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편지

멕시코 장덕인선교사

최고관리자 0 907 2020.06.21 20:40

농민 주도 '사바티스의 난'으로 막힌 선교의 문

[ 땅끝에서온편지 ]

장덕인 선교사
2013년 03월 22일(금) 13:38
원주민 인디오들과의 만남
 
머나먼 낯선 땅, 언어와 문화, 풍습과 기후등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삶과 사역을 20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지나온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 안에서 하나하나 아름다운 추억이 됨을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 일들을 글로써 표현하고자 하니 그리 쉽지는 않다.
 
어느덧 세월이 흘려 멕시코에 온지 20년이 되었다고 기독공보로 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는 조금이나마 멕시코 선교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멕시코는 인구 1억2천만명, 종교는 95%가 카톨릭이다. 그래도 20년 전보다는 개신교가 많이 부흥되고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1993년도 7월, 어린 두 자녀를 고국의 부모님께 맡겨둔채 우리 부부는 단순한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각각 여행가방 하나씩만 들고, 인구 2천만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인 멕시코 시티에 도착했다. 무비자 협정 전이었으므로 아이들과 함께 오면 입국이 거절될 수도 있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한 에피소드로 선교를 위해서는 자녀들과의 잠시 헤어짐도 불사하다는 각오로 4살, 5살의 어린 자녀들과 생이별을 하고 선교지로 향했다. 바울의 선교열정과도 같이 오직 선교가 먼저라는 마음으로 선교지에 첫 발을 디뎠다.
 
시티에 교민은 천명 정도였으며 한인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각 하나씩 있었다. 체류기간이 1년인 비자 발급을 받기 위해 잠시 시티에 머물면서 앞으로 사역할 선교지인 치아파스주 오코싱코에 여러차례 다녀왔다. 그곳은 멕시코 남부지역에 위치, 과테말라 국경과 인접한 곳으로 원주민 인디오들이 많은 지역이다. 멕시코에서 가장 숲과 정글이 우거진 고온다습한 곳이다. 정착 물품을 갔다놓고 현지사정을 살피며 현지인 가스팔 목사와도 만나던 와중에 세계적으로 큰 뉴스가 됐던 사건이 터졌다. 바로 1994년 1월1일 산크리스토발시에서 농민들이 시청을 장악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농민반란인 사파티스의 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곳은 선교지에서 불과 차로 2시간 거리였다. 자기들의 땅을 돌려달라는 반란이었는데, 백인계 지주들의 명의로 된 땅 문서가 보관되어 있는 구청의 컴퓨터와 토지대장들을 불태우고 시청과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무장한 인디오들이 정부군과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다.
 
사태가 조금 완화되자 1월 17일 현지에서 동역할 가스팔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동안 주 전체가 바깥 세상과 단절이 되어 전기와 교통, 물 등 모든 것이 끊어졌고 심지어는 식수도 구하기 어렵고 식량마저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고 그곳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저는 통역해 주는 집사와 당시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 한명과 시티에서 차동차로 20시간 달려 내려갔다. 지니고 있던 선교비로 콩과 식용유, 물 등을 구입해 트럭에 싣고 무작정 달려가 보니 수 많은 바리게이트와 군인들의 상엄한 경비를 하고 있어 통과를 위해 어렵게 내란 지역의 구청장 허락을 받은 뒤 선교지의 목사에게 구호물품을 전달하고 돌아오자 소문을 들은 대사관에서 이 시점에 거기가 어디라고 다녀왔냐고 했다. 대사관에서는 "앞으로 장 선교사님은 선교지도 바꾸셔야 한다. 이 내란은 멕시코 특정상 장기화 가능성이 있고,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지역에 파송을 받았어도 거기는 안되니 필히 선교지를 바꿔야 하며 필요하면 세계선교부나 파송교회에 대사관 이름으로 선교지 변경 공문을 보내 주겠다"고 공사까지 나서서 말했다. 현지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선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해 5월 후원교회의 명령으로 철수하게 됐다.<계속>
 
멕시코 장덕인 선교사



한인교회 개척, 중미선교에 큰 바람 계기

[ 땅끝에서온편지 ]

장덕인 선교사
2013년 03월 28일(목) 14:56
선교지의 내란 문제와 선교지 철수 등이 겹쳐서 분주한 와중에 선교지에 방문할 때마다 갔다 놓았던 이민 가방 7개 분량의 짐을 다 농민반란군 사파티스에게 빼앗겼고 그후 10개월 정도 뒤에 한국어 책만 가스팔 목사님을 통해서 전달 받았다.
 
우리가 준비하며 기도하고 가려고 했던 선교지는 가지 못했지만, 가난하고 억울한 과부와도 같이 손에 스페인어와 영어 사전을 들고 날마다 이민국에 부부가 출근해 통하지 않는 언어로 어렵고 힘들게 체류비자를 받고 고국으로 철수했다. 파송교회에서는 당회의 선교지 철수는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분위기로 인하여 현지사정은 고려하지도 않고, 철수한지 한달도 채 안되어 다시 무조건 그 지역으로 가라는 당회의 지시가 있었다. 현지의 사정과 대사관의 입장을 잘아는 저로서는 멕시코의 다른 지역으로 갈수 있으나 내란 지역은 외국인 학자들과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당시 뿐 아니라 그후로도 수년 간 내란은 지속됐다. 그리하여 파송교회와 협정과 이해관계가 깊어지므로 부득불 사임 하게됐다. 1993년 파송 당시 모든 생활비품을 정리하고 멕시코로 갔으므로 숟가락 하나 없는 상황이라 가족들과 광성기도원에 들어갔다. 한 달 여 동안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바라며 묵묵히 기도하며 생활하고 있을 때에, 40년을 목회하시다 은퇴하신 아버님께서 "고국에 있지말고 다시 선교사로 가거라.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약속한 선교사명을 최소한 3년은 해야 되지 않겠냐"(당시 총회 파송선교사는 3년이 한 텀으로 규정되어 있었다)고 말씀하셔서 이를 마음에 새기며 기도하던 중 마침 부천 지역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는 동기 목사님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전후 사정을 들은 동기 목사들이 어려운 중에도 선교에 뜨거운 열정으로 각 교회에서 조금씩 모아 우리 가족 비행기 값을 해 주었다. 결국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서약한 3년 간의 선교사 약속을 지키기 위해 총회의 재파송을 받아 철수 3개월 만인 그해 여름, 다시 멕시코로 갔다. 그 때 동기 목사들의 힘으로 멕시코 선교 초창기 기틀이 세워진 것이다. 첫 번 파송교회와의 아픔이 있었기에 다시는 힘이 없어서 고통당하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짧은 기간의 경험으로 선교의 장을 생각할 때 후원만을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자립선교를 하기위해 한인교회 개척을 해야겠다고 결단 했다. 멕시코 시티에 있는 동안 한인교회 출석을 할 때 한인들은 열심히 살며 선교에도 관심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우리 한인들을 거점으로 한인교회를 세워 그들의 믿음과 선교의 열정으로 멕시코 선교를 하면 좋을것 같았다.
 
1994년 8월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에 와서 지금까지 한 곳에서 묵묵히 감사함으로 사역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당시 이곳은 한인교회가 없었고 교민은 어린이를 포함해 1백명 미만이었다. 도착한 다음날 집을 구하고 3일 만에 집에서 개척예배를 드린 후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한인 목회와 현지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과달라하라는 인구 5백만명으로 현재 교민은 약 5백명이지만 한인교회가 3곳이나 더 있다.
 
이 먼 멕시코 선교를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 하나님께 가장 감사한 일은 이 작은 한인 사회에서 저희 교회를 통해 세례받은 사람이 1백60명(멕시칸은 약 20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천하보다도 귀한 영혼들이 멕시코에 와서 교회를 찾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와 같이 한인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저를 보내주신 파송교회와 멕시코 선교를 위해 오늘까지 후원해주시고 가장 큰 힘인 기도의 능력이라 믿으며 이 지면을 통해 다 말씀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고개숙여 감사를 드린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이제 제2의 도약을 했다. 2013년에 과달라하라 한인교회에서 멕시코 명성교회로 교회명을 바꿨다. 다시 한번 개척하는 마음으로, 또한 중미지역에 선교의 힘을 불어넣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장덕인 선교사(멕시코)


한인교회 활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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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인 선교사
2013년 04월 04일(목) 10:43
세계선교의 새로운 성장 동력
 
얼마 전 총회 세계선교부로 부터 '사랑하고 존경하는 PCKWM 선교사님들께'라고 보낸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을 인용한다.
 
"타문화권이나 에큐메니칼 선교사로 나가 계시는 선교사님들 중 아직 주일에 전임 사역을 하지 않으시는 분들은 같은 도시에 있는 우리 교단 선교사가 사역하는 한인 교회 담임 교역자와 협의해 주시길 바라고, 여성 선교사들 중 주일에 교회학교를 맡아 교사로 섬겨 주셔서 그 지역의 교단 한인 교회가 성장하는데 협력해 주시길 부탁 드렸는데, 이번에는 한인 교회를 하시는 분들이 그 도시의 우리 식구들을 초대해 모여서 먼저 협력해 주시길 부탁 드리는 모습이 좋을 듯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을 초월해 한인교회 활성화에 합력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현재 한인교회의 성장은 세계선교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므로 우리 모두가 함께 협력하고 이루어야 할 중요한 과제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총회도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선교정책을 모색하고 있음으로 보고 반가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다. 20여 년 간 선교 사역을 하면서 늘 안타까웠던 점은 해외선교를 바라보는 본교단의 편협된 선교 정책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문화권 선교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세계선교부 총무가 바뀌면서 정책의 일환으로 한인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있다. 필자가 멕시코에 와서 크게 내세울 만한 일은 못하였으나 10여 년 전부터 멕시코로 오신 우리 교단 선교사들께 한인교회 개척을 권면해 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멕시코로 파송받은 본교단 선교사 8명 중 5명이 각각 다른 대도시에서 한인교회 개척과 현지인 사역을, 나머지 3명은 현지인 사역만을 하고 있다.
 
한인교회 개척은 가장 감사하고 보람된 사역 중 하나이다. 수 년전까지는 한인교회를 개척하고 한인목회 사역을 외면하든지 관심 밖에 있었다. 디아스포라 선교의 중요성과 한인목회를 모티브로 현지인 선교의 중요성 및 그 파급효과를 총회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시기였기에 타문화권 선교, 즉 '현지인 선교만이 진정한 선교다'라는 선교정책이 주를 이룰 때였다.(한인목회자는 선교사가 아니라는 말이 교단적으로 나돌던 때도 있어서 총회적으로는 한동안 한인목회자의 입지가 조금은 불편했다.)
 
과달라하라 한인교회를 개척해 시무하면서 그 힘으로 현지인 선교사역을 점차 감당하고 있을 때 멕시코 중부지역에서는 필자가 사역하는 과달라하라 다음으로 큰 도시 레온에 우리 교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레온시는 사역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3백 킬로미터 떨어진 도시로 인구 2백만명의 대도시다.
 
한국의 IMF로 국내 경기가 어려워지자 해외 진출을 꾀하던 한국의 신발업체들이 멕시코의 배곱이며 산업도시인 레온으로 2000년도부터 진출했다. 당시 미국과 멕시코, 카나다의 나프타(NAFTA)가 진행되면서 넓은 시장 개척을 위해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해 상주 인구가 1백50명 정도 됐다. 매주 4~5명의 성도들이 3백여 킬로미터 거리를 이동해 본교회 주일 예배를 출석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1~2 개월에 한 번씩 필자가 내려가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복음화를 위해서는 한인교회 개척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하며, 선교지를 정하지 못한 본교단 파송 선교사 몇 분에게 제안을 했으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은혜로 LA에 있는 다우니영락교회(당시, 황천영 목사 시무)에서 목사님 한분을 파송받아 2000년10월 7일 과나후아또 한인교회(현재, 레온한인교회로 본 교단 김창하 목사 시무)를 창립하게 됐다. 주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개척된 레온한인교회는 오늘날까지 교민들의 영혼 구원과 현지인 선교를 위해 힘쓰고 있음에 감사 드린다.
 
본교단 파송 멕시코 선교사 장덕인 목사


심신이 지친 영혼들의 목마름을 채우는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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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인 선교사
2013년 04월 11일(목) 11:05
멕시코 제3의 도시 몬테레이에 몬테레이 한인교회를 개척했던 이야기도 전한다. 몬테레이는 북부지역으로 필자의 사역지에서 동북쪽으로 8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본 교회 성도 두 가정이 사업차 그곳으로 이사한 것을 계기로 몬테레이에 관심을 갖고 한인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하고 있었다.
 
때마침 콤롬비아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가 귀국한 최창운 선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멕시코로 오고 싶다는 것이다. "그럼 총회 세계선교부의 재파송을 받고 빨리 들어오세요. 이민 교회는 먼저 개척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속히 오세요. 개척 후보지 몬테레이에 한인교회개척을 준비해 놓겠소." 그리하여 최 선교사 가족이 급히 멕시코로 파송받아 왔다.
 
최창운 선교사는 필자의 집에 한주 간 머무르며 한인교회 개척 후보지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필자가 섬기는 과달라하라 한인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후 몬테레이로 이동해 2001년 8월 몬테레이 한인교회가 개척됐다. 몬테레이 한인교회 개척예배를 드릴 무렵부터 그곳에 LG 냉장고 공장이 세워지면서 협력 업체들이 많아지고 아울러 한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개척과 함께 교회는 꾸준한 성장했고 지금은 아주 훌륭한 교회(현재 본교단 이상용목사 시무)가 되어 한인 영혼 구원은 물론이고 그 역량으로 현지인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필자의 교회를 비롯해 한인은 있으나 한인교회가 없어 영혼의 목마름에 있던 지역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시고 한 영혼씩 주님께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자기 동족을 위해서 회당에 모였고 교회를 개척했다. 우리 민족도 아프리카 남미 중미...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장사 사업 운동 등 각종 일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서 말씀에 목말라 하며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는 분들이 있고, 더러는 언어와 문화 인종 정치 등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척박한 이민자의 삶과 정처없는 나그네 생활로 심신이 지쳐 수 많은 영혼들이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음이 디아스포라의 현실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정착하며 살아가는 동족을 위해 잘 통하는 언어로 한인 교회를 개척해 먼저는 죽어가는 한인영혼들을 구원하고 그 힘과 재능을 살려 그 지역에 맞은 선교 프로젝트를 가지고 선교현장을 살려가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모두가 한인교회만을 하라는 뜻은 아니다. 현지어에 능통한 사람은 처음부터 현지인 선교를 시작할 수도 있고 비록 현지어를 잘 못하지만 배우고 익혀서 꼭 현지인 선교만을 해야겠다는 선교사에게는 언어 연수 지원 등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인내하며 후원해 현지인 선교를 잘할수 있도록 상호 신뢰하는 관계가 조속히 이루어지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타문화권 선교가 진정한 선교다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교사역을 하되 때로는 그 지역 상황과 여건에 걸맞게 자율적인 선택을 할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신다면 보다 효율적인 선교가 되리라 믿는다.
 
본교단 파송 멕시코 선교사 장덕인


주여! 주여!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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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인 선교사
2013년 04월 17일(수) 09:22

  
▲ 장덕인 선교사는 한국교회가 선교지와 선교사들을 위한 '주여'의 외침으로 오늘날까지 잘 지내고 있음을 감사한다고 전했다.

"한국 교회여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주여 삼창, 아멘 삼창, 할렐루야 삼창"
 
구원 받은 성도, 천국 백성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외치고 불러야 할 '삼창'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응원할 때 "대~~~~한민국"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언제든지 자연스럽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나오고 부르짖고 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선교지에서 '주여 삼창'으로 교통사고에서 안전하게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000년도, 레온교회를 개척할 때 엘레이에서 오신 선배 이순정 목사와 함께 개척 후보지 탐방차 가면서 마침 연말이라 한인들에게 교회 달력을 전달하고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고속도로에서 실수로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도로변에 있던 고장차를 수리하기 위해 왔던 차가 돌아가기 위해 도로로 천천히 나오는 것을 미처 발견하질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시속 140㎞로 주행 중이었고 서쪽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저녁 노을을 받아 시야가 정확하지 않았다.
 
멕시코는 고속도로 통행료가 비싸기 때문에 고속도로에 함께 주행하는 차들이 거의 없다. 당시만 해도 구간에 따라서는 수 십분을 독주하는 것이 예사였다. 또한 경찰은 물론 속도 제한도 없어서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속도를 내며 달리던 때였다. 요즘엔 차량이 많아져서 개인의 안전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그때에는 고속도로에 들어서면 누구든 속도 제한이 없는 도로를 맘껏 달렸다. 그날 우린 도착하면 뭘 먹을까 의논하며 멀리 보이는 과달라하라시를 바라보다가 눈을 돌린 순간 약 50m 앞의 차를 발견한 것이었다.
 
상대방 차는 노견에서 서서히 2차선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시속 20㎞ 미만이었다. 우리 차의 속도가 있었고 차간 거리가 짧아서 누가 운전을 하든 사고를 피할 수없는 상황이었다. 재빨리 핸들을 돌려 1차선으로 진입을 시도했으나 오른쪽 앞머리가 상대차의 뒷 부분을 받았다.
 
그 차는 뒤집어지면서 10여 m를 밀려갔고, 우리 차는 휘청거리고 밀리면서 도로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마침 뒤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었기에 다행이었으나 보험 회사에서 폐차를 권할 정도였다. 필자가 운전했고 옆자리에는 이순정 목사가, 뒷자리에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이 동행하고 있었는데 모두 안전하고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셨음을 확신한다. 그것은 바로 뒷자리에 있던 아내의 외마디 외침이이었다. "주여! 주여! 주여!" 앞자리에 있는 목사들은 "어어어어"하면서 차는 부딪치고 뒤집어지고 앞뒤로 차가 휘청거렸다. 그러나 누구하나 튕겨 나가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고 부상도 입지 않았다.
 
"주여"라는 외침 속에 그 순간 천사가 나와서 우리의 차와 우리의 몸을 붙잡아준 줄로 믿는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에서 새벽마다, 또한 예배 때마다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신 은혜인 줄로 믿는다. 그 밖에도 여러차례 이런 일을 당했으나 그 때마다 20년 동안 이런 저런 모양으로 지켜주시고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한국교회가 선교지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 주심으로 오늘까지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음을 감사 드린다. 한국교회에 다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기를, 우리 후대에 좋은 신앙의 본을 보여주기를 위해 선교지에서 간절히 기도를 드린다.
 
"주여, 한국교회를 붙잡아 주소서. 주여, 한국 교회를 부흥케 하옵소서. 주여,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붙잡아 주소서"
 
본교단 파송 멕시코 장덕인 선교사



선교지에서 건진 새생명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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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인 선교사
2013년 04월 24일(수) 15:44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누구나 겪는 일은 아니지만 적지않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사경을 헤매는 경우가 있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10년 전 교회 이전에 이어 곧바로 사택 이사를 했고, 그때 마침 교회 창립 특별 새벽기도회가 있었다. 한 사람이도 더 나오게 하려고 아내가 픽업을 하기로 했다. 마침 브라질에서 온 모 집사가 나온다고 하여, 교회와의 거리가 차동차로 30분거리인 센트로까지 한주간 다녔다. 낮에는 창립 주일 행사를 위한 대청소와 전도, 심방 등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한 달 가량 몸살, 감기로 고생했는데 그때마다 타이레놀과 아스피린으로 다스려가며 사역을 했다. 드디어 창립 주일을 은혜 중에 성대하게 잘 지냈다.
 
그러나 아내는 주일 오후부터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고 기침은 더욱 심해졌고 수요일부터는 열이 40도까지 올라 결국 금요일 오후에 동네 병원을 찾았다. 급히 진찰을 했으나 의사조차도 잘 모르겠다며 이틀 정도 입원을 권했다. 각종 검사를 했지만 뚜렸한 원인을 못찾았고 차도도 없었다. 결국 담낭이 회생 불가능 상태가 되고 말았고 떼어 내기로 했다
 
토요일은 청년대학부 수련회가 있어서 의사에 맡기고 수술 들어가는것도 보지 못했다. 수련회 개회 예배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보니 담낭절제를 마친 다음이었다. 그러나 수술 후에도 아내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주일 저녁에는 "여보 배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아요 이러다간 죽을 것 같으니 기도 좀 해주세요."라며 사경을 헤맸다. 계속되는 신음 가운데 밤중에 의사를 불렀더니 MRI 촬영을 하고 난 후 의사들도 알수 없으니 오늘밤을 잘 넘기고 아침에도 차도가 없다면 개복을 하겠다고 했다. 결국 아내는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월요일 아침에 개복 수술을 하게 됐다.
 
필자도 수술을 참관했는데 장기의 부분 부분에 노랗게 염증이 있었고 더러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멕시코의 무서운 살모넬라 균이 소장에 감염되어 소장에 많은 염증과 구멍이 생겨 결국 소장을 2m 정도 절단했다. 아내는 면역력이 떨어져 호흡 곤란과 기침, 코피가 쉬지 않고 흘렀고, 수술 후 합병증으로 몸이 부어 평소 50Kg이던 체중이 80kg까지 늘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은 건졌으나 23일 만에 퇴원을 하려니 병원비가 3, 000만원 정도 나왔다. 막막했다.
 
게다가 모든 여건이 열악하고 비싼 멕시코 병원에서는 2차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한국에서 수술을 하기로 하고 수술 후 2개월 정도 지나 수속을 했다. 12시간의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해 바로 병원으로 직행했다. 이후 여러 검사를 두 주간에 걸쳐서 하고 난 후에야 소장과 대장을 잇는 봉합수술을 했다.
 
선교지와 고국에서의 수술과 치료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여러 교회들과 개인적으로 사랑과 은혜를 받은 것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지면을 통해 두 가지만 말하고 싶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갑작스런 일을 당하고 막막할때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에 감사 드린다. 선교사 가정에게 큰 부담이었던 병원비도 많은 분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다 감당되었고 수술과 회복도 잘 되었던 것에 특히 감사 드린다. 지금은 그때의 기도 응답으로 무슨 일을 만나도 그저 감사하고 당치도 않는 오해와 비방이 있어도 잘 감당한다. 왜냐하면 다시금 새 생명을 주셨고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본교단 파송 멕시코 선교사 장덕인 목사



하나님의 섭리

[ 땅끝에서온편지 ]

장덕인 선교사
2013년 05월 02일(목) 10:40
부족한 필자가 멕시코에 와서 그리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한 것도 아닌데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3년 고국을 떠나기 앞서 장신대 선교훈련원에서 훈련을 받을 때 서정운 총장과 이광순 교수가 말씀하시길 "각자의 선교지에 가서 특별한 일을 안해도 그냥 잘 살면 됩니다. 그저 그들과 동화되어 같이 살면 됩니다. 큰 일 할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준비하면 됩니다"라고 말씀했다.
 
선교훈련 마지막 과정은 한국에 와서 선교 사역을 하다가 한국 땅에 묻힌 선교사 무덤을 탐방하면서 마무리 했다. 우리나라에 와서 풍토병 및 여러 질병으로 돌아가신 선교사와 그 가족, 심지어는 수 많은 어린 아이들이 묻힌 선교사 묘지를 방문하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미개하고 척박했던 한국에 오직 복음 하나를 들고 오신 선교사들의 뜨거운 열정과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나가 있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필자 부부다. 이 땅 멕시코에 와서 특별히 큰 사역은 못했으나 한 지역에서 20년의 세월을 오직 복음에 빛진 자의 마음으로 한인교회 사역과 아울러 현지인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지면을 이용해 필자가 하고 있는 현지인 선교사역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매년 목회자 세미나를 하며 현지인 사역자의 목회에 큰 도전과 희망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체계화된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 평신도에서 바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 분들이 대부분이기에 필자가 섬기는 한인교회에서 실시하는 목회자 세미나에는 매번 200명 가까운 목회자들이 함께 교제하며 말씀으로 재도전을 받고 있다. 어떤 이는 목회 현장에서 지친 목회자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는 사역이라며 매우 고마워한다.
 
20여 년 동안 현지인 목회자 세미나를 하다보니 지금은 이 지역 목회자들이 서로 좋은 유대 관계를 갖고 각자의 사역에도 많은 열매들을 맺고 있다. 이곳도 우리나라 못지 않게 교파 간의 갈등이 있어서 다른 교파에서 모임이 있을 때에는 서로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의 교회에서 모임을 갖거나 세미나를 하면 교파를 초월해 참석하는 것이 처음에는 경이롭게 느껴지곤 했다. 한 번은 우리 한국인 목사들을 초청해 현지인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주최한 교회가 속한 교단의 목사들만 참석해 그 다음 부터는 항상 필자의 교회에서 세미나를 하고 있다.
 
둘째는 과달라하라 지역에 있는 교회를 한달에 한번 방문한다. 그때에 난 돋보기를 갖고 간다. 감사한 것은 목회자 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에게도 좋은 반응이 있고 큰 선교의 장이 되고 있다. 돋보기 선교의 시작은 필자의 외삼촌으로 미국 산호세에 사는 김종주 장로(서울 동신교회, 제50회 총회장을 역임하신 고 김세진 목사의 막내 사위)께서 오직 돋보기 선교만을 위해 도움을 주신다. 현지교회들은 이 때를 이용해 지역 사회에 많은 홍보를 하고 이웃의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 초대해 말씀을 듣고 돋보기를 나누며 기쁨을 함께하며 전도의 기회로 삼고 있다. 지금까지 25개 교회를 방문했고 때로는 방문했던 교회에서 재방문을 요청하기도 한다.
 
개인에게 맞는 돋보기를 찾기 위해 요한복음 3장 16절을 크게 읽어보라고 한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이 그 말씀을 듣게되고 본인 차례에 또 다시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늘 은혜를 받는다. 시골이나 도심 변두리에 사는 노인들이 본인을 위해 돋보기를 구입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형편이다. 노인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기도 하고 교회에서 예배 후에 나눠 주니 전도의 효과도 얻을 수 있다. 현지인 선교를 위해 여러 곳을 다녔기에 요즘은 시골 어디를 가든 알아보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선교는 "꾸준히 한 지역에 정착해 오래 살면서 그 주변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해 본다.
 
본교단 파송 멕시코 선교사 장덕인 목사


한인선교의 아픔과 상처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장덕인 선교사
2013년 05월 10일(금) 14:54
한인선교와 현지인선교를 함께 한다고 하면 한인 사역의 힘과 역량으로 현지인 선교를 하기 때문에 쉽게 선교를 하지 않나 하고 오해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주님의 은혜로 많은 사랑과 축복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면의 선교를 위해 받는 이중적 고충 또한 많았음을 회고한다.
 
필자가 사역하는 과달라하라의 한인 사회는 교회가 없는 곳이었다. 남미의 자유 분방함이 넘쳐나는 곳으로 사람들은 자기 마음데로 자유롭게 생활하는데 익숙한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에 30대 후반의 젊은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세웠다. 교회 개척의 기쁨은 잠시였고 교회가 없던 곳에 세워진 첫 번째 교회였고 한인 사회의 첫 번째 기관이었기에 교회를 바라보는 관심과 기대가 지나쳤다고 할 수 있었다. 한인 영혼 구원을 위해 선교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오해, 핍박, 분열 등은 말 할 것도 없고 지금도 현지인으로부터 당하는 고통을 어찌 다 지면에 옮길 수 있으랴.
 
낯선 곳에 와서 당하는 여러가지 일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아내는 귀에서 고름이 흘러나왔다. 의사의 진단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어려서 앓았던 중이염이 재발했다는 것이다. 이대로 두면 염증이 뇌에까지 퍼지고,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빨리 수술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멕시코의 의료시설이나 의료체계 등을 활용하기에는 언어의 문제나 이곳 사람들의 업무처리 형태 등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은 가증됐다. 중이염 수술은 뇌와 연관된 곳이기에 무엇보다도 환자에게는 안정이 중요하므로 고국에서 수술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았다. 강한 항생제를 써서 일단 염증을 가라앉힌 다음 파송 후 3년 만에 중이염 수술을 위해 일시 귀국하게 됐다. 당시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갈수 없어서 주변의 도움으로 함께 고국을 방문했다.
 
약 2개월 정도의 치료를 마치고 선교지로 돌아와 보니 교인 몇 가정이 나가서 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어떻게 온 가족이 고국 방문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당시 아이들이 유치원생이고 누구에게 맡길 처지도 못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 누구나 언제든지 고국방문을 하는 여유들이 생겼다. 그러나 그 때에 자기들은 가족이 동시에 고국 방문을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는 수밖에,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이유로 교회가 하나 더 생기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부흥이 되어서 많은 성도가 모였다. 그런데 새로온 교인들이 열심을 내면 그것이 시기와 질투가 되어서 교회를 나가곤 했다. 이것이 이민 목회의 큰 갈등 가운데 하나이다.
 
그 중에 큰 아픔은 안수집사 투표를 하면서 4명을 뽑기로 하고 투표용지에 4칸을 마련했다. 개표결과 4명의 안수집사가 피택되었다. 이 중 한 명이 "그 사람이 어떻게 안수집사가 될 수 있느냐? 투표용지를 4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문제를 제기하고는 교회를 떠나버렸다.
 
본교단 파송 멕시코 장덕인 선교사

후원비, 헌금 문제로 분열 아픔 겪기도

[ 땅끝에서온편지 ] 땅끝에서온편지

장덕인 선교사
2013년 05월 20일(월) 09:42
어느덧 땅끝에서 온 편지의 마지막 회가 됐다. 멕시코에서 감당하고 있는 한인교회 사역의 어려움들로 마무리를 짓는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계속 부흥시켜 주셔서 한인교회와 현지인 선교사역도 잘 감당하고 있을 때 남미 경제가 나빠지면서 교회에도 어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안수집사와 남미에서 온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어떻게 교회 은행계좌가 목사 명의로 될 수가 있냐는 이유를 들어 다시금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선교사를 파송 할 때는 선교비를 지원하기 때문에 선교사에게는 사례비를 지급할 부담이 없고 사람들만 모이면 된다고 하며, 바로 옆에 타교단 파송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세우고 나갔다. 과달라하라 교민은 500여 명 정도인데 교회가 또 하나 세워졌다. 그리하여 우리교회와 함께 모두 4개의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이것이 이민목회의 현장이고 현실이다. 이민 나온 한국 사람들은 특별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본다. 최근의 아픔은 2년 전 한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를 공개하라며 교인들을 현혹하여 교회를 완전히 쪼개고 말았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인터넷 때문이었다. 필자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이름이 나오는 교회들은 모두 선교비를 지원하는 교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필자의 부친께서 개척해서 세운 서울의 H 교회에서 과달라하라로 파송한 파송선교사와 나란히 내 이름이 있으니 똑같이 후원을 받을 것이라는 오해가 가장 큰 이유였다. 아버님께서 개척한 교회이므로 당연히 전담 파송선교사일 것이라는 오해다. 필자는 H교회에서 월 10만원을 지원받는 협력 선교사이다. 인터넷을 들추어 아무것도 모르는 교인들을 선동하여 목사를 불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민 목회의 한 단면 인 것이다.
 
교회 개척 때부터 필자는 헌금 생활에도 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20년 동안 보내오는 선교비는 생활비와 교육비를 제외하고 사례와 함께 모두 헌금을 했다. 그러자 어떤 이들은 그렇게 헌금을 하면 어떻게 생활을 하느냐, 어떤 이들은 오는 것이 많으니 헌금을 많이 하지 않겠느냐 했다. 아무리 투명하게 헌금을 해도 그것이 또 이유가 되어서 교인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교회의 자체 건물 구입에 대해 부담을 느낀 임직자들이 첫째는 목사의 투명성에 대해서 문제를 삼았고, 둘째는 옆 선교사는 후원을 잘 받아오는데 교회건축 및 자체건물을 구입한다고 하면서 왜 후원을 받아오지 않으냐는 것이 이유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교인들은 흩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인도하셔서 멕시코 땅에 그 동안 기도해 왔던 선교 센터로 교회 건물을 허락해 주셨다.
 
필자는 멕시코 선교사로서 다음 세대를 위한 선교 현장을 만들어준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제 얼마 후 은퇴를 해도 후임이 오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마음껏 선교활동을 할수 있게 됨을 생각하며 또 감사 드린다. 20여 년간 비싼 월세로 지내면서 자체 건물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며 건축헌금과 특별헌금 등으로 준비했고, 부족한 금액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멕시코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마음에 드는 건물을 구입했다. 지금 남아있는 은행융자금 7천만원 정도를 연12%의 이자를 내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으나, 이제 멕시코 선교지에 선교의 터전이 마련됨이 큰 기쁨이요 보람이다. 특별히 멕시코 선교를 위해 후원과 기도를 해 주시는 여러 교회에 이 지면을 통해 감사 인사를 드린다. 끝으로 멕시코 선교가 꾸준히 지속되어 1억 2천만의 영혼을 품고 기도하며 그들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며 나누는 선교의 장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란다.
 
본교단 파송 멕시코 장덕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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