 도착한지 4년만에 필자는 선교 사역을 중단하고 철수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몇 달간 복통이 간헐적으로 일어나더니 빈도수가 잦아지면서 거의 한 달간을 참다가 결국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 당시 피지는 국립병원만 있었는데 시설이 열악하고 중환자는 대부분 환자 부담으로 호주나 뉴질랜드로 이송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피지에서 한국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10시간이 수일로 여겨졌다. 한국에 도착해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양쪽 신장과 요로가 많이 부어 있어 결석일 가능성이 많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결석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요로의 바깥쪽에서 요로를 압박하고 있는 무엇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원인이 암일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 단층촬영과 함께 정밀 검사를 다시 해봐야겠습니다."
 
암이라는 말에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젊은 아내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러다가 천국의 실재가 강하게 나를 압도했고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흥분이 일어났다. '이제 이 땅의 모든 수고를 끝내고 쉬게 되는구나. 주님이 나를 데려가신다면 아내와 아이들은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이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자유함이 더 컸다. 마음이 담담해지며 정말 천국에 가고 싶어져 내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정밀 검사를 받고 의사의 최종 결론이 나왔다. 암은 아니고 요로 결석인데 결석이 있는 부위가 뼈 사이에 있어 잘 보이지 않고 또 그 성분이 흔히 보이는 결석과 달라서 잡아내기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암이 아니라는 말에 긴장했던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맥이 풀렸다. 감사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마음이 교차되었다. 나는 천국문 앞에서 거절당한 선교사가 된 것이다. 아직은 주님께 받은 바 사명을 다 완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충격파쇄기 요법으로 결석을 깨는 작업이 몇 주 동안 진행되었다. 뼈를 망치로 두들기는 것 같은 고통에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담당의사가 다시 불렀다. "환자분의 왼쪽과 오른쪽 신장이 모두 너무 많이 부어 있고 결석이 어려운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충격파쇄기 요법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고, 아무래도 서둘러 수술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날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그런데 의사의 수술 집도 직전에 내시경으로 최종 확인한 결과 요로에 결석은 사라졌고 터질 듯 부어있던 신장은 부기가 많이 빠져서 수술이 필요 없게 되었다. 비신자였던 의사가 말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셨나 봅니다."
 
  
박영주 선교사 가족
할렐루야! 우리는 곧 선교 현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는데, 아내는 남편이 수술을 한다면 선교사 철수 명령인줄로 알겠다고 기도했기에, 수술을 안했으니 피지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감격으로 울먹였다. 치료가 계속되는 동안 아내가 피지에 있는 두 아이들에게 전화를 해서 학교를 휴학하고 급히 귀국하도록 조치를 취했었다. 작은 아들 경민이는 안산 동산 고등학교 1학년에 편입시켰고 큰 아들 광민이는 마침 한동대가 7월 학기 신입생 모집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서류를 갖춰 재외학생으로 원서를 접수시켰고 주님의 은혜로 합격하였다. 한국에서 이미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한 아이들만 남겨 놓고 우리 부부만 두 달 만에 다시 선교지로 돌아왔고, 경민이는 남은 학기를 마치고 다시 피지 현지학교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질병으로 인한 철수 위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녀 진학 문제를 풀어 가셨다.
 
피지 박영주 선교사






남태평양 선교의 과제와 전망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박영주 선교사
2013년 08월 09일(금) 13:43
피지, 타문화권 선교의 전진기지
 
"주변 섬나라 사람들의 피지 이주와 유학생들의 급증으로 피지는 다민족 공동체 국가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피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선교사 수는 한인목회 하는 5가정과 지역교회 파송 선교사까지 포함하여 30여 가정이 된다. 피지 선교 대상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인도-피지인 선교인데 이들의 종교는 주로 힌두교와 이슬람이다. 이들은 피지 전 인구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고 또 많은 인도인 디아스포라가 호주와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어 피지는 힌두교와 이슬람을 향한 선교 전진기지로서도 중요한 선교지이다. 둘째는, 명목주의 기독교 신앙을 가진 피지 원주민 선교이다. 성탄절과 부활주일에만 교회 출석해도 기독교인이며, 가족 중 1명이라도 기독교인이면 전 가족이 기독교인으로 간주되고, 심지어 교회가 있는 일정 범위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지역 교회 교구민으로 간주되어 복음 전도의 대상이 없거나 불분명한 상태에서 명목주의 기독교는 혼합주의 신앙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미신과 이단이 확산되고 있다. 성경과 기독교 서적이 부족한 현실은 교회 지도자가 제대로 교육 받을 기회가 부족한 문제들과 맞물려 성경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명목주의 신앙의 원인이 되고 있다. 셋째, 피지에서의 선교 대상은 오세아니아 권역 선교이다. 피지는 오세아니아 29개 작은 섬나라들 중에서 지역적, 사회 문화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남태평양의 십자로'라고도 불린다.
 
12개 섬나라들이 공동 운영으로 남태평양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대학이 피지에 위치하고 있고, 섬나라들을 오가는 많은 항공기가 피지를 경유한다. 피지 주재 한국 대사는 주변 5개국 대사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주변 섬나라 사람들의 피지 이주와 유학생들의 급증으로 피지는 다민족 공동체 국가로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남태평양선교훈련학교의 학생들과 스탭들도 보통 8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 있다. 오세아니아 권역은 대부분 모든 나라가 독립하거나 자치 정부를 가지고 있으며, 1인당 GDP가 약 미화 800~3500달러 정도이다. 적은 인구, 제한된 자원, 섬나라 간 먼 거리는 섬나라들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외국 선교단체들의 철수와 지도자들의 훈련 부족으로 인한 기독교의 약화 상황에서, 태평양 섬나라들의 선교적 과제는 지도자 훈련과 지역 교회 목회자의 계속교육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선교적 방안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학력과 영성을 겸비한 장기선교사를 선교지에 파송하는 것인데, 종족 갈등과 내전, 쿠데타로 사회의 불안정과,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 지역적으로 먼 거리로 인한 왕래의 불편함, 고물가와 높은 선교비 등 열악한 생활환경의 제한점 등으로 섬나라들의 장기선교사 파송 요청에 거의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는, 훈련기관이 있는 가까운 인접 국가로 현지 지도자들을 불러 훈련하는 방안인데, 재정적인 후원이 가능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수 있다는 제한점이 있다. 셋째는, 비거주 선교사가 섬나라들을 왕래하며 사역하는 방안인데 이를 위해서는 보다 효과적인 선교 네트웍 구성이 전제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는, 선교 현지의 인력들을 훈련하여 적극적으로 선교에 동참시키는 방안이다. 복잡한 현대는 선교국과 피선교국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도 없다. 토착인 선교사를 훈련하여 역파송 하거나 나라를 바꾸어 교차 파송하는 선교 전략도 매우 효과적인 사역일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피지인 선교사 세루를 솔로몬에 파송하여 협력 체계 형성을 시도하였으며, 솔로몬 출신 조아쉬 선교사를 피지에서 훈련시킨 뒤 바누아투 장로교 총회와 협력하여 바누아투 선교사로 교차 파송하였는데 그 효과가 매우 커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다만 재정적 후원 연결이 어려워 선교적 관심이 요청된다. 피지와 남태평양 지역 선교의 현실을 소개한 이 연재를 통해 피지와 남태평양 선교에 계속적인 관심이 있기를 기도한다.
 
박영주 목사/총회 파송 피지 선교사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